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상공을 가로지르는 눈 쌓인 절벽.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유현이 위로 손을 뻗었다.
턱.
손에 힘을 싣자 곧장 붙잡은 바위가 부서졌다.
순간 기울어지는 몸뚱이.
아래쪽으로 미끄러질 뻔했지만, 유현은 다시 툭 튀어나온 바위를 붙잡아 버텼다.
“후.”
유현이 숨을 내쉬었다. 하얀 김이 그의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재밌네.”
유현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처음부터 쉽게 가고자 했다면 진즉에 정상에 도착했을 것이다.
높긴 해도 점프를 몇 번 반복하면 정상을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힘겨운 등반을 선택한 건 순수한 재미 때문이었다.
“이런 걸 또 어디서 해보냐.”
살면서 눈 쌓인 절벽을 오를 일이 얼마나 있을까.
즐겁고 스릴넘치는 경험이었다.
현재 달성률은 대략 70% 수준.
여기까지 오며 몇 번이고 떨어지기를 반복했지만, 오히려 그런 점이 재미를 더했다.
“얼마 안 남았네.”
유현은 벽에 달라붙은 채 위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휘몰아치며 눈발이 흩날리는 가운데, 정상에 위치한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저걸 가지고 내려가면 끝.”
유현은 옆을 돌아보았다.
이케가미 쪽의 깃발 역시 아직 그 자리에 꽂혀 있었다.
유현보다 앞서 있었지만, 체력적 한계를 맞이한 이케가미는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저기까지 올라간 것도 용하네.”
유현은 다시 움직임을 재개했다.
손을 뻗어 절벽을 두드려보고, 괜찮겠다 싶은 부분을 잡았다.
이번에는 안정적이게 몸의 무게를 지탱했다.
“좋았어.”
몇 번 떨어지고 나서 습득한 방법.
조금 전처럼 떨어지는 경우도 있어서 무조건 정답은 아니지만, 떨어질 확률이 작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걸까.’
유현은 절벽을 오르며 생각했다.
이케가미에 비해 어려운 구간의 난이도. 중간에 몇 번 상대 코스를 볼 기회가 생겨서 확실하게 깨달았다.
‘이케가미 짓이겠지.’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할만한 사람은 이케가미 밖에 없었다.
그와는 지금까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오늘에야 조금 대화를 주고받으며 풀린 상태다.
‘뭣보다 수상한 건….’
이케가미가 조심하라는 말을 한 당사자라는 점이었다.
마치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이었다.
‘근데 왜 마지막에 와서 알려줬을까?’
유현은 추리에 스토리를 더했다.
처음에는 자신을 엿 먹이려 했지만, 오늘 대화하니 꽤 좋은 놈 같았고, 그래서 마음을 바꿔 조심하라고 알려줬겠지.
‘이런 일을 이케가미 혼자서 할 리는 없을 테고.’
이케가미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게 누구인지는 모른다.
다만 아카데미 내에서 꽤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일개 학생이 직접 시설에 관여하여 이런 짓을 벌일 수는 없을 테니까.
“멱살 잡고 물어보면 알려주려나.”
유현은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마법을 사용했다.
그의 눈동자가 빛을 내며 절벽의 약화된 부분을 꿰뚫어 보았다.
‘...죄다 부숴놨네.’
어디 하나 성한 곳이 없는 절벽의 내부. 유현은 그나마 단단한 부분을 잡으며 속도를 높였다.
이전과는 달리 확연히 빨라진 그의 속도에 사회자가 감탄했다.
“유현 선수! 저 높이에서도 더 빨라지네요!”
카메라가 유현의 등을 확대하자 전광판 위로 빠르게 올라가는 유현의 모습이 나타났다.
“와아아아!”
관중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유현을 응원했다.
“가자!!”
“믿고 있었다고!”
***
팀전은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되었다.
순위는 12조의 압도적인 1등이었다.
시간은 둘째치고, 모든 구간을 클리어한 게 그들밖에 없었다.
“유현! 최고다!”
시설을 나오는 두 사람에게 뜨거운 갈채가 쏟아졌다.
유현은 씩 웃으며 관중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
반응을 즐기는 유현과 달리 이케가미는 말없이 걸었다. 고개를 숙이지 않고 떳떳이 걷는 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그런 그의 귓가에 익숙한 모국어가 들려왔다.
“池上! 最高!!”
이케가미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일본 국기와 함께 열성적으로 손을 흔드는 대머리 아저씨.
그 응원을 시작으로 이케가미에게도 사람들이 소리를 질렀다.
“일본놈! 대단한데!”
“근성 최고야!”
“응원한다! 이케가미!!”
몇 년 만에 느껴보는 대중의 긍정적인 응원들. 이케가미는 얼떨떨했다. 당장 오늘까지만해도 욕만 들어먹었는데.
“손이라도 흔들어 주지 그러냐.”
어느새 다가온 유현이 이케가미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유현은 관중들을 향해 다시 손을 흔들었고, 이케가미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두 사람은 열렬한 함성을 뒤로하고 로 지하로 내려갔다.
앞으로 세 시간 뒤 시작되는 개인전.
그전까지는 휴식시간이었다.
“잠깐 이야기 좀 하자고.”
유현이 곧장 대기실로 가려던 이케가미를 붙잡았다.
두 사람은 통행이 적은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유현은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이케가미에게 건넸다.
“수고했다.”
“......너도.”
지쳤지만, 이케가미의 표정은 밝았다. 관중의 응원으로 생긴 고양감.
그리고 유현이 무사히 클리어했다는 안도감. 두 가지 감정이 이케가미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렸다.
“내가 왜 불렀는지 알아?”
이케가미는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 이유는 알고 있다. 시작하기 전에 수상한 말을 했고, 실제로도 수상한 일들이 일어났으니까. 유현이라면 팀전이 진행되며 눈치챌 거라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일이야.’
유현에게 조심하라는 말을 했을 때.
모두 자신의 부당한 행위가 들킬 거라는 것을 감안하고 했던 말이었다.
그 결과로 어떤 징계를 받아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있었다.
‘퇴학당하겠지.’
하지만 상관없어.
그건 나의 잘못이니까.
이케가미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천천히 몸을 숙이는 이케가미.
유현이 황급히 이케가미의 오체투지를 막았다.
“뭐, 뭐하냐?”
“도게자.”
“......”
유현은 탄식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당황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일어나, 인마.”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됐어. 미안한 거 알겠으니까 일단 일어나 봐.”
이케가미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했냐?”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이케가미는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부원장님께 부탁했어.”
어차피 다 들킨 마당에 그의 정체를 숨겨봤자 의미가 없었다. 혼자 했다고 거짓말해도 믿지 않으리라.
“부원장?”
“응.”
“씹새끼네.”
유현이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부탁이야 이케가미가 했다지만, 그 정도 직함을 가진 이가 학생의 부당한 요구에 응하다니. 직무 유기였다.
“근데 그 사람이 네 부탁을 왜 들어줘?”
“......”
이케가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자신이 일본 아카데미에서 퇴학 당하고 이곳에 올 수 있었던 이유와 부원장이 왜 요구를 들어줬는지에 대하여.
“이야.”
모든 전말을 들은 유현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진짜 씹새끼네.”
헛웃음이 나올 만한 이야기였다.
학생의 입학을 받아주는 대가로 돈을 받아?
양동길의 화려한 내력에 유현은 연신 탄식했다. 처음에는 어이가 없었고, 계속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이케가미의 알량한 복수심과 부원장의 덜떨어진 욕심 덕에 피해를 본 건 자신이었다.
설령 상대가 대통령이라고 해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그 새끼 여기 있냐?”
“아마도 VIP실에 있을 텐데….”
“어딘지 안내해봐.”
“......”
당장이라도 찾아갈 기세의 유현.
이케가미는 요구를 거절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모든 원인을 제공한 건 결국 자신의 선택이었으니까.
“......”
“뭐해, 빨리 안내하라고.”
유현이 살벌하게 눈을 부라렸다.
이케가미는 별수 없이 몸을 돌렸다.
“아, 참고로 그 새끼 다음은 너다.”
이케가미가 마음을 바꿨어도 책임은 여전히 남는다. 유현은 그를 철저하게 교육해줄 생각이었다.
“......”
이케가미는 서늘함을 느끼며 VIP실로 앞장서 이동했다.
***
전광판을 바라보던 양동길은 현기증을 느끼며 비틀거렸다.
마지막 구간. 자꾸만 추락하며 난항을 겪던 초반부에는 희망이 있었다. 아무리 유현이라도 이건 못 하겠지.
그러나 그 희망은 금방 부서졌다.
중간부터 그의 속도가 빨라졌고, 떨어지는 일도 없었다.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라는 말처럼 바위를 어루만지며 안전한 포인트로 올라가던 유현. 그 여유로운 모습이 마치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다.
“이런 시발!”
양동길이 분통을 터뜨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잘했으면 모를까.
희망을 줬다 빼앗긴 느낌에 양동길은 더 화가 났다.
“왜! 대체 왜!”
잔뜩 오른 취기는 그의 절제력을 떨어뜨렸다.
양동길의 분노는 곧 행동으로 나타났다.
와장창!
양동길이 야구 방망이로 모니터를 부수기 시작했다.
아카데미의 공용 재산이지만, 양동길의 눈에는 뵈는 게 없었다.
“고작 애새끼 하나 때문에….”
모니터를 박살 낸 양동길은 그제야 분이 풀리는지 방망이를 내던졌다.
술기운이 조금 깨고 나니 주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양동길이 뒷수습을 위해 인터폰을 들었다.
곧 그가 부른 직원들이 VIP실로 들어왔다. 익숙한 일이라는 듯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실내를 치웠다.
양동길이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온 사이, 청소는 깨끗하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후.”
방광을 비우고 나니 한층 차분해진 양동길. 소파에 앉아 등을 기댔다.
“아직 끝난 건 아니야.”
비록 굴러들어온 기회는 놓쳤지만, 끊임없이 기회를 노리면 언젠가는 안칠성에게 제대로 한 방 먹여줄 수 있으리라.
딩동!
그때 갑자기 벨소리가 울렸다.
조금 전 떠난 직원이라고 생각한 양동길은 스피커폰에 점잖은 말투로 역정을 냈다.
“설마 뒤처리가 다 안 됐나?”
-나다 씹새끼야.
상상도 못 한 대답에 양동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뭐, 뭐?”
화면을 볼 수 없는 제한된 형태의 스피커폰. 양동길이 성큼성큼 걸어 인터폰을 확인했다.
“대체 어떤 놈이….”
작은 화면 위로 나타난 건 유현이었다. 느닷없는 그의 등장에 양동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뭔가? 여긴 학생이 올 수 없는 곳인데.”
무어라 더 쏘아붙이려던 양동길은 뒤에 있는 이케가미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이 같이 찾아왔다는 것. 보나 마나 이케가미가 자백했다는 뜻이었다.
“......일을 그르쳤군.”
양동길은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꼈다.
설마 했더니 이렇게 될 줄이야.
“들어와라.”
양동길은 문을 열어주었다.
수습을 위해서라도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었다.
‘그나마 유현에게 들킨 게 다행이지.’
만약 아카데미 관계자였다면 어찌 손 쓸 새도 없이 일이 커졌을 테니까.
하지만 유현이 이곳으로 온 걸 보면 수습의 여지는 있다.
눈 감아 줄테니 뭘 좀 달라, 그런 식의 협상을 바란 것이겠지.
“들어와라.”
양동길은 문을 열어 주고, 소파에 앉았다.
“와, 시설 좋네.”
유현은 VIP실을 보며 감탄했다.
침대에, 화장실에, 심지어 룸서비스까지. 거의 호텔이나 다름 없었다.
“좀 화나는데?”
참가자들은 그 작은 대기실에 가둬두고, 자기는 여기서 보고 있다니.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군.”
양동길이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흘끗거렸다.
유현은 건들거리며 양동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우리 팀전 1위 분들께서 여긴 무슨 일이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넌지시 말하는 양동길. 유현은 호흡을 깊게 들이쉬며 인내하려 했으나 결국 참지 못했다.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돌았냐?”
“......기본적인 예의는 지켜주었으면 좋겠는데.”
그 말에 유현이 실소했다.
“지금 예의라고 했어?”
“그래.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알지.”
아카데미 부원장. 그리고 돈에 도덕심을 팔아넘긴 망나니.
“알면 예의를 지키게.”
“......”
유현은 손목을 돌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가 흘리는 흉흉한 기세에 양동길이 불안을 드러냈다.
“뭐, 뭘 하려는 건가?”
“예의 지키라며.”
범죄자에게 어울리는 예의는 상식ㅂ적인 행동이 아니다. 특히 이렇게 자기 잘못은 모르고 뻔뻔하게 나오는 놈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오, 오지마아아아아아악!”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사람은 매가 약이다.
판대륙에서 깨달은 진리를 유현은 몸소 실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