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헌터가 하고 싶다-114화 (114/219)

114

화마(火魔).

악마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다.

박진주의 정신은 순식간에 아득해졌다.

“대, 대체 무슨!”

“소화기! 소화기를 가져오게!”

간부들이 불꽃에 당황한 와중, 신가온은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분명히 봤다.

유현의 손에서 치솟은 불길이 박진주를 집어삼킨 광경을.

“가온! 뭐하나! 빨리 119를 불러!”

간부의 외침에도 신가온은 멍하니 대련장을 응시했다.

연기로 자욱하여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내부.

연기 사이로 언뜻언뜻 솟구치던 불길이 사라졌다.

“부, 불이 꺼졌다!”

누군가 소리쳤다.

간부들의 시선이 동시에 경기장으로 돌아갔다.

“연기! 연기를 치워!”

“방어막을 내려라!”

방어막이 사라지자, 대련장에 갇혀 있던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간부 중 한 사람이 환풍 시스템을 최대로 가동했다.

연기가 환풍기를 통해 빠르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어서 드러난 대련장의 내부.

쓰러진 박진주의 몸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마, 마스터!”

“치료실로 데려가! 어서!”

박진주에게 뛰어가는 간부들.

신가온은 박진주가 아닌 유현에게 다가갔다.

“너, 너 대체...”

“봤냐?”

신가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서 불꽃이….”

“좆됐네.”

***

박진주의 부상은 심각했지만, 생명에 위협이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충격에 기절까지 했는데, 생명에 위협이 없다는 사실에 다들 기적이라고 말했다.

“대체 어디서 불이 난 거야?”

“이상하군, 이상해.”

“누구 본 사람 없나?”

느닷없이 대련장을 메웠던 불꽃.

신가온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불꽃이 유현의 손에서 튀어나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한 손으로 주먹을 휘두르며, 늘어뜨린 반대 손으로 불을 뿜어내 시선을 분산시킨 덕이었다.

“아무도 못 봤는데 넌 그걸 용케도 봤네.”

“움직임이 좀 어색하다고 생각했거든.”

“눈썰미가 너무 좋은 거 아니야?”

간부들이 모여 있는 대련장의 반대편, 훈련장.

박진주가 멀쩡하다는 걸 확인한 두 사람은 간부들을 피해 대화할 자리를 가졌다.

“대체 뭐야 그게? 어떻게 한 거야?”

손에서 뻗어 나오던 불꽃.

그건 마치 한서희가 다루는 특성 같았다.

“네 특성은 소화 가속이잖아.”

“나 이중 특성이야.”

이중특성.

한 사람의 몸에 두 가지 능력이 깃든 현상.

소수지만,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긴 했다.

“거짓말.”

하지만 신가온은 이중 특성과 별개로 유현이 보여준 능력이 특성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특성 외에 선택지는 없는데도, 그런 직감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거짓말 아니야.”

“거짓말 맞잖아.”

“아니라니까?”

신가온이 고개를 저었다.

평소라면 그냥 받아들였겠지만, 그의 강렬한 직감이 몇 번이고 소리쳤다.

“네가 이중 특성이었으면 선생님들이 그걸 몰랐을 리 없어.”

“......”

“사실대로 말 해줘. 그거 대체 뭐야?”

유현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다른 핑계를 대려면 댈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밝혀질 가능성이 크다. 굳이 감추고 있다가 신뢰를 깰 필요가 있을까.

“......흐음.”

깊이 침음하며 고민하던 유현은 곧 결단을 내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다 믿어야 해.”

“......알겠어.”

진지한 유현의 말투에 신가온 역시 덩달아 비장해졌다.

“누구한테 말하지도 말고.”

“그럴게.”

신가온의 확답을 들은 유현은 곧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너 만약에 세상에 마법사가 있다고 하면 믿을 거야?”

신가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뜬금없이 마법사라니.

“영화나 만화 속에 등장하는 그런 사람들 말이야?”

“그래.”

순간 신가온은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하는 거냐고, 유현에게 화를 내려 했다. 그러나 그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 멈칫했다.

“진심이야?”

“그래. 아까 그건 마법이야.”

“......머리가 다친 건 아니지?”

“네가 말했잖아. 내가 하는 말 다 믿겠다고. 근데 바로 의심해?”

“아니, 아무리 그래도….”

분명 마법 같은 일이 일어나는 세상이긴 하지만, 그런 세상에서도 마법사는 판타지로 존재했다.

혼자 두 가지 능력만 쓰더라도 대단하다고 추앙받는 세상.

그런 능력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법사는 현실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존재였다.

“못 믿겠어?”

“...응.”

“그래. 그게 정상이지.”

유현 역시 말로만 설득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기다려봐.”

고개를 돌려 주변에 CCTV가 있는지 확인하는 유현. 대련장과 마찬가지로 이곳에도 카메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딱!

유현이 손가락을 튕겼다.

마주 본 두 사람의 사이에 갑자기 빛무리가 나타났다.

“......어, 어?”

“아까도 봤지?”

“이, 이게 뭐야?”

“라이트 마법. 아까 창고에서 봤잖아.”

기억을 더듬던 신가온이 이내 생각났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그 불빛!”

“그것도 마법으로 만든 거야.”

“아! 어쩐지 이상하더라!”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확인할 생각도 못 했었다.

손전등도 아니고, 등불도 아닌데 허공에 떠 있던 불빛.

그게 마법이었구나.

신가온은 신기한 눈으로 빛을 어루만졌다.

“와….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손 줘봐.”

신가온이 유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현은 그 위에 자신의 주먹을 올렸다.

[아이스]

그가 주먹을 펴자 그 안에서 생성된 얼음이 신가온의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우악!”

소스라치는 냉기에 화들짝 놀라는 신가온. 바닥에 떨어진 얼음이 산산 조각났다.

“뭐, 뭐야? 얼음?”

“이 정도면 믿겠어?”

“허….”

신가온이 옅게 탄식했다.

2연타로 마법을 목격하니, 강하게 얻어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한두 대가 아니라 몇십 대는 맞은 기분이었다.

“이게, 이게 말이 돼? 이게 어떻게 가능해? 넌 어떻게 할 수 있는 거야?”

“그것까진 말 못 해줘.”

가능하면 판대륙에 대한 이야기는 가족만의 비밀로 남겨두고 싶었다. 말하기 귀찮기도 하고.

“...알겠어. 너도 네 사정이 있겠지.”

신가온은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여기까지 말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차라리 끝까지 거짓말했다면, 의심은 했어도 추궁은 못 하고 넘어갔을 텐데.

“혹시 다른 건 없어? 아까처럼 불꽃을 만든다든가.”

충격에 멍해졌던 신가온의 눈동자에 다시 초점이 돌아왔다.

왜인지 기대에 찬 말투. 눈빛 역시 기대감에 반짝였다.

그의 반응에 유현이 오히려 반문했다.

“뭐야. 더 할 말 없어?”

“응? 무슨 말?”

“좀 더 의심할 줄 알았는데.”

“에이. 이렇게까지 보여줬는데 뭘 더 의심해. 안 믿는 사람이 이상한 거지.”

만약 다른 마법의 실체가 없었다면, 자신 역시 믿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한테 알려준 이유가 뭐야? 내가 물어봐서?”

“그것도 있고.”

“끝까지 거짓말하고 넘어가도 됐잖아. 이거 세상에 드러나면 안 될 비밀 같은 일이잖아.”

“내가 그랬으면 넌 그걸 믿었을까?”

신가온은 고개를 저었다.

“당장은 그냥 넘어가도 내가 본 게 있으니까 끝까지 의심했겠지.”

“그래. 그리고 한 번 깨진 신뢰는 돌이킬 수 없어.”

“......맞아. 네가 뭘 감추고 있는지 아마 계속 파고들었을 거야. 진주 아저씨가 다치기도 했으니까.”

신가온이 적까지는 아니지만, 괜한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유현 역시 그 점을 우려했기에 진실을 밝히자는 결단을 내렸다.

반응을 보니, 결국 옳은 판단이었다.

“한 번 더 말하는데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 된다?”

“걱정하지마. 내가 입 하나는 무겁거든.”

유현이 싱긋 웃으며 마법 한 가지를 더 사용했다.

손바닥 위로 나타난 작은 불꽃.

신가온의 눈과 콧구멍이 커졌다.

“와!”

몹시 흥분한 모습.

어찌나 신기해하는지 불꽃에 손을 가까이 댔다가 화상을 입을 뻔했다.

“진짜 뜨거워!”

그 상태로 한동안 불꽃을 살피던 신가온. 유현은 곧 불을 꺼뜨렸다.

신가온은 여전히 흥분이 가시지 않는 얼굴이었다.

“근데 진짜 신기하다. 이것도 막 무슨 법칙 같은 게 있고 그런 건가?”

“깊이 들어가면 꽤 복잡하지. 술식의 코어는 어떤 수식으로 연결하고, 술식의 테두리도 코어와 수식으로써 이어져야 하거든. 그 식에 마나를 대입하면….”

“아, 아니. 설명은 됐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그것보다 말이야….”

신가온은 상세한 내용이 아닌 넓은 범위의 마법에 관해 물었다.

종류는 뭐가 있는지, 가장 강한 마법은 무엇인지 등.

그렇게 마법과 관련된 질문을 던지던 그는 문득 아까 전 유현이 챙겼던 책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진주 아저씨한테 보여줬던 책 말이야. 그것도 마법이랑 관련된 거야?”

“...아주 관련이 없지는 않아.”

책은 간부들이 챙겨갔다.

좀 더 유심히 살펴보고 싶었지만, 싸움의 원인이다 보니 그대로 빼앗겼다.

“아까는 그냥 요리책이라며.”

“아, 요리책은 맞는데, 아직 자세한 건 몰라.”

제목이나 내용은 평범한 요리책이다. 하지만 단순한 요리책이 마나에 반응할 이유가 없었다.

판대륙에서 만들어진 책이라고 해도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게 아니라면 그냥 책과 다를 게 없으니까.

‘좀 더 살펴보고 싶은데.’

지금 상황으로써는 책을 되찾아 오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문제가 문제다 보니 깽판을 놓아서라도 뺏어오고 싶었지만, 이곳이 판대륙이 아닌 이상 그런 방법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아무튼, 그게 너한테 필요한 거지?”

“꼭 있어야 해.”

“그럼 내가 가서….”

“그럴 필요 없다.”

신가온이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

훈련장으로 김택진과 박진주가 들어왔다.

“아저씨!”

아까 전만 해도 침상에 누워 있던 박진주는 몸이 회복됐는지 멀쩡히 움직였다. 남아있던 그을림도 완전히 회복되어 사라졌다.

“아까는 미안하게 됐습니다.”

유현이 신가온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만 침착했다면 그렇게 흥분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 책을 당장 손에 넣지 못한다고 해서 세상이 멸망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냥 그 책을 대가로 걸고 내기를 했으면 됐을 일인데.

“아니. 내가 미안하다. 가온이 말대로 자네가 뭘 훔칠 것도 아닌데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어.”

박진주는 유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까 이 책을 어디서 구했는지 물었지?”

박진주가 책을 꺼내 유현에게 내밀었다.

“네. 그렇습니다.”

“구매한 건 꽤 오래전이다. 십 년도 더 된 일이고. 아마 베네치아에 있던 골동품 가게일 텐데,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군.”

“다른 책은 또 없습니까?”

“없어. 애초에 그 책도 떨이로 팔던 골동품을 모아놓은 보따리에서 나온 물건이다.”

“그럼 처음부터 알고 산 물건은 아니라는 거군요.”

박진주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구태여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기에 수긍했다.

‘그럼 이 사람은 일단 판대륙과 관련은 없겠군.’

판단을 내린 유현이 경계심을 풀었다.

“혹시 제가 이 책을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주려고 했다. 그 책이 자네의 말처럼 요리책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와의 싸움을 불사할 정도로 필요하다면 줘야지.”

“감사합니다.”

유현은 책을 받아 들었다.

책이 가까워지자 곧장 체내의 마나가 반응했다.

유현은 손으로 마나를 흩뿌려 책에 무언가 숨겨져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 겉핥기식으로는 찾을 수 없는 건가.’

더 상세하게 찾아보려면 마법을 사용해야 하니,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었다.

꼬르륵.

유현이 내심 아쉬움을 느끼던 그때. 그의 뱃속에서 굶주림의 소리가 울렸다.

박진주가 피식 웃으며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니 가서 식사들 해.”

“...!”

유현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저도 들어가도 됩니까?”

“자네는 날 이겼다. 전사의 성지로 떠나기에는 충분한 자격이 있어.”

“20분밖에 남지 않았으니 빨리 가는 게 좋을 것 같소.”

유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훈련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혀, 현아! 같이 가!”

그 민첩한 움직임에 신가온이 당황하며 뒤따랐다.

두 사람이 떠난 훈련장.

박진주와 김택진은 출입구를 돌아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밥 이야기가 나오니 평소에 보던 그 모습이 나오는군.”

“아까는 정말 다른 사람인 줄 알았소.”

박진주는 대련장에서 마주했던 유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직도 그 이질적인 공포감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살면서 처음 느껴본 괴이한 감각. 몬스터를 앞에 두고도 겁 먹어 본 적이 없었는데...

대체 저 아이가 가진 힘의 끝은 어디일까.

궁금했지만, 차마 파고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특히 그 불꽃.’

자신을 집어삼켰던, 지옥의 화마.

그 근원을 인지하기도 전에 시야가 붉게 물들었고, 암흑이 찾아왔다.

‘그것도 저 아이의 힘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

누구도 그걸 목격하지 못했지만, 박진주는 확신이 들었다.

‘......적이 되지만 않았으면 좋겠군.’

끝을 알 수 없는 강대한 힘 앞에서 박진주는 의문을 품기보다는 수긍하는 선택을 했다.

그건 상대적 약자가 선택한 생존의 방식이었으며, 깊은 심연이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게 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자네 왜 떨고 있소?”

“......잠깐 추워서 그래. 우리도 슬슬 올라가자고.”

박진주가 굳은 몸을 억지로 움직여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