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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는 헌터가 하고 싶다-125화 (125/219)

125

“펑?”

신룡의 이름을 들은 김풀잎은 곧장 고개를 갸웃했다.

“중국에 펑이라는 헌터가 있는데.”

“그래?”

“겹치면 좀 그렇잖아. 다른걸로 바꿔봐. 좀 한국 이름처럼 말이야.”

유현은 미간을 좁히며 침음했다.

확실히 듣고 보니 이름에 이국적인 느낌이 담겨 있었다.

부르기도 쉽고 받침이 있어서 입에 잘 감기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미르는 어때?”

고민하던 그에게 김풀잎이 의견을 냈다.

“미르?”

“얘 생긴 게 꼭 판타지에서 보는 드래곤이랑 비슷해. 드래곤이 우리나라 말로는 용이라는 뜻이고, 미르는 용의 순우리말이거든.”

누가 보더라도 신룡은 드래곤과 비슷한 외형이었으니, 그녀가 드래곤을 언급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유현은 순간 짜증이 치솟았다.

그가 아는 드래곤과 김풀잎이 아는 드래곤의 간극은 하늘과 땅 차이.

지구의 드래곤은 어느 정도 긍정적인 이미지가 있지만, 판대륙의 드래곤은 하나 같이 되먹지 못한 쓰레기였다.

‘잘 모르니까 그냥 참자.’

차이의 간극을 알기에 유현은 한숨을 쉬며 화를 털어냈다.

“나쁘지 않네.”

“그치? 괜찮지?”

미르. 받침의 부재로 입에 감기는 맛은 없어도 펑 보다는 멋있는 이름이었다.

드래곤과 관련 있는 이름이라는 게 조금 걸리긴 하나 그런 걸 따질 만큼 미신에 심취하지는 않았다.

“얘는 근데 어떻게 이렇게 드래곤이랑 비슷하게 생겼지? 꼭 영화 속에서 실사화된 것 같아.”

“몬스터 종류가 많으니 겹칠 수도 있지.”

“하긴. 오히려 영화보다 몬스터가 원조일 수도 있겠다.”

김풀잎은 확실히 몬스터가 먼저인 가능성이 크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건 둘째치고, 너는 왜 여기 있냐?”

늦은 저녁 기숙사.

김풀잎이 찾아온 건 불과 10분 전의 일이었다. 느닷없이 와서는 이유도 말하지 않은 채 방에 누워 뒹굴뒹굴하고 있다.

“윗집에서 자꾸 뭐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

“윗집? 누군데?”

“서혜빈. 선발전 끝난 이후로 계속 그러더니 오늘 유독 심해.”

상대가 서혜빈이라는 말에 유현은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선발전에서 그렇게 아쉽게 졌으니, 마음이 편치 않을 만도 하다.

“밤에 잠도 못 자.”

“가서 한마디 하지.”

“귀찮아.”

“여기까지 오는 건 안 귀찮고?”

김풀잎은 챙겨온 이불에 머리를 파묻은 채 유현의 말을 흘렸다.

“다른 애 집 가면 되지. 와도 꼭 여기로 오냐.”

“나 친구 없는데. 그리고 여기가 편해. 집에 아무것도 없잖아.”

“그래서 귀찮음을 무릅썼구나.”

사는데 필수적인 가구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유현의 기숙사.

즉시 입주가 가능한 빈집 수준이었다.

“......이걸 들키네.”

“마음 놓고 자라자.”

“이예이.”

유현은 가구도 창문도 없는 작은 방에 김풀잎을 남겨둔 채 방을 나왔다.

굳이 쫓아낼 생각은 없었다.

친구가 없다는 말에 약간의 연민을 느꼈고, 무엇보다 신룡을 세상으로 나오게 해준지라 고마운 마음이 컸다.

‘동물 잡는 걸 도와준 것 치고는 과분한 도움을 받았어.’

넘쳐나는 방 중에서 하나쯤 넘겨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나저나 대체 뭘 하길래 이런 집에서 층간소음이 생겨?”

나름 고급 멘션 느낌의 기숙사였다. 유현은 지금까지 한 번도 소음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김풀잎은 그걸 피해 도망까지 오다니.

으슥한 시간이었지만, 유현은 집을 나섰다.

김풀잎이 오고 얼마 지나지 않았으니 서혜빈도 아직 깨어있겠지.

***

밤이 되면 기숙사의 출입이 제한된다.

김풀잎도 그래서 1층 베란다를 통해 들어왔다.

만약 시간이 조금만 어긋났거나, 유현의 집이 1층이 아니었다면 김풀잎은 밤새 소음에 시달렸으리라.

“조용한데.”

유현은 벽을 타고 서혜빈의 거주층까지 올라갔다.

한 번 가본 적이 있기에 찾아가는 건 쉬웠다.

베란다를 통해 들여다보이는 캄캄한 내부. 두꺼운 유리창을 뚫고 목소리가 울려왔다.

“와….”

엄청난 성량에 감탄하기도 잠시.

이번에는 쿵쾅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박자가 있는 걸 보니 음악 소리 같았다.

“......”

밖에서도 이렇게 들리는데 아랫집 살던 김풀잎에게는 어땠을까.

다른 곳으로 도망친 게 결코 엄살이 아니었다.

“단단히 미쳤구만.”

아무리 자기 방이라지만, 오밤중에 이렇게까지 크게 음악을 틀어놓다니.

공익을 위해서라도 그냥 두고 지나갈 수 없었다.

“한 마디 따끔하게 해줘야지.”

베란다의 창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유현은 베란다의 창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캄캄한 내부.

오직 서혜빈의 방에서만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아아아아아악!

음악 소리와 비명이 뒤엉켰다.

쿵쾅거리는 진동도 더 크게 느껴졌다.

유현은 형형색색의 빛이 흘러나오는 방으로 다가갔다.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 대?’

유현은 방문을 살짝 열었고, 곧 그게 단순한 비명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워어어어~”

서혜빈은 크게 음악을 켜놓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대중가요가 아닌 일본어로 이루어진 가사가 울려 퍼졌다.

“......”

자기 나름의 스트레스 해소일까.

자신을 패배시킨 상대에게 화풀이하거나 은밀하게 뒤통수를 치려는 행동에 비하면 평화로운 방식이었다.

‘그래도 이건 너무 시끄러운데….’

잠시 고민하던 유현은 마음을 바꿔 먹었다.

어차피 며칠의 비행일 터.

김풀잎도 무사히 잘 곳을 마련했으니 서혜빈의 일탈을 굳이 짚고 넘어갈 이유는 없었다.

‘그 정도는 이해해주마.’

유현은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흥겹게 춤추던 서혜빈이 박자에 맞춰 몸을 홱 돌렸다.

“......!”

사람이 너무 놀라면 말이 안 나온다고 했나.

서혜빈은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심장은 철렁하고 내려앉았고, 입 밖으로는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이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쓰러지듯 주저앉은 서혜빈.

두 눈은 여전히 불청객에게 향했다. 불을 꺼놓은 탓에 보이는 거라고는 얼핏 한 인영뿐.

당황하여 넋을 놓고 있기를 잠시. 다시 정신을 차린 서혜빈이 침입자에 대처하기 위해 마나를 끌어 올렸다.

“자, 잠깐만!”

유현이 황급히 방안으로 들어왔다. 천장에 매달은 미러볼 아래로 유현의 모습이 드러났다.

“...유현?”

유현이 벽에 붙어 있던 전등을 켰다. 방이 환해지며 난장판이 된 내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얼마나 격렬하게 스트레스를 풀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와, 더러운거 봐.”

“아니, 이건 그냥 잠깐….”

해명하려던 서혜빈은 곧 상황을 파악하고 인상을 썼다. 여긴 어디까지나 자신의 방. 쓰레기를 쌓아놓았다고 해도 남에게 변명을 댈 이유가 없는 곳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창문이 열려있길래.”

“미쳤어? 아무리 그래도 남의 집에 함부로 들어오면….”

유현은 재빨리 앞으로 손을 뻗었다. 서혜빈의 말처럼 무단 침입은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그러니 적당한 이유를 대야 했다.

“너무 시끄러워서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어.”

“뭐?”

“밖에서 지나가는데 네 노랫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 퍼지더라고.”

그 말에 서혜빈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바, 밖에서도 들린다고?”

“그래.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왔겠어?”

“......”

“그렇게 시끄럽게 할 거면 벨 누를 때 좀 열어 주든가. 문도 안 열어줘서 창문으로 들어왔다.”

벨을 누른 적은 없지만, 서혜빈은 그 점을 눈치채지 못했다.

음악을 그렇게 크게 켜놓고 즐겼으니 만약 벨을 눌렀다고 해도 듣지 못했을 것이다.

“조용히 좀 놀아, 인마. 밑에 층에서도 민원 들어왔어.”

“미, 밑에서? 밑에 누가 살지?”

“김풀잎.”

“아, 풀잎이... 하아...”

서혜빈이 고개를 숙이며 뜨거워진 얼굴을 양손으로 식혔다.

부끄러워서 차마 고개를 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노래 부르는 건 좋은데 볼륨좀 줄이자고. 알겠지?”

“......미안. 밖에서 들릴 줄은 몰랐어.”

“안 들리는 게 더 이상하지. 아무리 방음이 잘된다지만, 여기가 콘서트장도 아니고 말이야.”

서혜빈의 얼굴은 더 붉어졌다.

유현은 그녀의 귀가 달아오른 것을 확인하고는 피식 웃었다.

“혹시 신청곡 받냐?”

“......”

“춤도 잘 추던데. 이렇게 췄었나?”

몸을 휘적거리는 유현.

서혜빈이 부끄러움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그냥 좀 가주면 안 될까…?”

“한서희가 우승해서 짜증 나?”

뜬금없는 유현의 말이 서혜빈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뭐, 뭐라고?”

“한서희가 우승했잖아. 그래서 며칠째 이러는 거 아냐?”

부끄러웠던 감정이 서서히 사라졌다. 심장의 떨림도 잦아들었다.

이내 서혜빈이 표정에 노기가 어렸다.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네가 이러는 이유가 그것뿐이니까.”

“그냥 가. 너랑 할 말 없어.”

선발전이 끝나고 고작 며칠이 지났다. 아무렇지 않은 척 지내고 있지만, 패배가 쓰라릴 정도로 가슴에 남아 있었다.

“너무 결과에 목매지 마. 그러다 망하는 사람 여럿 봤어.”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대충은 알지. 너희가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랐고, 예전에는 꽤 친했다는 것. 그러다가 일이 틀어지고, 살아남기 위해 한서희네 집안에 빌붙었던 것도.”

서혜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걸 대체 어디서 들었냐고 묻는 듯한 얼굴이었다.

“별로 비밀도 아니더만.”

유현은 예전부터 두 사람이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궁금했었다.

라이벌 관계에 있다면 대개 그 이유가 있기 마련이니까.

다른 집 사정이기에 굳이 찾아볼 생각은 없었지만, 주변에서 알려준 덕에 알게 됐다.

“누가 너한테 그런 걸 알려 준 거야?”

“내가 알고 싶었던 건 아니야. 우연히 듣게 된 거지.”

교실에서 이루어지던 다른 아이들의 대화. 또, 업계에서도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강찬성을 통해 그의 귀에도 들어왔다.

‘그리 상세한 내용도 아니고, 확실하지도 않았는데 반응 보니 어느 정도는 맞나 보네.’

한서희는 서혜빈에게 큰 악감정은 없었다고 한다.

먼저 거리를 벌린 건 서혜빈이고, 복수나 사소한 나쁜 짓을 시작한 것도 서혜빈이라고 했다.

그게 반복되다 보니 결국에는 서로를 증오하는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적어도 걔한테는 지고 싶지 않았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

한껏 풀어 헤쳐진 모습과는 달리 이어지는 말 역시 차분했다.

“그래서 누구보다 노력했어. 그 아이를 이기고 싶었으니까.”

한때는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이제는 과거의 이야기.

가세가 기울며 한서희의 집에 얹혀살기 시작한 이후로, 지옥은 시작되었다.

-어딜 손대. 외부인 주제에.

-숨만 쉬어라.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민폐니.

-부모는 뭐 하나 몰라.

-애를 방치하니까 이 모양이지.

저택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한서희의 친척, 사촌, 그리고 사용인까지.

그들에게 들었던 모멸의 말과 시선들은 깊은 상처가 되어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나마 한서희가 있어서 버틸 수 있었어. 걔랑 놀고 나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한서희도 자신을 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착각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행동은 곧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언제는 다른 집의 아이들이 놀러 왔어. 그래서 한서희가 나에게도 같이 놀자고 말하지는 않을까. 옷까지 챙겨 입고 기대했었지. 근데 나랑 마주쳐놓고 눈길 한번 안 주더라.”

그녀를 향한 질투와 분노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괜히 싫어하는 게 아니었네.”

“어때? 이 정도면 이해되지?”

“글쎄.”

유현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서혜빈은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썹을 구부렸다.

“네가 뭘 몰라서 그래.”

“뭘 모르는 건 네가 아닐까?”

“뭐?”

“어른들이 널 싫어했다며. 그럼 한서희가 아무리 널 좋아한다고 해도 같이 놀 수는 없었겠지.”

어렸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어른이다.

그들이 하는 말은 곧 진리이며, 공포였다.

“그러니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식으로 무시하는 건….”

“만약 너였으면 어땠을 것 같아? 어른들이 한서희를 싫어하고, 같이 놀면 혼내겠다고 이야기했어. 넌 그래도 한서희와 놀았을까?”

역지사지에 관한 원론적인 이야기. 무척 단순하지만, 그래서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봐. 너도 그렇잖아. 한서희도 똑같았을 거야.”

“......아냐. 그 자존심 강한 애가 그랬을 리가 없어.”

서혜빈이 애써 부정하고 싶은 투로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작은 가능성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한서희와 사이가 나빠진 게 결국에는 자신의 탓이라는, 그런 가능성.

“지금이야 집안에서 누가 무슨 말을 하든 쉽게 받아들이지 않겠지만, 과연 어렸을 때부터 그랬을까?”

유현의 말에 서혜빈은 그녀의 과거를 떠올렸다. 조금 냉정한 면은 있었지만, 무척 정이 많고 다정한 아이였다.

꽃 한 송이 쉽게 꺾지 못했고, 벌레 한 마리도 쉽게 죽이지 못하던 그런 아이.

“네가 자꾸 그러면 꼭 내가….”

“걔랑 사이가 나빠진 게 네 탓은 아니지.

원인을 제공한 건 어디까지나 한서희네 집안 어른들이야. 내가 말 하고 싶은 건 지금 네가 증오해야 할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거고.”

자신의 마음을 읽는 듯한 유현의 말에 서혜빈은 할 말을 잃었다.

“네 잘못이 아니니 넌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어. 마찬가지로 한서희의 잘못도 아니야.”

“......”

“이건 전적으로 어른들의 잘못. 이간질과 잘못된 정치질로 너희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탄생했지.”

결국,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말하는 유현.

서혜빈은 문득 유현에게서 익숙한 사람을 느꼈다.

자신에게 세상에 관해 이야기하던 할아버지.

왜일까. 유현에게 그런 할아버지가 겹쳐져 보이는 것은. 덩달아 그녀의 마음을 그리움이 가득 채우는 것은.

“굳이 한서희와 사이가 나쁠 이유가 없어. 지금이라도 친하게 지내보는 건 어때?”

유현은 말하면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왜 여기 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생각나는 대로 떠들다 보니 이야기가 여기까지 와버렸다.

‘남한테 괜한 소리를 다 하는군.’

유현은 어색하게 방 곳곳에 시선을 두었다가 몸을 돌렸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니 이대로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너 대체 뭐야?”

나가려던 그의 발을 서혜빈의 울먹임이 붙잡았다.

“너 대체 뭔데…….”

싸한 느낌에 유현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자신은 선을 넘었다.

한서희를 언급한 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는데, 서혜빈의 성격상 오히려 문제를 촉발시킬 가능성이 컸다.

‘잘못하면 한 바탕 싸움 나겠는데.’

어떡해야 이 상황을 무탈하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그는 머릿속을 정리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아, 그, 미안하다. 내가 뭐 주제넘게 말이 많았는데, 다 너 도움되라고 하는 말이거든? 이제는 네가 한서희보다 약하다는 걸 솔직히 인정하고, 복수가 아니라 순수하게 승부욕을 불태우는 건 어때? 그게 훨씬 건강하고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유현은 서혜빈이 화를 내기 전에 속사포같이 말을 내뱉었다.

울음기를 가득 담고 있던 서혜빈의 눈동자가 순간 동그래지더니 이내 몇 번인가 깜빡였다.

곧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뭐야.”

커다란 눈이 호선을 그리며,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유현은 어정쩡한 자세로 고개를 갸웃했다.

“화난 거 아냐?”

“화날 뻔했어.”

남에게 들었다면 분명 분개했을 법한 이야기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그랬다.

하지만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현명한, 또는 꼰대 같은 연륜이 느껴지는 유현의 말들에서 서혜빈은 그리움을 잔뜩 느꼈다.

“넌 꼭 돌아가신 할아버지처럼 말해.”

“할아버지?”

“나한테 도움 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해주셨거든. 너처럼 말이야. 예민한 이야기들이지만, 생각해보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어.”

서혜빈의 눈빛은 아까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 할아버지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유현은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다행이네.”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는 유현.

서혜빈이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할아버지도 너랑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어. 둘이 친하게 지내라고.

사이가 나쁜 건 다 어른들이 못 챙겨서 그런 거라고. 솔직히 그때는 자기 좋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한 귀로 흘렸지.”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게 되니 또 느낌이 달랐다.

게다가 유현의 이야기는 다른 근거들이 뒷받침되어 더 통찰력 있고, 깊이 있었다.

“네 말이 맞아. 어린 애가 이유도 없이 하루아침에 손 뒤집듯 바뀌지는 않으니까.”

“오…. 맞아, 맞아.”

예상과 다른 서혜빈의 반응에 당황하기도 잠시. 유현은 그녀의 말에 맞장구쳤다.

“고마워.”

서혜빈이 유현을 향해 미소지었다. 약간의 슬픔이 담겨 있는 미소였다.

유현 역시 진심으로 안도하며 웃었다.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네.”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꾸밈없는 웃음.

순간 서혜빈의 심장이 쿵 하고 울린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나 가도 되지 그럼?”

“......어, 그, 그래.”

“또 화난 건 아니지...?”

서혜빈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유현이 조심스레 물었다.

서혜빈이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내리깔았다.

“화, 화 안 났어.”

“그럼 다행이고. 내일 또 봐.”

유현이 잰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서혜빈은 그 자리에 선 채 유현이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간 그에게서 느꼈던 묘한 감정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겨울철 온기처럼 깊게 남은 여운. 여전히 뜨거운 두 볼은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아….”

서혜빈이 옅게 탄식했다.

거칠게 뛰는 가슴.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지만, 그게 어떤 감정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미치겠다….”

그리고 그 감정이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까지 숱하게 읽어왔고, 봐온 이야기들은 모두 그 감정에 관한 이야기였으니까.

아무래도 이제는 그리움 대신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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