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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가온은 두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검술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스텝과 템포. 그 외의 동작들은 모두 두 가지 요소 위에 세워진다.
“......”
신가온은 숨을 고르고, 마음을 비워냈다. 머릿속이 복잡하면 제대로 검을 휘두를 수 없다.
연습 때까지 명상을 하냐며 비웃던 이들도 있었지만, 연습도 실전처럼 하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좋아.”
잡생각을 게워낸 신가온은 검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앞에는 보호구를 착용한 훈련용 로봇이 설치되어 있었다.
딸깍.
벽에 붙은 버튼을 누르자 로봇의 얼굴에 빛이 들어왔다.
동력이 돌며 축 처져 있던 어깨가 다시 펴졌다.
-모드를 선택하세요.
신가온은 다시 버튼을 눌러 로봇의 모드를 대련 모드로 바꾸었다.
무기는 검으로 선택했다.
곧 로봇이 자신의 배를 열고 목검을 꺼냈다.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전투를 시작합니다.
로봇은 바닥에 고정된 상태.
할 수 있는 건 상체만을 활용한 회피와 공격이었다.
신가온은 로봇 앞에 섰다.
상대를 인식한 로봇이 곧장 검을 휘둘러왔다.
탁!
신가온이 검을 쳐내고 곧장 검의 방향을 바꿔 로봇의 목을 노렸다.
삐이이이익-!
공격이 적중했다는 효과음이었다.
실전이었다면 상대에게 치명타를 남겼을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난이도 조작을 안 했구나.”
너무나 쉽게 난 결판.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신가온은 버튼을 조작해 난이도를 최고로 높였다. 늘어졌던 로봇이 다시 몸을 일으켰다.
훈련이 재개됐다.
이전보다 더 많은 합이 오갔다.
공격, 방어, 반격.
신가온은 스탭을 밟아가며 호시탐탐 빈틈을 노렸다. 하지만 최고 레벨의 기계적인 반응 속도를 단순히 몸으로만 따라가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역시 전부 막혀.’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지만, 쉬운 상대가 아니다.
단순히 상체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공격은 물론 회피 기동까지 가능했다.
신가온은 마나를 끌어 올렸다.
마나가 전신으로 퍼지며 더 강하고,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신체를 강화했다.
“후읍.”
신가온이 한 호흡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숨을 멈춘 채 증폭된 신체 능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했다.
로봇은 어떻게든 공격을 막아냈지만, 그럴 때마다 신가온의 속도는 더 빨라졌고, 힘은 더 강해졌다.
삐이이이익-!
몇 번의 도전 끝에, 신가온의 검이 로봇의 목에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는 데 서공했다.
로봇의 몸이 다시 축 늘어졌다.
“...좋았어.”
신가온이 거친 호흡을 내쉬며 검을 늘어뜨렸다. 몸풀기로는 조금 과격했지만, 만족스러운 연습이었다.
“훈련 종료!”
그때, 안칠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가온은 버튼을 눌러 로봇을 바닥 아래로 되돌려 보낸 뒤 훈련실을 나왔다.
“지금부터 10분간 휴식하고 대련을 진행하겠다.”
신가온을 비롯한 학생들이 중앙으로 모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들 기진맥진했다.
“그전에 대련 상대를 골라야겠지.”
안칠성이 리모컨을 누르자 벽들이 다시 바닥 안으로 사라지며 대련장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한 사람씩 지목하여 정하겠다. 순서는 등급 테스트 순위로. 유현. 너부터 골라라.”
유현은 큰 고민 없이 한 사람을 선택했다.
“신가온으로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의외의 선택으로 느껴졌다.
잠시 대련장에 정적이 그걸 증명했다.
“야, 진심이야?”
서혜빈이 슬금슬금 다가와 물었다.
“왜? 안 돼?”
“네가 질걸? 쟤가 우리 학교에서 칼 제일 잘 써. 근데 너도 칼 들었잖아. 심지어 초보자고.”
그게 정적의 이유라는 걸 깨달은 유현은 신가온을 돌아보았다.
그는 자리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며 목검을 쓰다듬고 있었다.
“걱정 마. 자신 있어.”
순서 지목은 계속됐다.
메이블은 웬 초록 머리를 골랐고, 이케가미는 한주석을 선택했다.
그 외에도 다들 서로의 상대를 정했다. 총인원이 아홉 명이었기에 한 사람은 자연스레 제외됐다.
“그럼 다들 쉬어라.”
휴식시간이 주어졌다.
유현은 신가온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네가 아카데미에서 제일 검을 잘 쓴다며?”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잘 쓰긴 한다는 거네?”
“조금?”
겸손은 떨지만, 자신감도 있다.
조금 잘 쓰는 게 아니라 아마 서혜빈이 말한 게 사실일 것이다.
‘아카데미 최강 검사라.’
무기에는 상성이 존재한다.
검은 단지 쉽게 접할 수 있고 다루는 게 다른 무기들에 비해 용이할 뿐이지 만능이 아니다.
하지만 제일이라는 칭호가 붙었다면, 신가온이 실력자라는 건 확실하다.
적어도 아카데미 내에서는 모든 상성을 이겨내고 최강의 자리에 올랐을 테니까.
그 강함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기대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쟤는 어쩌려고 저런대? 무기술 대련이면 특성도 못 쓸 텐데.”
“점마 특성 못 쓰면 그냥 시체 아이가.”
두 사람을 보며 서혜빈과 한주석이 이야기를 나눴다.
신가온의 무위를 아는 만큼, 유현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풋.”
그때, 옆에 있던 한서희가 코웃음 쳤다. 타이밍이 너무나 명백했기에 한주석과 서혜빈이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뭐고? 비웃나?”
“돌았냐, 너?”
쿡쿡거리며 입을 가리던 한서희가 웃음을 가라앉히고는 차분히 말했다.
“아직도 유현의 특성이 신체 강화라고 생각해요?”
한서희는 유현의 특성이 신체 강화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방학 때 있었던 협회에서의 사건 덕분이었다.
비록 당시에는 기절했었고, 이런저런 일 때문에 상황 파악이 늦었지만, 협회장과 사람들의 소문을 통해 소식을 들었다.
그가 3km를 80초 만에 주파할 때, 어떠한 마나의 힘도 빌리지 않았음을.
“당신들은 길드 파티 안 왔죠?”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거기 나왔으면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요.”
파티의 참가는커녕 관련된 소식도 들은 게 없었기에 서혜빈은 입술을 깨물었다.
“슬슬 모여라. 시작하자.”
옹기종기 앉아 쉬고 있던 아이들이 대련 필드 바깥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련 룰은 간단하다. 한쪽이 항복하거나 무기를 놓치면 끝. 특성 사용은 불가능하다. 오직 순수한 힘과 기술로만 싸워라.”
안칠성이 유현에게 시선을 주었다.
“너도 힘 좀 빼고 해라. 무기술은 테크닉이 중요하니까.”
“옙~”
무작정 힘과 속도로만 몰아붙여 찍어 누르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럼 첫 번째 대련은 유현과 신가온. 필드 위로 이동하도록.”
두 사람이 새까만 바닥 위로 자리를 옮기자 곧 주변으로 반투명한 방어막이 세워졌다.
순식간에 완성된 중간 크기의 대련장. 유현과 신가온이 대련장의 중앙에 선 채 서로를 마주했다.
“현이가 잘할 수 있을까요?”
“......현이요?”
바깥에 앉아있던 메이블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한서희는 순간 당황하여 되물었다.
메이블이 친근하게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건 처음이었다.
“네. 검술은 처음이잖아요. 바로 당할 것 같아서요.”
“야, 빡대가리. 넌 저 새끼가 검술 못한다고 발릴 것 같냐? 너도 저번에 봤잖아. 맨몸으로도 얼마나 쌘지.”
두 사람의 대화에 이케가미가 끼어들었다.
그 역시 유현이 마나가 없는 상태에서 된통 당했기에 그의 힘이 순수한 육체에서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당신도 알고 있었군요.”
“모르는 연놈들이 멍청… 컥!”
순간 밀려오는 고통에 이케가미가 입술을 깨물었다.
메이블이 이케가미의 사타구니를 주먹으로 가격한 것이다.
“나는 메이블이야. 빡대가리가 아니라.”
“이런 시발….”
이케가미의 몸이 서서히 기울어지더니 앞으로 털썩 엎어졌다.
메이블은 그의 등 뒤에 손을 얹고 특성을 사용했다. 마나가 그의 사타구니를 어루만지며 고통이 옅어졌다.
“허억, 허억.”
상태가 호전된 이케가미가 간신히 호흡을 뱉어냈다.
“다음에는 으깨 버릴 거야.”
“......”
한서희는 입을 꾹 다물고 대련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메이블의 살벌한 모습은 그녀마저도 긴장케 했다.
“두 사람 다 준비됐나?”
안칠성이 마이크를 통해 대련장 안쪽으로 준비 신호를 전했다.
곧장 긍정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럼 시작한다.”
종소리와 함께 대련이 시작되었다.
“잘 부탁할게.”
“드루와.”
신가온이 시작과 동시에 달려들었다.
빠른 보폭으로 거리를 좁히고, 곧장 위에서 아래로 검을 휘둘렀다.
따악!
목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첫 번째 공격이 막혔다.
신가온은 재빨리 검의 방향을 틀어 옆을 쳤다. 두 번째도 막혔다.
신가온이 날아들 반격에 대비해 검을 가까이 당겨왔지만, 유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역시 검이 익숙하지 않은 건가.’
두 번째 공격까지 막은 건 칭찬해줄 만하다. 하지만 그건 기술이 아니라 순발력이 만들어낸 요행일 터.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해볼 만해.’
유현과 싸우고 싶었던 건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유현이라는 아이가 과연 얼마나 강할지 궁금했다.
비록 상대는 무기를 다루는 게 처음이지만, 역시 기본적인 센스는 있었다.
이 정도라면 나쁘지 않은 밸런스다.
신가온은 다시 거리를 좁혀 공격을 몰아쳤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친 공격이 다시 한 번 유현의 방어에 막혔다.
이번에는 누구 하나 검을 떼지 않았다.
두 검은 날을 맞댄 채, 힘을 겨뤘다.
‘기회다.’
신가온이 검에 힘을 살짝 풀자 힘이 잔뜩 실린 유현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신가온은 검을 당겨 그대로 내찔렀다. 가슴팍에 정확히 공격이 들어갔다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올라온 유현의 검이 자신의 검을 쳐냈다.
‘......?’
보고서도 믿기지 않는 엄청난 움직임. 빨라도 너무 빠르다. 하지만 검술로는 자신이 앞선다. 계속해서 몰아붙이면, 결국에는 뚫어낼 수 있다.
신가온은 이를 악물고 다시 폭풍처럼 공격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공격을 성공하지 못했다.
‘뭔가 이상해.’
신가온은 거리를 벌리고 유현과 눈을 마주했다.
쉼 없이 이어진 전투에도 그 시선은 고요했다. 조금의 흥분도, 고양도 보이지 않는 한없이 정적인 상태였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대체 어떻게 자신의 공격을 전부 막아내는 걸까. 분명 상대는 검이 익숙하지 않을 텐데.
‘빈틈이 안 보여.’
초보자라면 으레 보일 법한 빈틈이 유현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필요한 만큼만 움직였고, 그 절도있는 동작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자연스레 한 가지 생각이 번졌다.
‘......초보가 아니야.’
훨씬 높은 경지에 다다른 압도적인 실력의 소유자.
신가온은 자신이 승리할 수 없다는 걸 직감했다.
“이제 내 차롄가?”
신가온이 무어라 대답할 새도 없이 목검이 날아들었다.
따악!
이를 악물고 간신히 막아낸 일격.
손목이 저릿했지만, 고통을 느낄 틈도 없었다. 유현의 공격이 재차 이어졌고, 신가온은 스탭을 밟으며 방어에 집중했다.
‘말도 안 돼.’
그의 공격은 마치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 같았다.
한 번 한 번이 번개처럼 빠르고 치명적이었으며, 그런 공격이 억수처럼 쏟아졌다.
‘...이게 학생의 실력이라고?’
어디서 무슨 훈련을 했길래 이 나이에 이런 경지에 도달한 걸까.
혼란스러운 가운데, 몸은 모든 공격을 막아냈다.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아닌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꽤 잘하는데?”
잠시 공격이 멈췄다.
유현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너 대체….”
“와중에도 웃고 있고 말이야.”
“뭐?”
신가온의 입가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당사자조차 인지하지 못한 웃음이었다.
“한계를 즐기는 놈이구만.”
유현이 말을 끝맺고는 다시 쇄도했다.
그의 접근은 말 그대로 순식간이었다.
순간이동 한 것처럼 코앞에 다가와, 검을 내려친다. 팔이 움직이고, 목검이 아래로 떨어졌다.
‘맞는다.’
그 순간, 신가온의 사고가 가속했다.
시간이 느려진 듯 시야에 담긴 모든 것들이 천천히 다가온다.
신가온은 반사적으로 목검을 틀었다.
직후, 벼락같은 일검이 내리쳤다.
빠각!
부러진 목검이 하늘을 날았다.
신가온은 떨리는 눈으로 자신의 눈앞에서 멈춘 목검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