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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을 나온 유현과 한서희는 안칠성이 알려준 주소로 자리를 옮겼다. 도착한 곳은 중심가에 있는 호텔이었다.
“여기로 올 거였으면 진즉에 알려주지.”
“난 분명 거기서 기다리라고 했어.”
두 사람은 로비에서 안칠성과 메이블을 만났다.
포탈 관제소에서 사람들에게 한참 시달렸는지 메이블의 상태는 그리 좋지 않아 보였다.
“미안해요, 메이블...”
한서희의 사과에 메이블이 힘없이 웃었다.
“조금 무서웠어.”
“......”
“나한테 자꾸 물어봐. 다른 애들 어디 갔냐고. 나도 모르는데….”
“진짜 미안해요.”
유현은 그런 두 사람을 보더니 안칠성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칠성 역시 안색이 상당히 피곤해 보였다.
“쟤는 그렇다치고, 선생님은 몰골이 왜 그래요?”
“도우려다 휘말렸다. 조용히 기다리기만 했었으면 이럴 일 없었을 텐데.”
“조용히 있었는데 누가 알아봐서 피할 수밖에 없었어요.”
한서희가 유현 대신 상황을 설명했다.
안칠성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유명해지긴 했지. 가려도 알아볼 정도이니.”
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체감은 생각 이상이었다.
메이블 한 사람뿐이었는데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다니.
안칠성은 조금 전의 인파를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아직도 거기 있었을 거야.”
“그 사람이요?”
“메이블. 네가 설명 좀 해줘라. 선생님 체크인 좀 하고 오게.”
“아, 네!”
안칠성이 카운터로 사라지고, 메이블은 바통을 이어받았다.
“미국 팀이 사람들을 불러와서는 길을 터줬어.”
미국 팀이라는 말에 유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리도 그 사람들 만났는데?”
“미국은 두 팀이에요. 아마 메이블 쪽이 만난 건 동부 팀이겠죠.”
유현의 의문을 해소해준 건 한서희였다.
“두 팀이 가능해?”
“미국이잖아요.”
“아...”
짧은 설명이었지만, 유현은 이해했다. 세계 1위 헌터 국가, 미국.
과거부터 뛰어난 헌터들이 끊임없이 배출되었으며, 여러 국가의 강한 헌터들을 귀화시키며 인재풀을 넓혔다.
그 덕에 아카데미에는 괴물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고, 두 팀이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걔네는 대체 얼마나 수준이 높은 거야?”
“글쎄요.”
“별로 쌘 것 같지는 않던데.”
유현이 주먹을 쥐었다 펴며 주점 바닥에 처박은 금발을 떠올렸다.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더럽게 침은 왜 뱉어?”
“도발이죠. 당신이 그렇게 때릴 거라고 생각은 못 했겠지만.”
보통은 좀 더 전조를 두고 주먹질을 하기 마련인데, 유현은 냅다 주먹을 꽂아버렸다.
아무리 상대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도발이었다지만, 아마 누구도 그런 상황을 상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냐?”
안칠성이 어느새 체크인을 마쳤는지 키를 들고 유현의 등 뒤에 서 있었다.
“미국팀을 때렸어?”
“맞을 짓을 했거든요.”
“동부 팀이냐? 아니면 서부 팀?”
“서부 팀이요.”
“...야단났군. 서부 아카데미는 호전적이기로 유명한 곳인데.”
그때, 한서희가 갑자기 저쪽으로 손가락을 뻗었다.
“저, 저기...”
당황한 얼굴로 말을 더듬는 한서희.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가고, 안칠성의 표정이 굳었다.
입구를 통해 서부 팀이 들어오고 있었다.
“......혹시 지금 부축받고 들어오는 애가 네가 때린 놈이냐?”
“와, 애가 갔네.”
“......”
안칠성은 착잡하게 한숨을 쉬었다.
“일단 자리를 피하자. 지금 마주쳐서 좋을 게 없는 것 같으니까.”
경기 전 충돌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다.
괜히 싸움이라도 났다가는 최악의 경우 실격까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상대가 미국 팀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들에게 표면적인 권한은 없지만, 대회 위원회에게 미국이 가지는 위상은 절대적.
괜히 척을 졌다가는 뒤에서 어떤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
“어! 안 선생님!”
그때, 한 외국인이 안칠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서부 팀의 시선이 그들에게 돌아갔다.
“저, 저 새끼 저기 있다!”
유현을 발견하고 죽일 듯 눈을 부라리며 뛰어오는 서부 팀.
안칠성은 다급히 유현을 밀었다.
“야! 일단 튀어!”
“예? 제가요?”
“딱 봐도 싸우자고 오는 거잖아!”
“싸워도 내가 이기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챈 한서희는 급히 유현의 손을 붙잡았다.
“답답한 소리 말고 일단 가요!”
얼떨결에 한서희에게 이끌려 달아나는 유현.
메이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부 팀과 멀어지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왜 또 나만 두고 가!”
서부 팀의 살벌한 기세에 짓눌린 메이블이 황급히 자리를 벗어나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쟤네 도망간다!”
안칠성이 계속 쫓아가려는 서부팀의 앞을 막아섰다.
이윽고 그에게 손을 흔들었던 외국인도 옆에 도착했다.
“뭐야? 안 선생님. 다른 애들 왜 다 도망가?”
“넌 뭐야? 이 돼지 새끼야!”
외국인이 안칠성과 서부 팀을 번갈아 보았다.
안칠성은 그런 외국인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여기서 또 보네요. 메리.”
“아, 예.”
동부 팀의 인솔 교사 메리.
아까 전 안칠성과 메이블을 도와준 사람이었다.
메리는 안칠성과 인사를 나누고는 서부 팀에게 눈을 돌렸다.
“너희 서부 팀 아니니?”
“아줌마는 뭔데? 이 돼지 남편이야?”
“......”
국가만 같을 뿐, 소속된 아카데미는 다르니 학생들은 다른 아카데미의 선생을 알아보지 못했다.
반면, 메리는 웬만한 국가의 아카데미 영상은 대부분 챙겨봤다.
서부 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제임스 어딨어?”
“제임스? 네가 우리 선생을 알아?”
메리는 말 대신 명함을 꺼내 학생에게 건넸다.
명함을 받아든 학생이 입을 크게 벌리더니 이내 뒷걸음질 쳤다.
“여! 메리!”
먼저 뛰어간 몇몇 아이들보다 늦게 도착한 제임스와 다른 학생들.
여유로운 그의 모습에 메리가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제임스. 애들 관리 똑바로 안 해?”
“하하! 이해해줘! 아까 그 친구한테 한 대 맞았거든.”
제임스가 자신이 부축하고 있던 금발 머리를 고갯짓했다.
“안톤?”
“이놈이 유한테 침을 뱉었다가 된통 얻어맞았어.”
대화를 듣고 있던 안칠성은 저도 모르게 송구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침을 뱉었으면 똑같이 침이나 뱉어줄 것이지 주먹질은 왜….
“아, 인사해. 여긴 한국 팀의 인솔 교사 안이야.”
“오, 전 제임스라고 합니다.”
안칠성이 어색하게 그의 손을 맞잡았다.
“죄송합니다. 저희 애가….”
“아뇨! 먼저 침을 뱉은 이놈이 잘못이죠. 저희 쪽 애들이 워낙에 사나워서요.”
안칠성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걸고넘어지면 어떡할까 싶었는데 다행이었다.
“아, 그리고 감사의 말씀도 드리고 싶네요. 그 친구가 제 목숨을 구해줬습니다.”
“목숨을요?”
“예. 주점에서 습격이….”
이야기를 들은 안칠성이 못 살겠다며 이마를 짚었다.
‘대체 언제 또 슬럼가까지 갔다 온 거야.’
가지 말라고 미리 주의를 줬어야 했는데.
일정이 정신없다 보니 미리 말해주는 걸 깜빡했다.
“아무튼, 무사하셔서 다행이네요.”
“다 그 친구 덕분입니다. 저희 안톤을 때린 것도 사실 짚고 넘어가면 문제가 되긴 하지만, 그 친구가 절 도와주었으니 눈 감아 드리겠습니다!”
그 일이 없었다면, 그냥 지나치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안칠성은 사뭇 다른 눈으로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사람 좋게 웃는 신사의 모습. 하지만 그 속은 외형처럼 만만한 인물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쪼록 이번 대회에서 좋은 성과 거둬가시길 바랍지요.”
“예. 그쪽도요.”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솔직히 이번이 한국팀에게는 우승 적기라고 봅니다. 반짝이는 황금세대잖아요? 지금 아니면, 기회는 없다고 봐야죠.”
제임스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건 명백한 조소였다. 안칠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황금세대.
칭찬처럼 들리지만, 잠깐의 반짝거림이라며 비꼬는 이들도 몇 있었다.
아무리 뛰어난 아이들이 나온다고 해도, 결국 근본적인 배경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제임스의 말 역시 그런 뜻이리라.
“그렇죠. 이번에는 중국 팀과 일본 팀을 꺾고, 우승 한 번 해봐야겠습니다.”
화를 낼 법도 했지만, 안칠성은 침착했다.
“그럼 저는 이만.”
안칠성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자리를 비우자 메리가 제임스의 가슴팍을 툭 쳤다.
“꼭 그렇게 도발을 해야겠어?”
제임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편이 재밌잖아. 저 선생도 꽤 잘 받아치는걸.”
그가 언급했던 중국과 일본 역시 강팀이긴 하지만, 미국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런데 꺾어야겠다는 대상에서 말하지 않은 걸 보면, 의도는 명확했다.
“선생도 그렇고, 학생도 그렇고. 이번 한국팀은 꽤 기대되는군.”
제임스가 멀어지는 안칠성의 등을 보며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
도망쳤던 세 사람은 곧 합류한 안칠성과 함께 호텔 객실로 들어갔다.
성별에 맞게 두 사람씩 같은 객실을 사용했다.
“와, 넓다.”
스카이 아일랜드에서 가장 좋은 호텔은 아니지만, 중심가에 있는 호텔들은 웬만큼 좋은 시설을 갖췄다.
“바로 옷 갈아입고 준비해라.”
“어디 가는데요?”
“미리 스케줄표 나눠줬잖아. 미리 온 건 적응 문제도 있지만, 일정 잡힌 게 많아서야.”
유현은 안칠성이 던진 스케줄표를 확인했다.
한 시간 뒤부터 다음날과 그다음 날의 계획까지 빼곡했다.
“인터뷰, 인터뷰, 인터뷰…. 무슨 인터뷰가 이렇게 많아요?”
“원래 다들 그래. 이번에는 한국에 관심이 높아져서 이전보다 더 많아진 것 같다.”
각국 대표 선수들의 언론 인터뷰는 세계 선수권에서 빠질 수 없는 전례 행사였다.
아무리 힘이 없는 국가라고 해도 몇 개의 매체에서 달라붙을 정도였다.
한국은 한창 화제가 된 국가였기에 여러 국가의 다양한 매체들과 인터뷰가 잔뜩 잡혔다.
“인터뷰 끝나면 그 뒤로는 자유시간이다. 중심가를 돌아다니든, 훈련하든 마음대로 해도 돼.”
“끝나면 밤인데요? 그나마 마지막 날은 좀 널널하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그런 걸 따지냐. 참고로 첫 일정은 동아시아 국가들과 단체 기자회견이다.
괜한 말 하지 않도록 조심해라.”
“상대가 말조심하면 저도 괜한 말 안 하죠.”
안칠성이 한숨을 쉬었다.
“되로 받고 되로 주는 거면 상관 없어. 근데 너는 되로 받고 말로 주잖아.”
“그게 정상 아닌가?”
“우린 그걸 과도하다고 표현한다. 과한 언행만 하지 마.”
유현은 대충 알아들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어둡고 서늘한 공간에 여러 사람이 대열을 맞춰 나란히 서 있었다.
곧 작은 불이 켜지며 그들의 앞으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여전히 내부는 어두웠지만, 남자의 볼에 새겨진 뒤집힌 해골 문양은 똑똑히 보였다.
“모든 실험이 성공적이었다.”
고저 없는 음성. 그런데도 남자의 말에서는 강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작전을 시작한다. 2차 돌입 일자는 시상식. 그전까지, 최대한 많은 물량을 확보해라.”
불이 꺼졌다.
모여 있던 수십의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