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대기실. 한서희는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긴장을 풀었다.
-다음 참가자는 경기장으로 이동 바랍니다.
대기실로 방송이 흘러나왔다.
한서희가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검은색 눈동자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가라앉아 있었으나 그녀의 속은 편치 않았다.
“하아.”
최강자전 첫 번째 상대. 유현.
언젠가는 싸워보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여기서는 아니었다.
싱글 엘리미네이션 토너먼트.
한 번 떨어지면 끝나는 싸움.
우승을 목표로 하는 만큼, 강한 상대와의 격돌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그런데 1라운드.”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절묘한 만남이었다.
한서희에게 유현은 쉽게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분명 강한 사람이다.
도서관에서 처음 봤을 때도 상대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노련함을 엿봤고, 게이트에 들어가 사냥하는 모습은 가히 파괴적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마치 한량 같은 그의 태도는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정확한 힘을 모르겠어.’
현재까지 유현이 죽인 몬스터 중 가장 강력한 몬스터는 등급 테스트 A등급 계층에 존재하던 몬스터.
한서희 역시 그곳의 몬스터는 쉽게 죽일 수 있었다.
‘그렇다고 나랑 비슷한 수준인가 하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아리송한 유현의 힘.
직접 붙어보기 전까지는 경기의 승패를 예상할 수 없지만, 막연히 희망적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보통이라면 남은 경기를 위해 힘을 비축해두겠지만, 상대의 전력을 완전히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짓을 하는 건 오만이었다.
특히나 그 상대가 유현이라면 더더욱.
-다음 참가자는 경기장으로 이동 바랍니다.
다시 한번 방송이 나왔다.
한서희는 전투복을 단정하게 정리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
개막전을 시작으로 이어진 두 번째 경기. 오철용과 A등급 학생 간의 싸움이었다.
“철용쨩 파이티이잉~!”
“철용쿤! 응원하고 있다고오!!”
“오철용! 너의 이름을 천하에 알려라!”
코스프레 복장을 한 응원단이 오철용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일반적이지 않은 옷차림이었지만, 한마음 한뜻으로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모인 만큼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은 없었다.
-경기 시작합니다!
2경기는 모두의 예상대로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오철용은 압도적인 파괴력으로 상대를 순식간에 드러눕혔다.
“새겨두어라. 죽음은 언제나 바람과 같다는 것을. 오늘 너의 곁을 스친 건… 미풍이다.”
경기 시작 전, 뚱뚱했던 오철용의 몸뚱이. 크고 작은 폭발을 연속해서 일으키며 통통한 수준까지 살이 빠졌다.
“나, 나왔다! 오철용 미남 모드!”
여전히 살이 붙어 있지만, 이전보다 더 날렵해진 턱선.
지방을 지탱하느라 발달한 근육들 덕에 옷의 맵시도 살아났다. 말 그대로 미남이라는 모습이 어울리는 외형이었다.
“와아아아아!”
“잘 생겼다!!”
승리했을 때보다 더 큰 함성이 울려 퍼졌다. 오철용은 관중들을 쓱 둘러 보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겉모습에 그리도 열광하다니. 우매하군.”
오철용은 사람들의 반응은 깡그리 무시한 채 경기장 아래로 내려갔다.
1라운드가 모두 끝나고 치러질 2라운드. 그때까지 이번에 사용한 지방을 보충해야 했다.
“드디어 3경기야!”
“누가 이길 것 같냐?”
막 경기가 끝났지만, 사람들은 벌써 다음 경기를 이야기했다.
3경기.
유현 vs 한서희.
관중들 사이에서는 어느새 희대의 대진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구관이 명관이지.”
“한서희가 이길 게 뻔해.”
“그래봤자 신체 강화형이잖아? 불꽃에 데이면 꼼짝 못 하지.”
유현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유현은 최근 들어 두각을 나타낸 신예. 등급 테스트에서 모두를 누르고 1등이 되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PVE, 몬스터와의 싸움이었다.
“몬스터랑 사람이랑 싸우는 건 다르니까.”
“아무리 몬스터를 잘 잡아도 한서희를 이기는 건 무리지.”
“경험이 다르잖아, 경험이.”
한서희는 이미 다른 대회에서 몇 번 우승한 경험이 있다.
비록 아카데미 입학 전의 경험이지만, 적어도 능력자와 싸우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 점을 높게 샀다.
“쯔쯧. 하필 1라운드부터 한서희를 만나다니. 운도 없어.”
“유현 싸우는 것도 기대했는데.”
“아까 걔 누구지? 유현은 바위몬이랑 싸우면 진짜 재밌었을 것 같은데.”
경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가 유현의 패배를 예측하며 아쉬워했다.
신체 강화형 헌터가 주는 특유의 터프한 무력.
투기 대회에 열광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전투 방식이었기에, 아쉬움은 더 짙었다.
“흥.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다들 말이 많네.”
관중석의 한 자리를 차지한 유희연.
주변에서 들려오는 오빠의 평가에 그녀의 얼굴은 한껏 뾰로통해졌다.
“하하, 네가 이해해. 현이가 사람들 앞에서 싸우는 건 오늘이 처음이잖아.”
그녀의 좌측에 앉은 주시하가 타이르듯 말했다. 하지만 부풀어 오른 볼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빠는 어때? 누가 이길 것 같아?”
“나? 나는 글쎄… 잘 모르겠다. 그래도 현이 응원할래.”
“이럴 때는 빈말이라도 친구가 이긴다고 해야지~!”
그때.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경기장으로 선수 중 한 명인 한서희가 올라온 것이다.
긴장 따위는 되지 않는지, 전광판에 비친 그녀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와, 서희가 예쁘긴 예쁘다.”
유희연이 전광판에 클로즈업된 한서희를 보며 감탄했다.
전투에 방해되지 않게 위로 틀어 올린 머리. 그 아래로 드러난 목선은 남녀를 불문하고 보는 이의 숨을 압박했다.
그녀를 보며 유희연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분명 익숙한 얼굴인데도 머리 모양을 바꾸니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공통된 인상이 한 가지 있다면, 바로 고급스러움이랄까.
한서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고급지다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신기하다. 저분은 긴장도 안 되나 봐.”
주시하는 진심으로 감탠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긴장한 기색 하나 없다니.
만약 자신이었다면 어땠을까.
주시하는 경기장 위에 자신이 올라간 모습을 상상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맨정신으로는 싸우기는커녕 1분도 제대로 서 있지 못할 것 같았다.
“아직 시작 안 했지?”
유희연의 옆 빈자리로 누군가 앉았다. 포션 업무를 끝마치고 급하게 달려온 강찬성이었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대길이 형님이 남은 건 자기가 한다고 그래서 왔지.”
“......그걸 또 냅다 받아먹었어요?”
“그럼 자기가 한다는데 내가 뭐하러 사양하냐?”
유희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무릇 배려는 한 두 번 거절한 다음에 받아들여야 마땅하거늘.
“아, 안녕하세요!”
주시하가 강찬성에게 고개를 숙였다.
만나는 건 처음이지만 두 사람 다 서로의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오, 네가 시하구나? 반갑다.”
“네! 현이랑 같이 사업하신다고 많이 들었어요!”
“후후, 사실 그게 내 본업은 아닌데 말이야….”
강찬성이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리더니 품속에서 명함을 하나 꺼냈다.
“나도 일단은 길드 마스터야.”
“기, 길드 마스터!”
주시하의 눈이 커졌다.
마치 처음 듣는다는 듯한 반응에 강찬성이 고개를 갸웃했다.
“왜 처음 듣는 것 같냐?”
“...말을 안 해줬었나?”
멍청히 뒤통수를 긁적이는 유희연.
주시하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희연이 애교스럽게 혓바닥을 한 번 내밀고는 헤헤 웃었다.
“실수, 실수.”
“야, 실수할 게 따로 있지….”
“아, 미안해요~”
안 그래도 최근, 강찬성은 자신의 정체성에 의문이 들었다.
왜 길드 마스터인데 나는 몬스터를 잡는 게 아니라 여기서 공장 관리나 하는 걸까.
물론 그런 의문은 통장 잔고를 볼 때마다 사라졌다. 왜냐니, 당연히 혼자서 외롭게 사냥하는 것보다 더 돈이 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정체성을 잊을 생각은 없었다.
“우리가 지금은 포션에만 쏟아붓고 있긴 한데, 이것도 몇 년 뒤면 안정권에 들어갈 거란 말이지?”
강찬성이 주시하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때쯤 되면 길드 자본도 좀 많아지겠고, 규모가 커질 거야.”
“네, 네.”
“계약할래?”
한껏 커졌던 주시하의 눈이 더 휘둥그레졌다.
입술이 꿈틀거렸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명함을 쥔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
“......저기?”
주시하가 침을 한 번 꼴깍였다.
곧 그의 입술을 비집고 말이 튀어나왔다.
“지, 지, 지, 진짜요? 저, 저랑 길드 계약?”
“......미안한데 내 길드가 큰 규모는 아니거든? 지금은 나 혼자야….”
주시하의 반응에 강찬성은 당황했다.
길드 계약은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무척이나 기쁜 일이지만, 이름도 없는 작은 길드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드물었다.
상대가 5대 길드나 중형급 이상 길드라면 모를까.
“하, 할게요! 무조건 할게요!”
주시하가 벌떡 일어나며 강찬성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나 곧장 뒤쪽의 관중이 시야를 가린다면 불만을 토로했다.
“죄, 죄송합니다!”
후다닥 다시 앉은 주시하.
그의 가슴은 어느 때보다도 두근거렸다. 설마 자신에게 길드 계약 제안이 올 줄이야. 옛날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아카데미 등급은 C랬지?”
“네, 네!”
“오케이. 그러면……. 나중에 따로 얘기하자.”
곧장 계약 이야기를 이어가려던 강찬성은 유희연의 싸늘한 눈빛을 눈치채고 황급히 자리에 앉았다.
“눈치는 빨라서 좋네.”
“내가 여자친구한테 눈칫밥 먹고 살거든.”
“자랑이네요~”
한서희에 이어 유현도 경기장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이 그를 향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놈팽이가 모습을 드러냈군.”
서동철은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자신은 이야기하기도 어렵고, 보기도 어려운 그 딸을 그렇게 함부로 대하다니. 좋게 보려야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보나 마나 우리 서희가 이길 게 뻔하지.”
“동의한다.”
사적인 감정을 빼고 보더라도 한서희의 승리가 유력한 싸움이다.
한서희. 뛰어난 특성과 마나의 재능을 타고난 아이.
심지어 그 재능을 어려서부터 갈고 닦았으며, 참가자 중 누구보다도 많은 경험을 쌓았다고 자부할 수 있다.
반면 유현은 어떤가.
특성 대신 괴물 같은 육체를 가졌다.
하지만 단순히 힘이 강하고 속도가 빠를 뿐, 인간의 몸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할 터.
‘불꽃에 닿으면 고통을 느끼는 건 똑같겠지.’
핵심은 유현이 화염을 이겨내느냐 이겨내지 못하느냐.
당연히 이겨내지 못할 게 뻔했기에 한서희가 패배하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3경기! S등급 간의 대박 매치! 곧 시작됩니다!
유현은 필드 입구에서 몸을 풀었다.
“재밌으려나.”
유현이 최강자 전에 참가한 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상금 혜택.
그리고 재미.
평화로운 지구로 돌아왔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전투를 갈망했다.
누군가를 죽이는 게 아닌, 서로의 실력을 주고받는 대회라면 피할 이유가 없었다.
“너무 많이 싸워서 질릴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만화책, 소설, 게임, 암벽 등반 같은 취미와는 또 다른 즐거움.
그렇게 오랜 시간을 싸워왔는데도, 원초적인 즐거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선수 입장!
문이 열렸다.
유현은 필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한서희의 모습.
평소처럼 차가운 표정이었지만, 유현은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긴장되냐?”
몇 미터까지 가까워진 거리.
유현의 말에 한서희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안 그렇다면 거짓말이겠죠.”
“싸우는 건 처음이잖아. 내가 너보다 약할 수도 있는 거 아냐?”
유현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그 여유로운 미소에 한서희는 잠시 뜸을 들이고 답했다.
“저도 그러면 좋겠네요.”
스피커를 통해 카운트 다운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방송에 따라 서로 거리를 벌렸다.
“......침착하자.”
한서희의 가슴 속 떨림은 조금 더 심해졌다. 유현에게서 느껴지던 여유.
그 여유가 되려 그녀를 불안케 했다.
그동안 여러 상대를 만났고, 그중에서 여유로운 척을 하던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유현에게는 그 척을 하는 사람들 특유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이미 자신이 승리하는 미래를 보고 온 것 같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한서희 이겨라!”
“한서희 파이팅!”
“유현 밟아버려 그냥!”
함성을 뚫고 들려오는 응원들.
한서희는 가슴 위에 손을 올리고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한서희가 마음을 다잡고, 전신의 마나를 끌어 올렸다.
용솟음치는 어마어마한 마나량.
막대한 코어의 크기가 순식간에 마나를 증폭시키며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준비를 완료했다.
곧 경기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