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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시작되었지만, 누구 하나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멀찍이 거리를 벌린 채 서로의 동태를 살폈다.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게만 하면 돼.’
한서희는 유현을 주시했다.
다가온다면 금방이라도 불꽃을 뿜어낼 수 있도록 마나를 바짝 끌어 올렸다.
“......”
유현 역시 한서희를 경계했다.
예선전에서 몇 번 구경했던 한서희의 전투.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판대륙에 있었다면 최전선에 설 만한 실력이야.’
특성 자체의 강함도 있지만, 능력을 다루는 그녀의 재능도 대단했다.
“뭐하냐!”
“빨리 싸워!”
“시간 끌지 마라!”
지루한 대치가 이어지자 관중들의 함성이 잦아들고 두 사람을 향한 비난이 쏟아졌다.
그런 반응에도 유현과 한서희는 개의치 않았다.
“......먼저 올 생각은 없나 보군.”
예선전에서 한서희의 전투는 대부분 그녀의 선공으로 시작됐다.
엄청난 화력으로 적을 압박하고 눕히는 게 그녀의 승리 공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으니….”
한서희를 공격했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자칫하면 순식간에 화상을 입고 구급 요원에게 실려 가겠지.
그걸 면할 방법은 하나.
전부 피하면 된다.
‘가능해.’
유현은 다른 이들의 예선전을 지켜보며 머릿속으로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만약 자신이 저 경기장 위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어떤 방법이 가장 효과적일까.
한서희 역시 예외는 아니었고, 유현은 상상 속에서 그녀와 싸우며 방법을 체득했다.
“싸우라고!!”
“우우우우우!!”
“뭐하냐! 둘이 연애라도 하냐!”
유현은 관중석을 쓱 둘러보고는 한서희에게 초점을 맞췄다.
그리고 발을 튕겼다.
움찔.
순식간에 사라진 유현의 모습.
한서희가 시선에 마나를 담았다.
쇄도하는 잔상이 두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전방.’
앞으로 손을 뻗고, 마나를 방사한다.
뜨거운 불길이 유현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
유현은 불길 앞에 급히 멈췄다.
화염 방사기처럼 저 멀리서부터 길게 뻗어온 불꽃. 역시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기회다.’
한서희는 유현이 멈춘 순간을 노리고 공격에 들어갔다.
불길에서 뻗어 나온 수십 줄기의 불꽃.
화르륵!
불꽃이 채찍처럼 허공을 휘저으며 유현을 향해 날아들었다.
머리, 팔, 다리 등의 신체 부위를 속박하기 위한 공격.
상대를 붙잡아 둘 수 있다면, 사실상 승리나 다름없었기에 한서희는 직접 공격보다는 붙잡아 두는 걸 우선시했다.
“자, 잡힌다!”
그러나 불길은 허공을 갈랐다.
한서희가 예선에서도 줄곧 보여준 공격 패턴. 유현의 머릿속에는 이미 대응 방식이 설계되어 있었다.
“......대단한 몸놀림인데.”
경기를 지켜보던 한상용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조금 전 공격을 노리고 뛰어든 속도도 그렇고, 지금의 회피도 그렇고.
특성이 아닌 단순한 신체 능력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대체 그 속도로 뛰어오다가 어떻게 멈춘 거지?’
자동차에 제동거리가 있듯, 사람도 비슷하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뛰어오다가, 눈앞에 드리운 불꽃을 보고 바로 멈춰 선 유현.
급정거 옵션이 달린 덤프트럭 수준의 제동이었다.
“이거 이러다 조카가 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군.”
“헛소리하지 마.”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아까처럼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사라졌다. 유현. 역시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래도 무조건 서희가 이길 거야.’
그의 희망찬 예상과 달리, 필드 위에선 여전히 유현의 회피가 이어지고 있었다.
아까보다 더 늘어난 불꽃 채찍의 개수. 한서희는 계속해서 채찍의 숫자를 늘려가며 유현을 공격했다.
‘대체 왜 안 잡히는 거야?’
제아무리 유현이라고 해도 백에 가까운 불줄기를 피하는 건 불가능해야 했다.
그런데 피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와아아!”
“왜 이렇게 잘 피하냐!”
유현의 화려한 회피에 관중들이 감탄했다.
반면, 반복된 회피에 염증을 일으키는 관중도 있었다.
“언제까지 봐줄 거냐!”
“빨리 잡으라고!”
몇 관중의 고성이 한서희의 귓가에 닿았다.
한서희는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닿을 것 같은데,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았다.
지난번 있었던 팀전의 구간 중 하나였던 죽음의 외다리에서 유현이 보여준 모습과 비슷했다.
장애물에 걸릴 듯 말 듯 위태롭게 나아가며 설계자를 열 받게 하던 유현.
한서희는 그때 양동길이 느끼던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놀리는 듯한 태도.
하지만 한서희는 참았다.
인내는 훌륭한 헌터가 되기 위한 덕목이라고….
낼름.
낼름.
한서희는 불줄기를 피하며 장난스러운 얼굴로 메롱을 날려대는 유현을 발견했다.
참아왔던 초조함이 폭발하는 순간이었다.
“왜 안 잡히냐고!”
그 순간 몇 개의 채찍이 서로 뒤엉키며 잠깐의 빈틈이 생겼다.
줄곧 회피에 집중하던 유현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흥분하면 안 되지.”
날아온 불줄기를 피한 유현은 감정의 격화가 만들어 낸 좁디좁은 틈새로 발을 뻗었다.
거미줄처럼 빽빽하던 불줄기 사이에 생긴 단 하나의 경로.
오직 유현 만이 볼 수 있는, 한서희에게로 향하는 단 하나의 길이었다.
‘이런…!’
한서희는 황급히 감정을 다잡았다.
그러나 이미 속도를 올린 유현을 따라잡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늦었어.’
한서희가 황급히 채찍의 주도권을 놓아버리고, 마나를 응집했다.
목전까지 다가온 유현의 손.
손이 그녀의 목을 붙잡기 직전.
한서희가 전방으로 응축된 마나를 터뜨렸다.
화아아악!
유현을 통째로 집어삼키는 황백색 불꽃.
강한 화력의 영향으로 한서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뒤로 나뒹굴었다.
“크윽!”
재빨리 자세를 갖춰 일어난 한서희.
그녀는 자신의 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보며 기함했다.
“어, 어떡해!”
불꽃은 온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황백색이라면, 설령 헌터라고 해도 크게 다칠 온도였다.
한서희는 황급히 불꽃에 깃든 마나를 짓이기려 했으나, 마나의 밀도가 높아 쉽게 불꽃이 꺼지지 않았다.
“뭐야? 왜 저래?”
“불꽃이 너무 뜨거운 거 아냐?”
“헐. 죽는 건가?”
한서희가 당황하는 모습에 관중석도 술렁였다.
시험의 관리원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경기를 중단시켰다.
“......”
한상용은 고개를 숙이고 이마를 짚었다. 나지막한 한숨이 그의 입에서 빠져나왔다.
“언제나 침착하라고 했을 텐데….”
유현의 놀라운 회피력은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 그게 한서희의 감정을 돋궜고, 한서희는 차분함을 잃었다.
‘아냐. 메롱은 못 참지.’
전광판에도 언뜻언뜻 비치던 유현의 날름거림. 명백한 도발이었기에, 따지고 보면 유현은 자기 꾀에 자기가 걸려 넘어진 셈이었다.
“저 정도로 흥분하다니.”
서동철의 말투에는 은근한 조소가 담겨 있었다. 평소라면 한상용도 한 마디 던졌겠지만, 지금은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완벽한 한서희의 실수, 더불어 그녀를 가르쳤던 자신의 실수이기도 했다.
“크게 다쳤겠군.”
“살아있기를 바라야지.”
죽었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한서희에게는 살인자 딱지가 붙을 것이고, 헌터 활동은 물론 기업 활동도 불가능해진다.
제아무리 사고라지만, 결국 그녀의 손으로 일으킨 짓이니 분노의 화살은 모두 그녀에게 향하리라.
“죽으면 여러모로 악재겠군.”
서동철도 한상용과 같은 마음이었다.
아카데미의 사망 사고는 일어나선 안 되는 일.
헌터의 사망 사고는 매일 같이 일어나지만, 아카데미에서 사망 사례가 보고되는 건 세계적으로 숫자가 적다.
만약 유현이 죽는다면,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고 추후 아카데미의 영향력이 얼마나 축소되든 이상하지 않았다.
“응급팀이 들어갑니다.”
스카우터의 말에 한상용이 고개를 들어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회복 특성을 가진 구급 요원들이 급히 필드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관건은 불길을 잡느냐인데.”
구급 요원들의 출동이 빨라도 불꽃이 꺼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당장 급수시설을 가동하기 위해 몇몇 요원이 뛰어갔지만, 언제 가동될지 모른다.
현재로서 불을 끌 방법은 그녀뿐이었다.
‘제발.’
한서희의 눈에 실핏줄이 터졌다.
잔뜩 붉어진 그녀의 흰자.
목에도 핏줄이 마구 돋아났다.
과하게 힘을 쏟아부은 탓이었다.
그래도 그 노력 덕에 불길은 서서히 사그라들고 있었다.
‘제발 무사해야 해.’
한서희는 천천히 불꽃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유현이 무사하기만을 간절하게 바라며 불꽃 너머를 쳐다보려던 그때.
탁.
불길 속에서 뻗어 나온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꺄아악!”
방심하고 있던 한서희가 한 박자 늦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곁에 서 있던 구급대원들도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어우, 씨바. 뜨거워라.”
불길 속에서 유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입고 있던 전투복 일부가 연소 되어 반나체 상태인 걸 제외하면, 별다른 외상은 없었다.
“뭐야?”
유현이 구급대원들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아!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유현 선수가 걸어 나왔습니다!
선수의 안전 확보로 경기가 중단된 상황. 그 선수가 멀쩡히 나타나자 관중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뭐야? 이 사람들 뭔데?”
“......”
한서희는 말없이 유현에게 다가가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그다음에는 몸을 확인했다.
“돌아봐요.”
“아니, 대체 무슨 일….”
“돌아보라고요.”
한서희가 억지로 유현의 몸을 빙글 돌렸다.
뒷모습 역시 멀쩡하다.
그제야 한서희는 안심했다.
어찌나 노심초사했는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자칫하면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갈 뻔한 상황. 만약 그랬다면,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아, 지금 관리 본부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구급대원들은 내려가고 다시 경기를 개시하랍니다.
구급대원?
유현이 황급히 경기장을 떠나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유현.
“확실히 위험하긴 했어.”
주저앉은 한서희가 고개를 들어 유현을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눈동자에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어떻게 멀쩡해요?”
“마법이야.”
“......장난 칠 기분 아니에요.”
유현은 더 말하지 않았다.
진짜 마법인데, 뭐 어떡하라고.
‘하마터면 홀라당 타죽을 뻔했네.’
뜨거운 불꽃이 방화 되기 직전.
유현은 높은 밀도의 마나가 움직이는 걸 느끼고 급히 머릿속에 술식을 그렸다.
중급에 해당하는 5급 마법 슈퍼 배리어. 방어막 덕분에 옷만 조금 타는 데 그쳤다.
“아니, 내 기분이 중요한 게 아니지…. 미안해요.”
한서희는 곧장 자신이 내뱉은 말을 반성하고 유현에게 사과했다.
“뭘 사과를 하고 그래. 힘 조절하면서 싸우면 그게 싸움인가. 훈련이지.”
“그래도 죽으면 안 되잖아요.”
“그건 기본이지. 최선을 다하되 상대를 죽이지 않는 선에서.”
한서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탄성을 뱉었다.
“그게 쉽게 될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아직 네가 갈 길이 멀었다는 거야.”
자존심을 긁는 말에 한서희가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나 걱정했는데, 와중에 저런 소리를 해대다니.
한서희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눈물을 쓱 닦으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친 데는 없죠?”
“멀쩡해.”
“그럼 다시 준비하죠.”
왜 멀쩡한지, 마법 같은 시시껄렁한 말을 들먹이는 걸 보면 말해주지 않을 작정 같았다.
그래서 한서희는 더 캐묻지 않았다.
“뭐하냐! 빨리 해라!”
“언제까지 떠들 건데~!”
선수가 무사하며 재개된 경기.
하지만 두 사람이 계속 떠들기만 하자 관중들이 성화를 부렸다.
“......”
한상용과 서동철은 경기장을 바라보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기이하군.”
기이하다. 정말 그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전투복을 입었다지만…. 아니, 설령 방화복을 입었다고 해도 저렇게 멀쩡할 수는 없는데.”
한상용은 당황스러웠다.
다치지 않은 건 좋은 일이지만, 대체 어떻게?
한서희를 누구보다 오랜 시간 지켜 봐온 만큼 그녀가 가진 힘은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특성은 별 볼 일 없다고 들었는데.”
“이중 특성일 수도 있다.”
“특성 검사 시스템이 빙다리로 보이냐?”
서동철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아니면 뭔지 말해봐라.”
“금강불괴?”
“...한심하군.”
지그시 경기장을 바라보던 서동철.
두 사람은 서로 거리를 벌리고 다시 전투를 재개했다.
“특성이 아니라면, 인간의 몸뚱이가 저런 수준이라는 건데,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말이 안 되지. 하지만 이중 특성은 아니야.”
“혹시 모르지. 없던 특성이 갑자기 생기는 사람이 있을지도.”
오가는 건 근거 없는 추측들뿐. 둘 중 누구도 확실히 말하지 못했다.
강한 힘과 민첩한 속도를 토대로 한 공격력. 거기에 업화를 견뎌내는 방어력까지. 고작 몸뚱이 하나로 웬만한 헌터와 맞먹는다.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인 존재. 말 그대로 괴물 같은 인간이었다.
“어쨌든 승패는 정해졌군.”
한서희의 불꽃을 맨몸으로 버텼다.
최대 화력은 아니었지만, 한서희가 여기서 유현을 죽이진 않을 테니 결과는 뻔했다.
그녀가 승리한다는 예상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불꽃을 상대가 버티지 못한다는 가정하에 있었으니까.
“......젠장.”
한상용은 나지막이 욕설을 뱉으며 고개를 떨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