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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는 헌터가 하고 싶다-106화 (106/219)

106

상대가 길드 가입을 거절하면, 깔끔하게 포기한다.

이른바 ‘싫으면 마는 거지.’

그런 신념으로 줄곧 살아오던 한상용은 처음으로 자신의 신념에 대한 반발심이 생겼다.

“씨바….”

싫으면 마는거지.

근데 그것도 상대가 기본적인 예의를 갖췄을 때야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왜 이걸 이제야 깨달았을까.

그야 그동안 소나무라는 길드의 수장에게 저런 태도를 보였던 사람이 없었으니까.

“야! 유현! 어디가!”

서동철이 유현을 뒤쫓아가려던 한상용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패악질 부리지 마라.”

“놔바! 저 새끼 왜 저리 버르장머리가 없어!”

“아저씨보다야 낫잖나.”

“......”

갑자기 숙연해진 분위기.

불에 물을 끼얹듯 한상용의 화가 가라앉았다.

“그것보다는 낫네.”

“내가 왜 너 때문에 아저씨 소리까지 들어야 하지?”

“그게 왜 내 탓이냐?”

“우린 원만하게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거기에 아저씨라는 단어는 없었고.”

그러니 뒤늦게 끼어들어 기어이 그 단어를 입밖으로 꺼내게 만든 네 잘못이다. 라는 게 서동철의 요지였다.

“야 너 같으면 화도 안 나? 이야기도 안 해보고 그냥 휑하니 가버리는데?”

“말했다시피, 난 저 친구와 정상적으로 대화했다. 문제는 네게 있겠지.”

한상용이 인상을 썼다.

유현이 난데없이 저러지는 않을 터.

가까운 곳에 범인이 있었다.

“너 대체 쟤한테 무슨 소릴 한 거야?”

“길드에 오라고 했고, 그게 다다. 처음에는 괜찮게 대화했는데, 길드 이야기를 꺼내니 태도가 바뀌더군.”

“아, 맞다.”

한상용은 유현의 정보를 상기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는 지금껏 들어온 길드 계약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중소형 길드의 제안은 물론 생화나 소나무 같은 대형 길드의 제안들까지.

그나마 계약 비슷한 걸 맺은 곳은 소나무뿐이었다.

“눈이 뒤집혀서는 그걸 까먹었었네. 싫다고 말했는데 자꾸 들러붙으면 귀찮을 만도 해.”

“그러니 너도 포기해라.”

“쩝, 어쩔 수 없지.”

한상용은 다시 자신의 신념으로 돌아왔다. 태도를 떠나서 상대가 거부한 영입을 이어갈 생각은 없었다.

“혹시 말하는데, 너 뒤에서 헛짓하다 걸리면 가만히 안 둔다.”

“그건 이쪽에서 할 말이다.”

두 사람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경기장에 올라가는 대신 복도로 흩어졌다.

한상용이 멈춘 곳은 피로 회복실 앞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희.”

혼자 누워있던 한서희가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

“진짜 오셨네요?”

“구경도 하고 겸사겸사 유현에 대해서 알아볼 겸 왔어.”

한상용이 의자를 끌고 와 침대 옆에 앉았다.

“몸은 좀 괜찮냐?”

“다친 것도 아닌데요. 저보다는 그 사람이 걱정이지.”

“유현 말이지. 괜찮아 보이더구나.”

“만나셨어요?”

한상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 계약 제의도 하고 왔다.”

“......결과는요?”

“들어보지도 않고 거절하더라.”

“......그건 좀 의외네요. 길드 마스터가 가면 이야기 정도는 들어볼 줄 알았는데.”

역시 유현에게 상대의 직위나 등급 같은 명예는 하등 쓸모가 없는 걸까.

“서동철이 선수를 쳤어.”

“...네? 그분도 오셨어요?”

“어허. 그분이라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럼 유현이 생화로 간다는 말이에요?”

한상용은 자신의 말에 어폐가 있다는 걸 깨닫고 곧장 해명했다.

“아니, 그건 아니고. 그놈이 먼저 길드 이야기를 해서 유현이 내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았다는 말이야.”

“...깜짝 놀랐잖아요.”

한서희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켰다.

만약 유현이 생화로 갔다면….

왜인지 그런 상상을 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괜찮냐? 표정이 안 좋은데.”

“네?”

“탈락했다고 너무 상심하지 마. 너도 잘 싸웠으니까.”

조금 분하긴 하지만, 크게 상심하진 않았다. 자신의 부족함이 원인이었으니까.

“괜찮아요. 그냥 갑자기 가슴이 아파서요.”

“뭐? 아파?! 병원 갈까? 아니, 불러올까?”

호들갑을 떠는 한상용을 보며 한서희가 피식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뭐 검사라도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

“정말 괜찮아요. 그것보다 제 직감이 맞았죠?”

한서희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한상용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음에 답했다.

“그래, 정말 대단한 친구더구나.”

TV로 봤었던 팀전.

화면으로만 봐서는 긴가민가했다.

누군가에게는 그조차도 경악할 모습이었지만, 적어도 한상용에게는 높은 수준으로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직접 와서 눈에 담으니, 유현이 얼마나 다채롭고 현란하게 움직이는지 알 수 있었다.

“당장 현역으로 뛰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야.”

“그렇죠? 제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요.”

“말 나온 김에 한 번 물어보자. 대체 그 친구랑은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원래는 F등급이었더만.”

“이야기하면 긴데 삼촌 다시 올라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위에 사람 있어서 괜찮아.”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한참을 떠들었다.

한상용은 그토록 신나게 떠드는 조카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조차 가물가물했다.

한편, 서혜빈의 대기실.

갑자기 찾아온 아버지를 보며 서혜빈은 안절부절못했다.

“차, 차라도 드릴까요?”

“괜찮다.”

“그럼 다과라도….”

“필요 없다.”

서동철은 대기실을 한 번 둘러보았다. 작디작은 대기실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쉬는 게 편한가?”

그 말에 서혜빈이 움찔했다.

“아, 아뇨! 나가서 훈련하려고 했어요!”

서동철의 말을 서혜빈은 왜 여기서 농땡이 피우고 있냐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

“그, 그럼 갔다오겠….”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정말 편하냐고 물어본 거다.”

“아…. 편해요. 아늑하고 좋아요.”

“그렇군.”

짧게 답한 서동철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기가 끝나면 시간이 없을 것 같아 잠깐 얼굴이나 보러 왔다.”

“감사합니다...”

“학교생활은 만족스럽나?”

서혜빈은 기다란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답했다.

“...괜찮은 것 같아요.”

“다행이군.”

“아버지는 별일 없으시죠?”

“없다.”

짧았지만, 서혜빈에게는 만족스러운 답이었다. 긴장이 풀렸는지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받아라.”

그런 서혜빈에게 서동철이 무언가를 건넸다. 꽃잎이 장식된 팔찌였다.

“어머니의 선물이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등장에 서혜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머니께서요?”

“승리의 맹세라는 꽃말을 가졌다고 하더군.”

그때, 방송이 나왔다.

다음 경기를 치르는 사람들은 경기장으로 올라오라는 내용이었다.

방송을 듣고 밖으로 나가려던 서동철이 문앞에서 멈췄다.

“너무 긴장하지 마라. 내일도 보러 오마.”

생각지도 못한 아버지의 말에 서혜빈은 문이 닫히고 나서야 뒤늦게 반응했다.

“자, 잘할게요!”

***

총 12경기로 이루어진 1라운드.

4경기와 5경기가 끝나고 6경기가 시작되었다.

서혜빈과 A등급의 대결.

그녀는 소환한 무기들로 상대를 순식간에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이어진 1라운드는 점심이 되기 전에 마무리되었다.

-다들 점심은 든든하게 드셨나요? 곧 2라운드가 시작됩니다!

2라운드는 잠깐의 휴식을 거친 뒤 바로 시작되었다.

회복 능력자들의 도움으로 참가자들은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24명의 참가자 중 2라운드에 출전하는 사람은 8명.

개막전의 승자였던 이케가미와 S등급 김풀잎, 그리고 나머지 A등급 둘은 부상이 회복되지 않아 최강자전을 포기했다.

-네 명의 선수가 모종의 사유로 포기하여 현재 2라운드에 진출한 선수는 총 8명! 이들 중 네 명 만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할 수 있습니다!

1라운드로 후끈 달아오른 경기장의 열기는 2라운드에 들어 더 뜨거워졌다.

A등급은 모두 탈락하고, S등급만 남은 대전. 남은 매치업은 모두 스페셜 매치였다.

-그 첫 번째 매치는 바로바로!

두 선수가 경기장에 들어왔다.

신가온과 유현이었다.

-유현 선수. 두 번 연속으로 우승 후보를 만나네요! 이거 대진운이 너무 안 좋은데요?

하나하나 우승 후보라고 평가받는 S등급이지만, 그중에서도 특출난 이들이 있다. 한서희와 신가온 역시 거기에 속했다.

“신가온! 이겨라아아아아!”

스파르타 길드 간부들의 우렁찬 함성이 다른 관객들의 소리를 압도했다.

-이야! 엄청난 원군이네요! 역시 스파르타 길드입니다!

단순히 육체적인 강함을 추구하는 이들이 모인 게 아닌 서로를 향한 의리로 똘똘 뭉친 길드, 스파르타.

업계에서는 의리의 대명사로 통하는 곳이었다.

사소한 다툼보다는 과격한 주먹다짐으로 문제를 풀었고, 어제 싸웠다가도 당장 도움이 필요하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는 그런 길드였다.

그래서 유독 보증을 섰다가 빚쟁이가 된 이들이 많았다.

“유현 파이팅!”

유희연도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유현을 응원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관중석을 채 벗어나지 못했다.

-그냥 시작하면 재미없죠? 유현을 응원하는 여러분! 소리 한 번 질러주세요~!

“와아아아아아아아아!”

잠깐 주춤했던 함성이 한순간에 커졌다. 한서희를 꺾은 이후, 그를 응원하는 사람이 증가한 덕이었다.

-자! 그러면 다음은 신가온!

“우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스파르타 길드가 작정하고 지른 고성에 일반 응원단의 함성이 더해지자 마치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경기장 전체가 뒤흔들렸다.

-와, 와! 정말 대단하네요! 세상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더 큰 성원에 사회자가 말을 더듬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응원의 차이.

사기에도 영향을 끼칠 법한 차이였다.

“와, 장난 없네.”

유현은 신가온을 응원하는 목소리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지구에서 인간의 목소리로 지축을 뒤흔드는 경험을 할 줄이야.

“무슨 전쟁터도 아니고.”

판대륙에서는 몇 번 있던 일이었다.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는 병사들의 군가라든가, 적을 향해 돌격하는 이들의 함성이라든가.

-자! 이제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목소리와 함께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다.

멀찍이서 목검을 내려놓은 채 정좌를 틀고 있던 신가온이 두 눈을 떴다.

고요한 호수처럼 한없이 정적인 눈빛. 그 눈동자에 일순간 빛이 어렸다.

“쾌도로군.”

스파르타 길드의 마스터 박진주가 팔짱을 낀채 중얼거렸다.

“쾌도라면, 속검과 강검이 결합이군요.”

쾌도(快刀).

엄청난 속도로 상대를 공격하는 속검과, 엄청난 힘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강검이 합쳐진 검술.

신가온이 가진 비기 중 하나였다.

“작정했군.”

“상대가 상대니까.”

한 차례 한서희의 선례를 본 상황.

누구도 신가온이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온이가 쉽게 이겼으면 좋겠소.”

“검을 들었으니 이기겠지.”

신가온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유현은 바지 속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사람들의 눈에 물음표가 맺혔다.

-아, 저게 뭐죠? 유현 선수가 이상한 무기를 꺼냈습니다.

눈가를 좁힌 채 집중하던 박진주는 곧 그게 어떤 무기인지 깨달았다.

“톤파로군.”

톤파. 일본에서 유래된 타격 무기.

긴 막대에 수직으로 손잡이를 단 형태의 무기였다.

“저런 것도 다룰 줄 안다고?”

“허허. 우리 가온이를 너무 얕보는 거 아닌가.”

스파르타의 길드원들이 조금씩 승리쪽으로 의견을 기울이는 와중, 박진주만이 미간을 찌푸렸다.

‘톤파는 맨손 무술을 잘하면 쉽게 다룰 수 있어.’

유현의 무술 실력은 모르지만, 그 회피 기동 하나만큼은 인정받은 상황.

무술의 기본이 회피인 만큼, 공격이나 방어 쪽에서도 탁월할 수밖에 없다.

박진주의 얼굴에 긴장이 흘렀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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