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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잎이 가을바람에 나부끼는 가운데, 아카데미로 향하는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도로 역시 아카데미로 가기 위한 차들로 꽉 막혔다.
모두에게 아카데미의 교문이 활짝 열린 오늘. 헌터 아카데미 최강자전이 있는 날이었다.
“어허허허허이!”
인도를 걷던 사람들이 난데없는 고성에 뒤를 돌아보았다.
구릿빛 피부의 행렬.
훤히 드러난 상반신.
근육질의 남자들이 꽉 막힌 도로 위를 한 줄로 달리고 있었다.
“저 사람들 뭐야?”
“와, 근육 봐.”
아카데미로 향하던 사람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그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처음에는 호기심, 그다음에는 감탄.
사내들은 순식간에 사람들을 지나쳐 저 앞으로 달려간다.
“어허허허허이!”
길드 [스파르타]의 간부들은 주기적으로 괴상한 기합을 질렀다.
“얼마 안 남았소!”
선두에 선 중년의 남자가 소리쳤다.
매일 아침 이루어지는 100km 구보.
보통은 길드 본부에서 출발하여 본부에서 끝나지만, 오늘의 종착점은 아카데미였다.
“평소보다 20km 더 뛰니 기분이 좋군!”
“동의합니다! 하하하!”
무려 120km를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지친 기색은 없었다. 그들에게 아침 구보는 하루를 산뜻하게 시작하기 위한 준비운동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가온이가 교문 앞에서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잠시 뒤, 아카데미의 교문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았지만, 큰 키와 귀공자다운 외모는 곧장 눈에 띄었다.
“가온아아아!”
신가온이 사내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사내들은 더 속도를 높여 순식간에 교문 앞에 도착했다.
“어서 와요!”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달리 신가온은 익숙한 일인지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랜만이구나! 하하!”
“가온아! 반갑다!”
신가온은 길드의 간부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경기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 네 상대는 누구냐?”
“아직 몰라요. 시작 전에 뽑거든요.”
아카데미 내에서도 그들은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웃통을 벗은 열댓 명의 사내와 아이돌 같은 외모의 소유자가 함께 움직이는 건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가온 공. 오늘 그 유현이라는 놈도 출전하오?”
“네. 현이도 나올 거에요.”
그 말에 다들 눈을 번뜩이며 근육을 꿈틀거렸다.
“후후, 어떤 놈인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군.”
“한번 붙어보고 싶은데 가능한가?”
“어허이! 어딜 감히 이 몸도 가만히 있는데 나서나!”
그들의 과격한 반응에 신가온은 헤실거리며 웃을 뿐이었다.
“가온. 오늘도 지면 안 된다?”
“당연하죠!”
만약 오늘 붙게 된다면,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적어도 저번처럼 쉽게 지진 않아.’
그때의 패배 이후로 더 노력했고, 오늘은 특성도 사용할 수 있으니까.
“올해는 어째 작년보다 더 사람이 많은 것 같군?”
스파르타의 길드 마스터 박진주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최강자전으로 시끌벅적한 아카데미 내부. 작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당연한 것 아니오? 올해는 무려 S등급이 아홉이나 있다고!”
“음! 듣고 보니 그렇군!”
꼬르륵.
그때, 박진주의 뱃속에서 굶주림의 소리가 들려왔다.
소란 속에서도 그 소리를 들은 길드원들이 박진주에게 눈을 부릅떴다.
차량 통행이 차단된 도로와 거리에 늘어선 응원 도구 및 먹을거리를 판매하는 가판들.
간부들의 강렬한 눈빛을 박진주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늘 아침은 여기서 떼우자고!”
박진주를 필두로 스파르타 일행은 가판을 샅샅이 돌았다.
어느새 그들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음식들이 잔뜩 들려 있었다.
“가온이 너도 먹을 테냐?”
신가온은 난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슬슬 가봐야 해서요.”
“벌써!”
“네. 그거 다 드시면 여기 화살표 따라서 경기장으로 가세요!”
신가온이 박진주에게 티켓을 건네고는 몸을 돌렸다.
“가온이 파이팅!”
“파이팅!!”
박진주가 우렁차게 선창하자 다른 이들이 더욱 크게 후창했다.
신가온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경기장으로 뛰어갔다.
***
최강자전이 행해지는 아카데미의 메인 경기장. 내부에서는 마지막 점검이 한창이었다.
경기장의 상태가 정상적인지, 팀전이 진행될 세트장에 이상은 없는지 등.
처음으로 진행되는 팀전인 만큼 점검에 만전을 기했다.
“작년보다 더 힘든 것 같냐.”
“팀전이 추가됐잖아요.”
점검을 진행하던 직원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갑자기 웬 팀전이래? 원래는 개인전만 했잖아.”
“부원장님 지시라는데요? 개인전만 하면 너무 빨리 끝나고 재미도 없으니까 팀전도 하나 넣자고.”
“허, 그냥 재미라고? 그럼 점수 편성에서도 빼는 게 정상아냐? 보니까 개인전이랑 팀전 합해서 순위 책정하더만.”
“난들 알아요? 우리야 시키는 일만 하면 되지.”
직원들 사이에서 경기장을 돌아보던 안칠성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번 최강자전은 지금까지 치러진 경기들과는 다르다.
새롭게 추가된 팀전.
재미를 위해 생겼다는 명목답게 상대와 단순히 싸우는 게 아니었다.
‘협동.’
서로 힘을 합쳐 난관을 격파하고, 누구보다 빠르게 종착점에 도달하는 게 목표. 그 시간을 측정하여 순위를 매긴다.
‘양동길이 이케가미의 요구로 짜놓은 판이지.’
얼핏 보기에는 문제가 없다. 경기의 규칙도 경기의 진행 방식도 흠잡을 곳 하나 없이 깨끗하다.
하지만 분명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 있다. 그게 아니라면 힘들여서 팀전까지 만들 이유가 없을 테니까.
‘경기 내적인 요소일 텐데.’
외부에서는 확인이 불가능한 요소.
직접 확인할 생각으로 점검 현장까지 찾아왔지만, 출입을 통제당해 확인하지 못했다.
“안 선생. 여긴 무슨 일로?”
깊이 고민하며 걷던 그의 앞을 누군가 막아섰다.
땅으로 향했던 안칠성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깔끔하게 뒤로 넘긴 머리카락.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가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상대를 확인한 안칠성은 긴장을 삼켰다.
“안녕하세요, 부원장님.”
“그래. 오랜만이군.”
안칠성은 무표정으로 양동길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는 적의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인가?”
“팀전 시설을 좀 구경하러 왔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 있나?”
퉁명스러운 말투에는 의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안칠성은 태연을 가장하며 웃었다.
“궁금하면 그럴 수도 있죠.”
부원장실의 대화를 엿들은 이후로 양동길에게 접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혹시나 괜히 책잡힐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경계심을 드러내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 때문일 터.
이미 한 번 전적이 있으니 이번에도 찔러보는 걸 테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괜한 걸 물어봤군.”
안칠성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그를 지나쳤다.
“S반을 맡았다고 들었네.”
등 뒤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안칠성이 걸음을 멈췄다.
“자네 같은 의심병 환자에게 어울리는 클래스는 아니지 않나?”
“......”
“원장님도 슬슬 노망이 드셨나보군.”
안칠성은 뒤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곧 어깨 위로 손이 올라왔다.
“반에 문제가 많은 모양이야. 들려오는 소문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고.”
“잘 관리하겠습니다.”
“괜한 문제 일으키지 마. 자네도, 자네 클래스도.”
당장이라도 어깨에 올라온 손을 붙잡아 제압하고 그게 무슨 뜻이냐며 따지고 싶었다.
‘참자, 참아.’
안칠성은 주먹을 움켜쥐며 인내심을 발휘했다.
여기서 따져봤자 자신에게 이득될 게 없었다.
가만히 서 있던 안칠성은 양동길이 멀어지고 나서야 다시 움직였다.
***
경기장 지하에 마련된 선수 대기실.
1인당 하나씩 주어진 대기실은 5평 남짓의 아늑한 공간이었다.
유현은 대기실에 마련된 매트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했다.
“아! 포션 못 썼다!”
게임 속 캐릭터가 죽었다. 조금만 더 사냥하면 레벨 업인데, 죽는 바람에 경험치가 왕창 깎였다.
“아아아아아악!”
그가 비명을 지르고 잠시 뒤, 누군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야! 좀 조용히 해!
앙칼진 서혜빈의 음성이 대기실로 스며들었다.
“아아악! 왜 포션을 안 썼지!”
이번에는 문이 벌컥 열렸다.
서혜빈이 금방이라도 험한 말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로 뛰쳐 들어왔다.
“야! 좀...”
유현의 몰골을 본 서혜빈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매트 위에 태평하게 누워있는 그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최강자전을 목전에 둔 학생의 상태가 아니었다.
테이블에 널려 있는 컵라면과 편의점 음식들의 쓰레기는 또 어떤가.
선수 대기실이 아니라 청소가 귀찮은 백수의 자취방 같았다.
“와, 방 꼬라지 봐라.”
서혜빈이 진심으로 경악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시선은 곧 유현에게 돌아갔다.
“우리 조금 있으면 시작인데 준비 안 해?”
유현이 이불을 살짝 내려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난 언제나 준비된 남자지.”
“헛소리 말고 방이나 좀 치워! 우리 여기온지 한 시간도 안 됐거든?”
“그만큼 나의 존재감이 강하다는 증거야.”
서혜빈이 기가차다는 듯 탄식했다.
“이런 놈이 어떻게 예선에서 1등을 했지?”
“잘하니까.”
“잘하기는 무슨! 나 만났으면 너 졌을걸?”
예선전은 오직 랜덤으로만 상대가 정해진다. 자연스레 대진운이 좋은 사람이 있기 마련.
이번에는 그게 유현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S등급을 만나지 않고 다섯 번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둘이서 뭐하냐?”
그때 안칠성이 유현의 대기실로 들어왔다.
“선생님! 이것 좀 봐봐요!”
서혜빈이 잘못을 일러바치는 어린아이처럼 방을 가리켰다.
안칠성 역시 방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표정이 굳었다.
“야, 너는 대체….”
“스탑. 잔소리는 거기까지.”
유현이 몸을 일으켰다.
“쉬고 있는데 왜들 와서 그래?”
“네가 시끄럽게 하니까 그렇지.”
“오케이. 접수. 이제 조용히 할게.”
유현이 안칠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선생님은요?”
“응? 그냥 지나가다 문 열려 있길래 들어왔다.”
사실은 유현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상한 걸 먹고 탈이 나진 않았는지, 몸 상태가 나빠지진 않았는지 등.
양동길이라면 외부에서도 얼마든 손을 쓸 놈이기에 안심할 수 없었다.
“되게 쓸데없는 이유네요.”
“......방 꼴이 이 모양인 걸 보면 그리 쓸데없지도 않은 것 같다만.”
“예, 예. 제가 다 치우겠습니다.”
유현이 매트에서 벗어나 두 사람을 문밖으로 밀었다.
“혹시 누가 뭐 주면 막 받아먹지 마라.”
“제가 어린애에요?”
“누가 불러도 막 따라가지 말고.”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다.
밖으로 밀려난 서혜빈은 안칠성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의 대기실로 쏙 들어갔다.
복도에 혼자 남은 안칠성은 유현의 대기실을 바라보았다. 눈빛에는 근심이 담겨 있었다.
‘미안하다 현아.’
유현이 사건을 치르는 것으로 증거를 포착하는 게 핵심 목표.
선생으로서 못 할 짓이었지만, 증거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괜히 본인에게 말했다가는 증거고 뭐고 전부 날아갈 테니까.
‘정말 미안하다. 언젠가는 제대로 사과하마.’
언젠가.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양동길을 확실하게 내보냈을 때.
안칠성은 그때가 오기를 간절히 바랐다. 아카데미를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반드시 그에게 마땅한 벌을 내려야 한다.
‘반드시.’
안칠성은 유현의 방문 앞 복도 벽에 기대어 선 채 시간이 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관중들이 쏟아내는 커다란 열기가 지하까지 들려왔다.
곧 스피커를 통해 방송이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팀 추첨이 있을 예정입니다. 참가자들은 경기장 밖으로 모여주세요.
안칠성이 벽에서 등을 뗐다.
복도에 길게 늘어선 대기실의 문이 하나둘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