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현관을 나서려던 유현은 멈칫했다.
부엌에서 무언가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깜빡했네.”
유현은 부엌으로 가 가스레인지의 불을 껐다.
뚜껑을 열자 뜨거운 수증기가 눈 앞을 가렸다.
손을 휘휘 젓자 수증기가 모두 사라졌다. 냄비를 가득 채웠던 물은 모두 증발했다.
“......너무 오래 끓였나.”
맨손으로 알을 꺼내려던 유현은 손가락에 화상을 입었다.
황급히 수돗물에 손가락을 식히고는 냄비를 뒤집어 알을 꺼냈다.
쿵.
알이 바닥에 떨어지며 묵직한 소음이 울렸다. 껍질에는 실금 하나 가지 않았다.
“안 깨지네?”
유현은 주먹을 쥐고 알을 내리쳤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싶어 한 번 더 내리쳤다.
“윽!”
이번에도 똑같았다.
도리어 고통만 얻었을 뿐 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냥 돌인가?”
유현이 알을 다시 손에 들었다.
역시 돌은 아니다. 이 정도 크기의 돌이 이렇게 가벼울 리 없다.
“대체 뭐지?”
유현은 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채 곰곰이 고민했다.
‘돌은 아닌데, 알처럼 쉽게 깨지지도 않아. 생긴 건 분명 알인데….’
그때, 유현의 뇌리에 문득 한 가지 좋은 생각이 스쳤다.
“그걸 한 번 써보자.”
유현은 옷걸이에 걸어놓았던 아공간 조끼에서 스크롤 하나를 꺼냈다.
오늘 아공간을 정리하기 전까지는 가지고 있다는 것조차 까먹었던 스크롤이었다.
“신성 교회에서 받아온 생명 탐지 스크롤.”
전장에서 생존자를 찾기 위해 만들어진 신성 마법 [생명 탐지]가 담긴 스크롤이다.
신성 마법은 교회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배울 수 있었기에, 애지중지했던 물건이다.
“이걸 쓸 날이 올 줄이야.”
보통 전장에는 신성 교회의 마법사가 동참했기에 쓸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쭉 소장해왔는데 설마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이렇게 내용을 조금 바꿔주면….”
유현은 스크롤에 담긴 내용을 일부 수정했다.
신성 마법의 전문은 모르지만, 스크롤에 적힌 마법의 대상을 수정하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었다.
-대상: 생물, 죽은 생물.
“만약 이게 알이면, 마법이 반응하겠지.”
조건을 수정한 유현은 스크롤을 찢었다.
새하얀 빛이 일어나며 스크롤에 담긴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곧 거실의 커다란 창문 밖으로 하얀빛이 나타났다. 마법의 범위는 시전 위치로부터 반경 500미터. 그 거리 안에 있는 생명체들에 마법이 반응한 것이다.
“효과 있구만.”
유현은 창문 바깥의 반짝거림에서 시선을 돌렸다.
“......”
그의 앞에 놓인 알 역시 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은 살아있는 알이거나, 살아있었던 알이었다.
“......한 장 더 있나?”
아공간을 뒤적인 유현은 곧 같은 스크롤 하나를 더 찾아냈다.
이번에는 스크롤을 수정하지 않아 대상은 살아있는 생물에만 고정된다.
“내가 삶아서 죽인 게 아니길 바란다.”
마지막 남은 생명 탐지 스크롤이지만, 유현은 거침없이 찢었다.
또다시 새하얀 빛이 일어나며 이세계의 마나가 대기로 흩어졌다.
유현은 알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알은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알이구나.”
돌이 아닌 알이었다.
머릿속이 잠시 혼란스러웠으나 유현은 일단 안심하기로 했다. 적어도 삶아서 죽인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이내 혼란스러움이 찾아왔다.
아직 살아있는 알이라면, 언젠가는 깨어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알은 대체 무엇의 알인가?
“마족? 마물?”
마족들은 기이하게도 알을 낳아 개체를 늘린다. 마물들 역시 새끼를 낳는 개체가 있지만, 알을 낳는 개체도 있다.
“마족이나 마물이면 나오기 전에 죽이는 게 맞는데.”
문제는 그런 알이 아닐 경우.
만약 신수나 짐승의 알이라면?
“......”
고민하던 유현은 알을 움켜쥐었다.
있는 힘껏 아귀를 쥐어짰지만, 알은 부서질 기미조차 없었다.
“어우, 안 되네.”
괜히 복잡한 생각을 이어가느니 차라리 부수려고 했다. 하지만 역시나 쉽게 부서지지 않았다.
“그래, 일단 품어보자.”
몇 달 품어보고, 부화하지 않으면 그냥 아공간에 박아두면 된다.
혹여 부화할 경우에는 그 생물체가 뭔지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는다.
“해로운 놈이면 죽이고, 이로운 놈이면 키워야지.”
부화에 가장 중요한 건 온도였다.
유현은 집안 한쪽에 알이 부화할 수 있도록 간이 부화 공간을 만들었다.
고작 종이 상자에 담요를 덮은 게 다지만, 한 번 삶았는데도 살아있으니 이걸로도 충분할 것이다.
“어떤 놈이 나올까.”
이왕이면 작고 귀여운 짐승이기를 바란다. 그래야 키울 수 있을 테니.
***
아카데미의 수업은 어제나 일주일 전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전은 이론, 오후는 실전.
지루한 일과였다.
일탈의 욕구가 마구 치솟는 가운데, 안칠성이 새로운 수업을 공지했다.
“오늘은 온종일 전투 시뮬레이션을 사용할 예정이다.”
전투 시뮬레이션.
스카이 아일랜드에서 개발된 최첨단 훈련 시스템이다.
사용자가 필드로 들어가면 주변의 풍경이 설정에 따라 바뀐다.
설원에서 스노우 예티와 마주할 수도 있고, 사막에서 메가 스파이크와 싸울 수도 있다.
그것들은 모두 가상이지만, 필드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실시간으로 맞물리고 움직이며 모든 감각을 현실과 비슷하게 구현해냈다.
현재 세상에 존재하는 가상훈련 시스템 중에서는 단연 최고로 손꼽혔다.
“여기서도 몇 명 써본 사람이 있겠지.”
몇 사람이 그 말에 반응했다.
아카데미에 도입된 지는 몇 달이 지났지만, 그간 몇 차례 선별 사용이 있었을 뿐, 아직 제대로 수업에 활용된 적은 없었다.
“현이도 한 번 해봤고.”
“하이패스 테스트 때 했던 그거죠?”
“그래. 그때 시설 일부가 일그러지는 바람에 오랜 시간을 들여 더욱 단단하게 업그레이드됐지. 그래서 이제야 쓰는 거다.”
유현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하이패스 테스트의 마지막 단계.
거기서 자신을 가로막았던 철사자의 머리를 집중적으로 타격하여 부쉈었다.
‘그렇게 때렸는데도 일그러지기만 했다니.’
과연 단단한 던전 광석으로 만든 시설다웠다.
거기서 더 강화되었으니 앞으로 주먹질로는 흠집도 나지 않으리라.
“다들 훈련복으로 갈아입고 훈련장으로 집합해.”
지루한 이론 수업을 기다리던 아이들에게 새로운 실전 수업은 축복이나 다름없었다. 모두 들뜬 얼굴로 훈련복을 갈아입었다.
“그동안 이야기만 들었었는데 이제야 써보네.”
신가온이 훈련복을 갈아입으며 말했다. 옆에 있던 한주석이 그 말에 반응했다.
“한 번도 안 써봤나? 내는 해봤는데.”
“신청은 했었는데 뽑히질 않았어.”
기존에는 신청과 추첨으로 시뮬레이션 사용자를 선정했다.
이는 정식 도입 전, 단순히 학생들의 선호도를 조사하기 위함이었다.
“억수로 재밌다. 막 두근두근하제?”
“응. 재밌을 것 같아. 꼭 게임 같다면서?”
신가온이 유현을 돌아보며 물었다.
유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게임처럼 몬스터의 이름이나 체력이 표시되었다.
“호들갑 떨지 마.”
그때 이케가미가 툭 쏘아붙이고는 교실을 나갔다.
한주석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고, 신가온은 어색하게 웃었다.
“점마는 만날 저러네.”
“하하, 이젠 익숙해졌어. 처음에는 좀 짜증 났었는데.”
저렇게 삐딱하게 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닌지 다들 아무렇지 않게 넘겼다.
유현은 문득 이케가미가 저렇게 된 이유가 궁금해졌다.
“쟤 원래 저랬어?”
“응. 학기 초에 전학 왔었는데 그때부터 저랬어.”
“전학? 왜?”
“넌 잘 모르겠구나.”
두 사람은 훈련복을 갈아입고 복도라 나왔다. 함께 훈련장으로 이동하며 신가온이 이케가미의 뒷배경을 설명했다.
“이케가미는 원래 일본에서 살았어. 학교도 일본에 있는 헌터 학원을 다녔고.”
“혼혈이라고 듣기는 했는데 원래는 일본에 살았구나.”
“응. 왜 전학을 왔는지 밝혀진 건 없는데, 다들 대충은 예상하고 있어.”
그 뒤로 이어진 이야기는 꽤 흥미로웠다. 시작은 그가 가진 출생의 배경이었다.
“이케가미는 유명한 헌터의 자녀야.”
그 덕에 어려서부터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또한,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재능 덕분에 특성 활용능력도 탁월했다.
그래서 그를 향한 관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뜨거워졌다.
TV에도 출연하며 연예계와 인연을 맺기도 하고, 부모님을 따라다니며 여기저기로 인맥을 넓히기도 했다.
“아무튼, TV도 나오고 헌터 준비도 하고 그러다가 2년 전쯤에, 일이 터진 거야.”
어느 날. 한창 인기를 몰던 여배우의 열애설이 전파를 타고 세상에 알려졌다.
그 배우의 연애 상대가 바로 이케가미 신이치였다.
“너도 알다시피 배우는 이미지가 생명이잖아.”
해당 배우는 순수하고 청순한 이미지로 자리 잡은 배우였기에 열애설은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그녀가 미성년자였다는 점도 논란에 박차를 가했다.
“잘못하면 은퇴하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
“연애 한 번 한 게?”
“그게 좀 신기하긴 한데, 우리나라랑은 정서가 조금 다르니까 그러려니 해.”
여론은 배우에게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상대가 평소 불량하다는 이야기를 듣던 이케가미라는 점도 한몫했다.
“걔는 옛날부터 그랬어?”
“그냥 소문이었어. 인상이 좀 험악하잖아.”
열애설이 터지고 하루 뒤.
배우가 속한 소속사의 발표가 있었다.
우리 배우는 자신이 원해서 교제를 한 게 아니다. 상대가 사귀지 않으면 얼굴을 망가뜨리겠다는 협박을 했다.
“말도 안 되지?”
“증거도 뭣도 없이 그랬다고?”
“응. 근데 그게 통했어.”
처음에는 여배우에게 공격적인 말들을 쏟아내던 대중의 여론은 순식간에 뒤집혔다. 여배우를 향하던 화살은 온통 이케가미에게 돌아갔다.
“인상이 험악해서 행실이 나쁠 거라는 헛소문 때문에 사람들은 그걸 믿기 시작한 거야.”
그게 진실인지 대중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케가미를 싫어했고, 그들의 적의 덕분에 소속사의 거짓말은 진실이 되어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이케가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사건이었지.”
네가 그러고도 헌터냐, 반은 한국인이라더니 딱 그럴만한 짓을 한다 등.
포화처럼 퍼붓는 대중의 욕설 속에서 이케가미를 보호해주는 건 없었다.
그의 친구들은 등을 돌렸고, 학교에서도 물의를 일으켰다는 핑계로 퇴학당했다.
“부모님은 뭐 하고? 둘 다 유명하다며?”
“그 시기에 두 사람 다 던전형 게이트에 들어갔다고 알고 있어.”
이케가미의 부모는 사건으로부터 한참이 지나,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나서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속사의 거짓말을 부정하고 지켜주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래서 학교를 옮긴 거야?”
“글쎄. 그 사건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지 확실한 건 아니라서.”
“뻔하지 뭐. 퇴학당했다고 헌터를 그만둘 생각은 아니었나 보네.”
유현은 이케가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청소년기의 남녀 둘이 만나 사랑을 한다는 게 뭐가 그리 큰 잘못이라고.
대중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근데 넌 이런 이야기 어디서 들었냐? 맨날 훈련만 하는 것 치고는 되게 자세히 아네?”
“내가 찾아본 건 아니고 사실 나도 철용이한테 들은 거라서.”
“철용이는 또 누구야?”
“걔도 S반인데 몰라?”
안 그래도 몇 명 없는 S반이지만, 유현은 그조차도 관심이 없었다.
“......내가 나중에 알려 줄게.”
두 사람은 훈련장으로 들어왔다.
이케가미가 홀로 중앙에 누워 있었다. 유현은 그의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야, 이케가미!”
이제부터 인사라도 한마디씩 건넬까 하는 마음에 그를 불렀다.
부름에 돌아온 건 길게 뻗은 가운뎃손가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