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자는 헌터가 하고 싶다-92화 (92/219)

92

‘쯔쯧. 생긴 것부터 알아봤다.’

‘얼마나 힘들게 했을까. 저 죽일 놈.’

‘저래서 헌터는 되겠어?’

‘사람도 죽였다며? 살인마 새끼.’

머릿속을 울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눈앞에 아른거리는 비난의 실루엣.

‘미안, 네가 좀 참아.’

연인이 마지막으로 했던 한 마디까지. 하루가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일 년이 지나도. 숨통을 조여오던 말들은 잊히지 않았다.

‘쟤가 걔라면서?’

‘전학 온 거 보면 그게 사실인가?’

‘그럼 범죄자 아니야?’

죽을 생각도 했지만, 차마 부모님을 등 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지낼 수도 없기에, 부모님의 요구에 따라 해외 아카데미의 입학을 선택했다.

처음에는 여긴 괜찮지 않을까, 다들 조금은 호의적으로 받아주진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곳도 다를 게 없었다.

결국에 여기서도 나는...

-지금부터 팀 추첨이 있을 예정입니다. 참가자들은 경기장 밖으로 모여주세요.

실내에 울려퍼지는 안내 방송에 이케가미가 눈을 떴다.

좋지 않은 꿈을 꾼 탓에 이마가 흥건했다.

“하필 이런 꿈을….”

이케가미가 땀을 닦으며 매트에서 일어났다.

-와아아아아!

우렁찬 관중들의 함성이 대기실 안까지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이케가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후우.”

이케가미는 심호흡했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앞까지 갔으나 두통이 심해 문에 머리를 기댔다.

“하아.”

단전에서 치솟은 깊은 한숨.

문고리에 올린 손이 심하게 떨려왔다.

자국 헌터 아카데미에서 퇴학당한 이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대중.

긴장됐고, 불안했으며, 두려웠다.

꿀꺽.

습관처럼 침을 삼켰다.

심박이 조금 가라앉았다.

“침착하자.”

이케가미는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고 고개를 들었다.

힘없이 늘어졌던 눈동자가 또렷해졌다. 곧 눈빛에는 적의와 반항심이 가득 담겼다.

“......겁먹지 마.”

보이는 것만 믿고 생각 없이 행동하는 대중들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

저들은 어리석고, 멍청하며 수준 이하의 존재이다.

살기 위해 머릿속에 각인했던 말들.

이케가미는 속으로 그 말을 두어 번 되뇌고는 문을 열었다.

그런데 문 앞에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뭐야. 일어나 있었네?”

문을 두드리려고 했는지 유현의 손이 허공에 멈춰있다.

이케가미가 날 선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뭔데?”

“안 나오길래 죽었나 했지.”

유현은 몸을 돌려 이동했다.

이케가미도 문을 닫고 복도로 나왔다. 여유가 묻어나는 유현의 걸음걸이.

긴장한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이케가미는 그런 유현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오늘은 본때를 보여주마.’

그간 유현에게 나쁜 감정이 있지는 않았다.

등급 테스트에서 죽도록 맞았던 것도, 내기에서 패배해 돈을 건네준 것도 모두 자신이 초래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넌 그 사건을 입에 담아선 안 됐어.’

의도가 어떻든 그건 마음을 갉아 먹혔던 기억이다.

대중을 향한 분노를 들끓게 하고, 그간 가져왔던 신념과 마음마저 완전히 뒤집어버린 과거의 트라우마였다.

설령 누군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고는 해도 입을 다물고 있어야 했다.

누군가 보면 유치하다고 느낄 복수심. 하지만 이케가미는 이런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과거처럼 계속 참았다가는 자신이 먼저 죽어버릴 것 같았다.

‘넌 그냥 운이 나쁜 거야, 유현.’

이케가미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경기장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줄을 섰다.

곧 인원 체크가 끝나고, 축구선수들처럼 두 줄로 입장을 시작했다.

“와아아아아ㅡ!”

군중의 함성은 더 크고 선명하게 참가자들의 귓가에 닿았다.

수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24명의 참가자에게 집중된 상황.

다들 이제야 실감이 나는지 크고 작게 긴장을 머금었다.

“와, 사람 많네.”

사람들의 관심에 익숙한 유현도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을 보며 기함했다.

축구 경기장만큼 많은 좌석의 숫자.

S등급이 대거 나타난 덕에 모든 좌석이 가득찼다.

“......”

이케가미는 긴장한 얼굴로 앞 사람을 따라갔다. 당장이라도 귀를 막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오히려 눈에 띄리라.

참가자들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경기장에 마련된 팀 추첨 석에 착석했다.

작은 무대에 설치된 추첨 기계.

내부에 다양한 색의 구체가 들어가 있다.

‘여기서 나는 유현과 팀이 된다.’

양동길이 미리 만들어 놓은 판.

어떤 식으로 그를 물 먹일지 이미 전해 들었다.

그리 악랄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적절한 수위였다.

‘유현, 너는 오늘 탈락할 거야.’

팀전을 통과하는 건 자신 혼자가 될 것이다.

유현은 그 영향으로 개인전에도 참가할 수 없을 테고.

그게 유현을 향한 복수였다.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여기서 탈락한다면 그에게 부정적인 평가가 쏟아질 것이다.

이케가미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포인트는 바로 이미지의 하락이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헌터 아카데미 최강자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사회자가 사람들을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분위기가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여러 분의 뜨거운 호응 덕에 전좌석이 매진되었습니다! 게다가 실시간 시청자 수는 벌써 30만 명! 전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주목하고 있네요!”

아직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30만 명. 엄청난 숫자였다.

“자, 그럼 각설하고 추첨을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말과 함께 추첨이 시작됐다. 추첨 기계 안에 바람이 불며 공들이 허공을 휘저었다.

“그럼 우선 첫 번째!”

공 두 개가 튜브를 통해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1조는 A등급 이용! 그리고 같은 A등급 김치우입니다!”

사회자가 소리치자 곧 전광판에 두 사람의 이름이 나타났다.

“자! 그럼 다음!”

사회자는 다음 조를 뽑았고, 하나둘 짝이 맞춰졌다. 총 24명, 12개의 조.

“11조는 S등급 오철용과 신가온입니다!”

“와아아아아!”

S등급이 조에 포함될 때마다 관객들이 함성을 질렀다.

A등급 역시 치열한 예선을 거쳐 올라왔지만, S등급이 주는 상징성에는 미치지 못했다.

“신가온 파이팅!”

관중석에 앉은 스파르타의 간부들이 동시에 일어나 소리쳤다.

짐승의 포효 같은 응원에 주변의 관중들이 기겁했다.

“하하.”

신가온은 그쪽을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저 사람들이 길드원이야?”

“간부님들이셔. 널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 내가 저번에 너한테 졌다고 말했거든.”

“그래? 그럼 나중에 밥 먹으러 가는 김에 얼굴이나 비춰봐야겠네.”

11조가 정해지고, 추첨 기계에는 두 개의 공만이 남았다.

현재까지 호명되지 않은 사람은 두 사람.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기에 관중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커졌다.

“유현!”

“유현!”

처음 S등급이 되었을 때는 누구도 몰랐던 유현.

이제는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열정적으로 소리치고 있었다.

“남은 사람은 자연스레 한 조가 되겠네요!”

사회자는 직접 손을 넣어 공을 꺼냈다. 유현과 이케가미의 이름이 전광판에 나타났다.

“이걸로 12개의 조가 완성되었습니다! 자리를 떠나지 마세요! 금방 팀전이 시작되니까요!”

이케가미는 유현을 돌아보았다.

태연하게 신가온과 떠드는 모습.

‘이렇게 남게 된 건 우연이 아니야, 유현.’

유현과 이케가미의 공은 다른 공들 보다 좀 더 무겁다.

내부에 부는 바람의 강도를 높이지 않으면 튜브가 있는 위치까지 올라오지 않기에, 마지막까지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준비가 되었다고 하네요! 1조는 입구로 이동해주세요!”

1조가 경기장 중앙에 설치된 팀전 어트랙션으로 이동했다.

불투명한 막으로 내부가 가려졌지만, 겉에서 보이는 크기만으로도 압도적인 시설이었다.

“이번 팀전 같은 경우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시설을 재활용했는데요. 다양한 전문가들의 참여가 있었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1조가 경기장 입구에 도착하고, 시설을 가리고 있던 가림막이 사라졌다.

드러난 시설의 모습에 관중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와? 뭐야?”

“어떻게 저렇게 만들었지?”

자연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이질적인 풍경.

우거진 숲, 거친 바위지대, 절벽 등.

경기장의 풍경과는 어긋나는 모습.

그건 마치 서로 다른 차원이 한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와….”

넋을 놓고 감탄하던 사회자는 곧 아차하며 본분을 되찾았다.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한 룰을 설명하겠습니다!”

팀전은 타임어택으로 다른 팀들과 시간을 겨루는 방식이다.

중간중간 존재하는 장애물들은 서로 협력하여 돌파하고, 한 사람이라도 빠르게 먼저 골인하면 끝이다.

“골인은 혼자 해도 되지만, 거기까지 혼자 갈 수는 없습니다!”

혼자서는 진행할 수 없는 협동 게임.

그게 바로 팀전이 가지는 의미였다.

“지금 막 선수들이 입구에 도착했군요.”

서로 다른 두 개의 입구 앞에 선수가 한 명씩 섰다.

길이는 같지만, 내부 구조는 판이하다. 또한, 서로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기에 상대를 믿고 나아가야 한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전광판에 카운트 다운이 시작됐다.

관중들은 한 마음 한뜻이 되어 함께 숫자를 셌다.

“3!”

“2!”

“1!”

숫자가 0이 되고 경기장 상공에 불꽃이 터지며 시설의 입구가 열렸다.

출발선에 서 있던 두 사람이 곧장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

경기장 VIP석.

양동길이 팀전이 진행 중인 필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험준한 산세를 달리고 강을 헤엄치는 참가자들의 모습.

관중들은 전광판을 보며 뜨겁게 호응했다.

“달려! 더 빨리!”

“와아악! 악어다!”

“돌 굴러온다! 피해!”

양동길이 흡족하게 미소지었다.

기존에 방치되던 장비들을 활용한 새로운 방식의 고안.

관중들의 반응을 보니 성공적이었다.

‘마무리는 잘 부탁한다. 이케가미.’

사실상 이케가미의 요구로 탄생한 팀전. 그 목적까지 깔끔하게 달성된다면 더없이 좋은 마무리였다.

한편, 경기장 지하의 대기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참가자들은 시험의 공평성을 위해 대기실에 머물렀다.

이케가미는 배를 채우기 위해 자판기가 있는 공용 대기실로 움직였다.

누군가는 팀전이 어떤 구조로 이루어지는지 고민하는 시간이었지만, 이케가미에게는 걱정 따위 없었다.

이미 머릿속에 모든 정보가 들어가 있었으니까.

덜그럭!

공용 대기실에 도착한 이케가미는 음료수를 꺼내는 유현을 발견했다.

“어.”

유현도 이케가미를 발견하고는 아는 체했다.

“웬일이냐?”

“......”

이케가미는 말을 무시한 채 자판기로 향했다.

캔에 들어간 죽들이 자판기 안에 진열되어 있다.

곧장 하나를 골라 버튼을 눌렀지만, 왜인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긴 공짜 아니야.”

이케가미가 내심 아차했다.

매번 스페셜 하우스에서 공짜 자판기를 이용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곳도 공짜라고 생각했다.

“딱 보니까 돈 안가져왔구만.”

유현이 자판기에 카드를 찍고 이케가미가 방금 눌렀던 깡통 죽을 뽑았다.

“자.”

유현이 눈앞에 깡통 죽을 들이밀었다.

이케가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이상한 자존심 부리지 말고 받아, 인마. 지나간 일은 잊고 같은 팀 됐으니까 의기투합하자고.”

지나간 일은 잊고.

그 말이 자리를 떠나려던 이케가미를 붙잡았다. 그리고 참아왔던 분노의 기폭제가 되었다.

“너 병신이야?”

“......뭐?”

“지나간 일을 어떻게 잊어? 잊고 싶다고 쉽게 잊을 수 있는 줄 알아?”

서로가 말하는 ‘지나간 일’의 의미는 달랐지만, 유현은 이케가미가 왜 그리 과격하게 반응하는지 깨달았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닌데 그렇게도 들렸겠네.”

“......”

“근데 뭐, 오해했다고 사과할 생각은 없어. 넌 좀 잊을 필요가 있거든.”

“뭐?”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고.”

이케가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자기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걸까.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개소리하지마.”

예상했던 반응이기에 유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케가미는 그 모습에 혀를 차고는 유현을 지나쳤다.

“이게 누구야.”

그런데 그때.

교복을 입은 세 사람이 공용 대기실로 들어왔다. A등급 참가자들이었다.

“......”

한때 자신과 붙어 다녔던, 그리고 마지막에는 뒤통수로 좋지 않은 마무리를 지었던 이들의 등장.

이케가미는 말없이 그들을 응시했다.

“꼴에 혼자 올라가서 좋다고 S등급처럼 다니네.”

“비켜.”

이케가미는 그들을 무시하려 했지만, 세 사람은 그의 앞을 막고 비켜주지 않았다.

이케가미는 그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야, 눈 그렇게 뜨면 아이고~ 무서워라~ 하면서 비켜줄 것 같았어?”

“등신아. 잘못했으면 잘못했다고 사과라도 해라.”

“불쌍한 원숭이 새끼. 지네 나라에서는 쫓겨나고, 여기서도 친구 하나 없고. 그러니까 죽이겠다고 협박은 왜 하냐?”

이케가미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일 앞에 선 이가 그걸 보고는 비웃음을 흘렸다.

“한 대 치게? 쳐봐~”

“기사 하나 뜨겠다. 데이트 폭력범 이케가미. 쫓겨나서도 제 버릇 못 고쳐….”

“여기서도 매장당하면 어디 가서 사냐? 상판대기 갈아엎어야겠네.”

폭소하는 상대를 보며, 이케가미는 아슬아슬하던 이성의 끈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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