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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자는 헌터가 하고 싶다-93화 (93/219)

93

인내(忍耐).

처음에는 참자고 생각했다.

소나기처럼 잠시 몸을 적시고 끝날 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거센 빗줄기는 그치질 않았고, 몸은 빗물로 축축해졌다.

축축해지다 못해, 저 깊은 곳으로 끌어내리려는 것 같았다.

더 참다가는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케가미는 그래서 동급생과 싸웠다.

몇 놈을 때려눕혀 병원 신세를 지게 만들고, 그래서 퇴학당했다.

헌터는 때려치우고 조용히 살고 싶었지만, 부모님이 간곡히 부탁했다.

그렇게 옮긴 이국의 아카데미.

부모님을 봐서라도 여기서는 참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좀 닥쳐! 시발!”

이케가미가 선두에 선 아이를 향해 주먹을 뻗었다. 푸른색 마나가 주먹 위로 일렁거렸다.

“이야, 바로 주먹질이야?”

상대는 가볍게 공격을 피해냈다.

이케가미는 멈추지 않고 주먹을 뻗었다. 아무나 맞으라는 식이었다.

“푸하하!”

“허우적거리는 것 좀 봐.”

힘이 가득 실린 공격은 단조로웠고, 뒤로 물러나는 것만으로도 쉽게 피할 수 있었다.

이케가미가 숨을 몰아쉬며 움직임을 멈췄다.

흙이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서 그는 마나를 가진 일반인과 다를 게 없었다.

“끝이야?”

상대가 이케가미를 보며 비웃었다.

“그럼 우리 차롄가?”

두 사람이 이케가미에게 다가와 그의 양팔을 붙잡았다.

곧 다른 이가 손목을 돌리며 이케가미의 앞을 막았다.

“이빨 꽉 깨물어라.”

묵직한 주먹이 이케가미의 안면을 향해 날아든 그 순간.

턱!

힘이 실린 주먹이 이케가미의 코앞에서 가볍게 붙잡혔다.

“때리지 마.”

상대의 주먹을 붙잡은 유현은 이어서 손목을 비틀었다.

“아! 아!”

뼈가 뒤틀리며 강한 고통을 호소했다. 유현은 주먹을 놓아 주었다.

“아악! 씨발!”

상대가 손목을 붙잡으며 주저앉았다.

부러뜨리기 전까지 갔으니 데미지가 상당할 것이다.

“넌 뭔데 끼어들어?”

이케가미의 어깨를 붙잡고 있던 놈이 유현의 어깨를 쳤다.

“얘랑 같은 팀인데.”

유현이 마나에 기세를 담아 내뿜었다. 공기 중으로 잔잔히 퍼지는 압박감. 유현을 마주한 상대는 답답함을 느꼈다.

“숨이….”

유현은 서 있는 두 사람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좋은 말로 할 때 가자.”

옆에 있던 이케가미는 피부에 닭살이 돋는 걸 느꼈다.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닌데도 듣는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

“알았지?”

유현이 어깨동무를 풀자 두 사람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야! 어디가!”

쭈그려 앉은 놈이 소리쳤지만, 두 사람은 멈추지 않았다.

“씨바, 치사한 새끼들.”

유현은 말없이 놈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낀 상대는 눈빛에 흠칫하고는 후다닥 몸을 일으켜 사라졌다.

두 사람만 남은 공용 대기실.

이케가미는 음료를 홀짝이는 유현을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이야?”

유현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뭐가?”

“왜 날 도와주냐고.”

“같은 팀이고 같은 반이니까.”

유현이 별 걸 다 물어본다는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태연함에 이케가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그렇게 지랄을 떨었으면 질려서 나가떨어질 법도 한데, 참 단순한 이유로 도와주는구나.

“너는…. 내가 아무렇지도 않냐?”

날카로운 인상이 주는 불량함과 그에 어울리는 성격.

수많은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과거.

오래된 친구들도 전부 등을 돌렸고, 주변에 남은 사람은 부모님뿐이었다.

“개소리하네.”

“...뭐?”

“생각해 봐라. 그동안 그렇게 꼴값을 떨었는데 아무렇지도 않겠냐?”

“......”

“내가 어른이니까 그냥 참고 넘어가는 거지.”

유현은 입이 풀렸는지 주르륵 말들을 쏟아냈다.

“너는 좀 고쳐야 할 게 많아. 쓸데없이 시비 걸지 말기. 말 예쁘게 하기. 또 뭐야.”

“아니…!”

이케가미는 순간 발끈했지만,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이케가미를 보며 유현은 한 마디를 더 던졌다.

“그리고 옛날 일에 얽매이지 않기.”

“......”

순간 이케가미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하지만 유현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지나간 일 때문에 앞으로 살아갈 날을 망치지 마.”

“그건 네가 뭘 몰라서….”

“나도 알아. 오히려 너보다 더 잘 알지.”

자신의 실수로 동료를 잃었던 기억.

폐인처럼 지내다가 결국에는 다시 일어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때의 일은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

목소리를 높이려던 이케가미는 유현의 눈빛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두 눈에 담긴 깊은 슬픔.

어떤 일을 겪은 건지 짐작할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허공을 바라보던 유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겪은 일과 똑같지는 않겠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 과거에 묶여있는 거, 다 미련이고 멍청한 짓이야.”

“......”

“그리고 어차피 네 잘못도 아니잖아. 그게 제일 중요한 거 아닌가?”

이케가미 역시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그저 억울하게 당한 것뿐이니, 사람들의 반응에 일희일비할 필요 없다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을 향했던 사람들의 화살이 떠올랐다.

그들의 눈초리, 그들이 했던 말들이 평소에는 물론이고 잠들 때까지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야.”

“...그래도 좀 나아졌네.”

예전 같았으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을 텐데.

유현은 말을 끝맺고는 몸을 돌렸다.

“주머니에 넣어놨으니까 마셔라.”

“뭐?”

이케가미가 주머니를 확인했다.

언제 넣은 건지 깡통 죽이 주머니 속에 있었다.

“......”

이케가미는 캔을 쥔 채 유현의 말을 곱씹었다.

자신도 다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과거에 묶여있는 게 미련하고 멍청한 짓이란 것도, 자신의 잘못이 아닌 것도.

하지만 사람들에게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쉽게 이겨낼 수가 없었다.

“......할 수 있을까.”

이케가미는 캔을 열어 죽을 마셨다.

따뜻한 죽이 입안을 거쳐 식도를 타고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속이 든든해지는 포만감 속에서, 불현듯 그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시발.”

빈 캔을 구기고 급히 유현의 대기실로 향하려던 그때.

-12조 출전 대기 바랍니다.

방송이 울렸다.

***

“드디어 차례가 왔군.”

양동길이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시설 내부에서는 점검 인원들의 설계가 한창이었다.

이전 조가 시험을 끝낼 때마다 투입되던 점검조지만, 이번에 그들이 할 일은 점검이 아니었다.

양동길의 지시대로 한쪽 코스의 지반을 약하게 하고, 전체적으로 불리하게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잘해라. 내 노력이 헛되지 않게.”

그의 시선이 경기장으로 올라오는 이케가미에게 향했다.

이케가미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유현이 보이지 않았다.

“쥐새끼같이 어딜….”

경기장을 살피던 양동길은 곧 유현을 발견했다.

반대편에 있는 중계용 카메라 앞에서 기웃거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전광판 위로 우스꽝스러운 표정의 유현이 나타나며 양동길의 의문이 풀렸다.

안 그래도 그의 등장으로 커졌던 관중의 함성이 더 커졌다. 사이사이로 웃음소리도 섞였다.

“...한심하군.”

마침 내부 점검을 마친 점검 인원들이 시설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이걸로 준비는 끝났다.

“두 눈으로 똑똑히 봐라, 안칠성.”

네 제자가 무너지는 모습을.

만약 상대가 유현이 아니었더라면, 이케가미의 부탁을 거절했을 것이다.

위험부담이 크고, 비용도 많이 들기에 고작 몇 푼을 받는 대가로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요구를 받아들인 건 안칠성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새끼.”

뿌드득.

양동길이 이를 갈았다.

꽤 오래전, 10년 가까이 된 일이다.

안칠성이 양동길의 뇌물 수수 정황을 포착했고, 그걸 원장에게 그대로 찔렀다.

정확한 물증이 없어 처벌은 면했지만, 그 일 때문에 차기 원장 경쟁에서는 눈 밖에 났다.

‘그 새끼만 없었어도 부원장 자리로 끝나지 않았을 텐데.’

안칠성은 허위 신고를 사유로 한직으로 쫓겨났다.

업계에서 제법 이름을 날리다 은퇴한 그에게 F 학급 담당 교사는 벌이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유현이 여기서 허무하게 떨어진다면, 원장님도 다시 생각해보겠지.’

모르긴 몰라도 안칠성이 S등급 담당 교사로 임명된 건 유현의 담임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을 터.

그게 아니라면 굳이 그를 S등급 담임으로 임명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성공적으로 마무리만 된다면, 안칠성을 다시 하위 학급의 담임으로 끌어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이케가미는 VIP석을 돌아보았다.

양동길이 유리창 가까이 선 채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다.

‘젠장.’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

그깟 알량한 자존심으로 누군가를 짓밟을 생각을 하다니. 자신을 욕하던 대중들과 다를 게 뭔가.

‘말해주고 싶어도, 이래서야….’

유현과 대화하는 게 양동길의 눈에 띈다면 어떤 조치든 취할 것이다.

그가 절대적인 갑의 위치에 있는 만큼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코스를 바꿔?’

차라리 유현과 코스를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유현에게 알려주는 것보다 더 멍청한 짓이었다.

“원숭이!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독도는 우리 땅!”

“아카데미에서도 사람 죽일 거냐!”

그때, 관중석에서 이케가미를 향한 비난이 들려왔다.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순간 화가 치밀었다.

관중석을 향해 소리치려던 이케가미는 유현의 행동을 보고 그만 말문이 막혔다.

“아아! 이게 뭔가요!”

전광판 위로 유현이 중지를 뻗은 모습이 나타났다. 방향은 이케가미를 향해 비난을 쏟아냈던 관중석이었다.

“여러분! 선수를 향한 비난은 멈춰주세요!”

사회자가 말하자 야유가 쏟아졌다.

“우우우!”

“우리가 우리 입으로 말하겠다는데!”

“범죄자는 물러나라!”

이케가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까 조가 발표되었을 때도 야유는 있었지만, 지금은 한층 더 심해졌다.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여전히 욕을 먹는 건 쉽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이케가미에게 유현이 다가왔다.

“적당히 무시하고 넘겨. 괜히 경기에 영향받지 말고.”

쏟아지는 비난에 고개 숙인 와중, 이케가미는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유현이 먼저 말을 건 상황. 지금이라면 양동길도 수상하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조심해.”

“뭐?”

“조심하라고. 길게 설명은 못 해줘. 그냥 최대한 조심해.”

이야기가 길어지면 양동길이 의심할 터. 이케가미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자신의 코스로 자리를 옮겼다.

“뭐야 갑자기.”

유현도 출발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일본인! 유현을 방해하지 마라!”

“잘 따라가라고!”

차츰 비난은 줄어들고 두 사람을 응원하는 목소리가 늘어났다.

“야, 잘해라.”

유현도 이케가미를 향해 응원을 보냈다.

이케가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미안하다. 유현.’

이케가미는 그저 유현이 어떻게든 돌파하기를 소망했다.

그가 가진 괴물 같은 신체 능력이 힘을 발휘하기를 바랐다.

‘만약 떨어진다면….’

이케가미는 고개를 흔들었다.

유현을 믿자. 믿고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팀전의 마지막! 12조의 경기입니다!”

곧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다.

관중석에 앉은 안칠성이 긴장한 얼굴로 유현을 바라보았다.

‘제발 큰일이 아니었으면 좋겠군.’

공익이 목적이라지만, 만약 유현에게 중대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죄책감을 견디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니 그저 유현의 피해가 적기를 바랄 뿐이었다.

“3! 2! 1!”

곧 출발 신호와 함께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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