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헌터가 하고 싶다-113화 (113/219)

113

“이게 왜 여기에......”

천 년을 읽고 듣고 소통했던 언어. 동시에 지구에선 절대 보이면 안 될 글자.

판대륙의 문자가 책 위에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정확히는 마법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나도 할 수 있다. 드워프 특제 수프 비법서]

제목 자체는 평범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유현은 흔들리는 눈으로 책을 펼쳐 정신없이 훑었다.

드워프가 만드는 스프의 역사, 재료, 제조법, 종류 등.

제목처럼 내용 역시 평범한 요리책이었다.

“현아! 무슨 일이야!”

골동품이 무너지며 생긴 소음에 신가온이 황급히 달려왔다.

그가 처음 본 건 허공에 떠 있는 빛무리였다.

그러나 거기에 의문을 느끼기도 잠시, 유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갔다.

“어디 다쳤어? 괜찮아?”

유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현기증까지 일어 그만 비틀거리고 말았다.

“혀, 현아!”

중심을 잡으려던 유현이 널브러진 골동품을 밟고 미끄러지며 대자로 뻗었다.

뒤통수가 아팠지만, 고통에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왜 이런 책이 지구에 있지?’

판대륙에서 나던 약초를 봤을 때나, 그곳의 종족으로 꾸며진 만화를 봤을 때도 이렇게 충격적이진 않았다.

그거야 그런 것들은 모두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들이었으니까.

실제로 약초들은 자신이 판대륙에 넘어가기 한참 전부터 세상을 떠돌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명백하게 판대륙의 언어로 쓰여져 있으며, 그 내용 역시 판대륙에 맞춰진 내용이었다.

“아, 안 되겠다. 일단 구급차를...”

유현은 휴대폰을 꺼내려던 신가온의 팔을 붙잡았다.

빛 아래로 드러난 유현의 눈빛에 신가온이 움찔 몸을 떨었다.

서늘하고, 싸늘하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마치 끝이 없는 어둠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여기 대체 뭐야?”

“어, 어?”

“이런 물건들이 대체 왜 여기 있냐고.”

그 말에 신가온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을 구르는 수많은 골동품들. 모르는 이가 본다면 쓰레기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진주 아저씨 취미가 골동품 수집이라 여기에 모아뒀어. 방에는 더 둘곳이 없거든.”

“골동품 수집….”

대충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다.

그게 아니면 옛날 물건이 이렇게 많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 책도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온 걸까.

‘하지만 만약 우연이 아니라면?’

그가 판대륙에 관해 알고 있고,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다면?

유현의 머릿속에 마왕이 죽기 전 했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이게 끝이 아닐 거다, 용사.』

자신의 손에 목이 꺾이기 직전 남겼던 그 한 마디.

좆까라는 욕설과 비웃음으로 태연하게 넘겼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불길함이 피어올랐다.

‘설마 박진주가......’

마왕의 부활.

지구의 멸망.

파멸적인 키워드들이 머릿속을 마구 헤집었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집히는 기분. 그간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그간의 기록들이 다시금 살아났다.

무너진 제국. 어딜 가나 들끓던 시체들. 짐승들은 시체를 파먹었고, 인간은 살기 위해 동족 포식을 서슴지 않았다.

희망이 도리어 절망을 낳았던 수백 년의 기록.

전장에는 죽음이 들끓었으며, 고통과 절규가 낭자했다.

숨이 끊어지면서도 토해내던 희망의 노랫말. 최후까지 부르짖던 대륙의 미래.

작은 파문이 동심원을 일으키며 기억들을 끄집어냈다.

유현의 숨이 거칠어졌고, 저도 모르게 살기를 흘렸다.

옆에 있던 신가온은 숨이 턱 막히는 걸 느꼈다.

“혀, 현아. 일단 진정해.”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에 유현이 흠칫했다.

신가온의 호흡이 거칠어진 걸 확인한 유현은 밖으로 새어나가던 살기를 갈무리했다.

“미안하다.”

“후우.”

신가온은 규칙적인 호흡을 되찾고 나서야 입술을 뗐다.

“왜 그래?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냥 좀 놀라서 그래.”

“몸은 괜찮지?”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가온은 바닥에 널브러진 골동품들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막 쌓아두지 말고 정리 좀 해두라고 했는데….”

“내가 이걸 빼서 무너졌어.”

“웬 책? 그런 것도 있었어?”

신가온은 유현이 건넨 책을 읽어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어느 나라 말이지? 아랍어는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났는지 알아?”

신가온이 고개를 저었다.

“진주 아저씨밖에 모를걸?”

“그럼 지금 좀 만나야겠는데.”

“진주 아저씨를? 아, 어차피 대련 시간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슬슬 가야겠다.”

본인에게 직접 물어본다면 왜 이런 책이 여기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을 터.

만약 이 책이 이곳에 있는 게 우연이 아니라면, 가설은 자연스레 한 가지로 좁혀진다.

‘박진주가 판대륙에서 온 사람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예상일뿐, 아직은 우연일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아주 허황된 가설도 아니었다.

‘그 당시 제국에서는 내가 일곱 번째 용사라고 했어.’

전대 용사들도 있다는 뜻.

지금까지는 단순히 제국에서 뽑은 용사라고 생각해왔는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판대륙 출신이 아니라, 나와 같은 지구 출신의 용사였다면?

‘용사가 아닐지도 몰라.’

자신 이외에 다른 이도 판대륙에 소환됐다는 가정 하에 생각해보자.

모든 사람이 판대륙에 용사로 소환되는가?

마찬가지로 아직은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판대륙에서 지구로 돌아오는 조건이 [구원] 하나만 있는 게 아닐 수도 있어.’

곰곰이 생각하던 유현은 한숨을 쉬었다. 지금으로써는 이런 예상을 하는 것조차 무의미했다.

일단 박진주에게 정보를 파악하는 수밖에.

‘만약 박진주가 판대륙에서 온 게 아니면, 책의 출처를 찾아야지.’

책이 어디서 흘러들어왔고, 어디서 구했는지. 그곳이 지구 어디든 끝까지 쫓을 것이다.

***

두 사람은 창고를 떠나 곧장 지하로 향했다. 지하에는 대련장과 훈련장이 있었다.

두 사람이 대련장에 들어서니 막 사다리 타기로 순서를 정한 간부들이 반겨주었다.

“딱 맞춰 내려왔군!”

“어서 싸우고 점심 먹으러 가자고!”

하지만 곧 그들도 유현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챘다.

박진주는 곧장 자신에게 다가오는 유현에게 의문의 눈빛을 보냈다.

“무슨 일인가?”

유현은 대답 대신 책을 내밀었다.

“이 책. 어디서 났습니까?”

몸을 기울여 유심히 책을 살피는 박진주.

그의 눈썹이 구부러졌다.

“창고를 들어갔군?”

“예.”

“제아무리 손님이라 해도 남의 집에 그렇게 드나드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는데.”

“아저씨, 그건 제가….”

“넌 가만히 있어라.”

그 말에도 신가온은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었다.

“제가 구경시켜준다고 데려갔어요.”

“가만히 있으라고 했을 텐데.”

“제가 데려갔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요? 식당은 몰라도 창고는 괜찮잖아요. 얘가 물건 훔쳐 간 것도 아니고, 제가 계속 붙어 있었는데 그렇게 화낼 일이에요?”

박진주의 두 눈에 힘이 실렸다.

신가온은 침을 꿀꺽이며 지지 않겠다는 듯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하아.”

유현이 한숨을 쉬며 신가온의 어깨를 당겼다.

“비켜. 방해하지 말고.”

당황하며 물러나는 신가온.

박진주의 기세가 한층 더 짙어졌다. 다른 간부들도 긴장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질문에만 대답해요. 이거 어디서 났냐고.”

“허허. 이제 막 나가자는 건가.”

“빨리 말해요.”

평소라면 몰라도 지금 유현에게 예의 따위를 차릴 여유는 없었다.

어쩌면 이 책이 거대한 재앙을 향한 작은 징조일지도 모른다.

오랜 전쟁을 피부로 느꼈던 유현인 만큼, 이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

숨소리마저 잦아드는 압박감 속에서도 유현만은 태연했다.

그런 그를 보며 박진주는 당황스러웠다.

‘이상하군.’

마나로 주변의 기세를 짓눌렀다.

상대가 누구든 움찔할 수밖에 없는 압도적인 힘의 마나 프레싱.

설령 S등급 헌터더라도 눈앞의 청년처럼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한결같은 무표정.

가라앉은 두 눈빛에는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왜 궁금하지?”

긴 침묵 끝에, 박진주가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유현은 당장 멱살을 흔들며 빨리 말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마지막으로 인내심을 발휘했다.

“제가 아는 물건이라 그래요.”

“그걸 안다고?”

“예. 이건 요리책입니다.”

그 말에 박진주가 피식 웃었다.

“내 그 책을 구하고 학자란 학자는 다 찾아다녔어. 고고학자, 언어학자, 역사학자, 암호학자까지. 그런데 누구도 그 책의 언어를 해석하지 못했다.”

박진주의 눈빛이 서늘하게 번뜩였다.

“그런데 그걸 자네가 읽었다고? 내가 그걸 믿어야 하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닌데.”

“나한테는 중요하다.”

유현이 깊이 심호흡했다.

직후, 어깨 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푸른 빛 마나.

한순간 사방으로 퍼진 엄청난 기백에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지금 나랑 싸우자는 건가?”

박진주 역시 똑같이 마나를 발산했다.

뒤엉키는 두 사람의 기운.

본능적인 위험을 느낀 간부들이 급히 근처를 벗어났다.

“허허.”

부마스터 김택진만이 그 옆에 남아 두 사람의 기세를 견뎌냈다.

일촉즉발(一觸卽發).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 같은 상황.

차라리 싸움으로 결판을 내는 게 모두에게 이로울 것 같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대련장으로 올라가는 건 어떻소?”

그 제안에 박진주가 먼저 몸을 돌려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유현은 주먹을 꽉 쥔 채 그를 노려보았다.

“이렇게까지 끌고 갈 일이 아닌데도 끝까지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가라앉은 음색에는 여러 감정이 농축되어 있었다. 분노, 살기 등.

그 목소리에 박진주의 걸음이 살짝 흔들렸다.

‘......내가 겁먹은 건가.’

그가 대련장에 들어서고, 곧 유현도 대련장으로 올라왔다.

밖에서 문이 닫히자 대련장의 방어막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

박진주는 유현과 마주한 순간 몸이 굳었다.

한 순간에 뒤바뀐 공기.

조금 전 대련장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꿀꺽.

미지의 존재를 눈앞에 둔 것 같은 이질적인 공포감.

일전에 불타올랐던 호승심이 천천히 사그라졌다.

같은 사람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분위기의 변화.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너는 대체….”

“시작하지.”

그 말과 함께 유현의 모습이 사라졌다.

직후, 박진주의 얼굴에 주먹이 꽂혔다.

쾅!

“수, 순간이동?”

“잔상도 안 보였네!”

고요한 대련장.

벽에 처박힌 박진주가 팔을 든 채 주변을 경계했다.

박진주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반응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였다.

“막을 줄이야.”

유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박진주는 여전히 팔을 들어 가드하며 전신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부러지는 줄 알았군.’

박진주가 가드를 살짝 벌려 전방의 시야를 확인했다.

무기질적인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는 유현.

마나로 전신의 근육을 팽창시킨 박진주가 특성을 사용했다.

안 그래도 큰 몸뚱이가 더욱 더 부풀어 올랐다.

몇 배는 커진 전신의 근육. 입고 있던 바지가 찢어지고, 몸 전체에 검은색 털이 돋아났다.

얼굴 역시 무언가 뒤섞인 듯 바뀌었다.

완전한 짐승의 모습. 그건 마치….

“곰이로군.”

박진주의 특성 – 야성화(곰).

그는 자신의 몸을 곰처럼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 힘은 인간을 초월함은 물론, 마나의 힘이 결합되어 곰의 힘과 속도마저 초월했다.

그야말로 근접 전에 특화된 능력. 하지만 유현은 개의치 않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을 것 같나?”

더욱 굵어진 목소리가 유현을 쏘아붙였다.

유현은 작게 코웃음 쳤다.

그 도발적인 조소에 박진주가 흉성을 내질렀다.

“이노옴ㅡ!”

다시금 유현을 향해 달려드는 박진주. 그 속도는 조금 전 유현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가 뻗는 주먹에 담긴 힘은 더 강했다.

“마, 맞는다!”

제 자리에 선 채 꼼짝않는 유현.

박진주가 유현을 향해 커다란 손을 휘둘렀다.

‘피하지 않다니.’

너의 오만이 불러온 패배다.

박진주가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 그 순간.

화아아아악ㅡ!

맹렬한 불꽃이 그의 시야를 뒤덮었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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