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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전광판을 바라보았다.
“방금 막 출발한 것 같은데 벌써 들어왔다고?”
“오류 아니야?”
그런 반응은 곧 사라졌다.
사람들이 출발점에 서 있는 유현을 발견한 것이다.
“마, 말도 안 돼!”
“진짜 들어왔어!”
경악. 그 다음에는 의심이었다.
1분 20초만에 3km를 주파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쉽사리 믿지 못했다.
“중간에 돌아온 거 아니야?”
“우우! 제대로 확인해라!”
배성용은 무전을 통해 상황을 전파했다.
부정행위가 있었는지, 터닝 포인트에 체크 된 인물이 있는지 등을 확인했다.
그 결과가 곧 도착했다.
배성용은 씩 웃으며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많이 당황하신 것 압니다! 하지만 부정행위는 없었습니다! 전광판을 보시죠!”
전광판에 드론 카메라 화면이 나타났다. 이전처럼 루트를 내려다보는 구도였다.
“여기 그려진 원이 보이십니까?”
화면 위로 빨간색 동그라미가 나타나 루트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곧 정지된 화면이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원 역시 움직였다.
“10배로 감속한 속도입니다! 이 원 안에서 움직이는 게 바로 1등으로 통과한 저 친구입니다! 더불어 마나를 사용한 흔적 역시 없습니다!”
야유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시각적으로 명확한 결과물.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짜 3km를 고작 80초 만에 통과했다고?”
“말이 돼? 자동차 보다 빠른 거 아니야?”
“누구야! 이름을 알려줘!”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그 정도로 탁월한 신체 능력이라면, 얼굴을 모를 리가 없는데 그들에게 유현은 아주 낯설었다.
“아! 지금 이름을 알아 왔습니다! 바로 유현이라고 합니다!”
사람들 사이로 의문이 퍼졌다.
“유현이 누구지?”
“처음 들어보는데.”
“왠지 익숙하지 않아?”
낯익으면서도 낯선 이름.
배성용은 군중을 내려다보며 추가적인 내용을 덧붙였다.
“아카데미 학생이라고 하네요.”
반응은 즉각 왔다.
“아, 아카데미?”
“아직 학생이라고?!”
“미친!”
학생이라는 사실에 경악하는 사람들.
그들 중 몇 사람은 아카데미와 유현이라는 이름을 연결짓고는, 그 이름을 어디서 알게 됐는지 깨달았다.
“아카데미 유현!”
“나 TV에서 봤어! S등급 된 그놈이잖아!”
“와! 사진! 사진 찍어!”
자리에 서 있던 유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언론에 자신의 기사가 많이 게재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걸 실감할 기회는 없었다.
그런데 오늘 여러 번 그 인기를 체감했다.
“인사라도 해야 하나.”
사람들은 유현을 향해 열광했다.
이전에 있었던 의심들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아카데미의 S등급, 그것도 다른 유명 유망주들을 모두 제친 유현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다.
“야, 저 사람은 한서희 아니야?”
“누구? 어깨?”
“응. 아까 봤던 거랑 옷이 똑같은데.”
“에이, 설마. 누가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저러겠냐?”
“그렇지? 아니겠지?”
유현은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곳곳에서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는 사이 진행요원이 유현을 데리렁 왔다.
“가시죠.”
유현은 사람들에게 마저 손인사를 하고는 진행요원을 따라갔다.
‘얘는 꼼짝도 안 하네.’
유현이 어깨에 들쳐멘 한서희를 흘끗했다. 중간까지는 어깨를 거칠게 두드리던 것 같은데 이제는 움직이지도 않는다.
“상품은 이 방에서 자유롭게 골라가시면 됩니다.”
도착한 곳은 연회장 뒤쪽에 있는 작은 연회 홀이었다.
크기가 있는 상품은 판넬에 표시되었고, 작은 상품은 실물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흐음….”
유현이 고민하던 그때.
한서희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내려…내려주세요….”
“일어났네?”
유현이 한서희를 내려놓았다.
한서희는 바닥을 딛자마자 휘청이더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우욱.”
헛구역질이 나왔지만, 다시 진정됐다. 한서희가 작게 한숨을 쉬며 주저앉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마저 지끈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은데….’
분명 터닝포인트 지점까지는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필름이 끊긴 것처럼 기억이 사라졌다.
‘토할 것 같아.’
아까 먹은 음식들이 다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유현의 달리기는 그만큼 거칠었고, 과격했다.
계속 달렸으면, 정말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갔을지도 모르겠다.
한서희는 한동안 그렇게 넋을 놓고 앉아 있었다. 그녀가 상황을 파악하고자 한 건 그로부터 몇 분 뒤였다.
‘여긴 어디지?’
처음 와보는 낯선 장소.
곳곳에 이벤트의 상품이 놓여 있는 걸 보고 나서야 유현이 결승선을 통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잠깐만, 그럼 그 사람은….’
한서희는 급히 일어났다.
곳곳에 빈자리가 보이는 상품들.
그녀는 곧장 전세기 판넬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없어.’
자신이 넋을 놓고 있던 사이, 유현이 이미 챙겨간 것 같다.
순간 짜증이 치솟은 한서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짜증도 나고, 화도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전세기는 나중에 원 없이 태워줄 테니 곰인형을 고르자고 미리 말하는 건데.
“하아.”
한서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른 통과자들이 그녀를 알아보고는 고개를 돌렸지만, 한서희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이윽고 그녀는 다시 한번 주저앉았다. 테디베어가 놓여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었다.
‘......’
깊은 좌절감이 그녀를 휩싸았다.
몇 년을 구해도 코빼기 하나 안 보이던 물건을 이리도 쉽게 놓쳐버리다니.
“유현...”
그녀의 좌절감은 곧 유현을 향한 분노로 뒤바뀌었다.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이건 적당히 참고 넘길 수 없었다. 아무리 그라고 해도 너무 몰상식한 행동이었다.
미리 말을 안 한 자신의 잘못도 있지만, 그래도 함께 얻는 상품이라면 적어도 상의는 하는 게 상식 아닌가.
‘자기 마음대로 날 들쳐 멘 것도 그래.’
하나하나 생각할수록 한서희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그동안 유현이 해왔던 무례한 언행들. 괜히 지적했다가 다른 길드로 가버릴까 걱정되어 꾹 참아왔다.
하지만 오늘은 도가 지나쳤다.
확실하게 말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한서희는 마음을 굳게 다지고는 연회 홀을 빠져나왔다.
마침 복도 저편에서 유현이 걸어오고 있었다.
“일어났네!”
한서희는 인상을 잔뜩 쓴 채 걸음에 힘을 주었다.
평소와 다른 그녀의 모습에 유현은 걸음을 멈췄다.
‘왜 저렇게 죽일 듯이 오냐.’
유현은 그녀가 풍기는 짙은 마나와 살기를 느꼈다.
일단 자리를 피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는 사이, 한서희가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유현.”
“으, 응?”
“나랑 장난해요?”
유현은 말없이 눈동자를 굴리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네가 뭣 때문에 화났는지 잘 모르겠거든….”
“왜 마음대로 남의 몸에 손을 대요?”
유현이 눈치를 살피며 답했다.
“...안 그러면 실격당하니까.”
“손을 잡아도 됐잖아요.”
“그럼 느리잖아.”
“그렇다고 사람을 짐짝처럼 들쳐메면 안 되죠!”
지나가는 사람들이 두 사람을 보며 수군거렸다.
평소라면 이미지 때문이라도 조곤조곤 이야기 했겠지만, 잔뜩 화가 난 한서희에게 그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당신이 했던 무례한 언행들. 그동안 많이 참았어요. 그런데 오늘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어요.”
“막 들쳐 멘 건 미안해. 근데 여기서 계속 이러기보다는….”
“그것만 미안해요? 나랑 상의도 없이 마음대로 상품으로 전세기 고른 건요?”
사실 그게 한서희가 화난 가장 큰 원인이었다.
“나 전세기 안….”
“네! 전세기! 그깟 전세기가 그렇게 타고 싶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한서희는 거기서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한 번 올라온 감정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내가, 내가 그걸 얼마나 가지고 싶었는데….”
유현은 한서희를 보며 뒤통수를 긁었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흥분한 건 처음 봤기에 굉장히 난감했다.
“야, 일어나봐.”
“......”
“안 일어나?”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꼼짝도 하지 않는 한서희. 철없는 어린아이가 고집을 부리는 것 같았다.
“그 인형이 그렇게 갖고 싶어?”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 인형을 모으셨어요.”
어릴 때 돌아가신 어머니는 유품으로 인형을 남겼다.
그 인형으로 함께 놀았던 기억이 있기에 그녀도 인형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인 소장 욕구도 있었지만, 어머니와의 짧은 추억을 계속 기억하고 싶었다.
“......”
이야기를 들은 유현은 말없이 한서희를 내려다보았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건 또 새로운 모습이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화내서 미안해요.”
잠깐 사이에 자기반성이라도 한 걸까. 한서희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포션 레시피는 나중에 제가 연락 드릴게요. 그럼 오늘은 이만….”
“이거 필요 없어?”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려던 한서희가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까 말하던 인형이 이거 맞지?”
유현이 그녀를 향해 테디베어를 흔들었다.
한서희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걸 어떻게….”
“협회장님이랑 얘기하는 거 들었어.”
“저, 전세기는요?”
“전세기야 언젠가는 탈 수 있을 거 아냐. 근데 이건 쉽게 못 구하는 것 같던데.”
침울했던 한서희의 낯빛이 급격히 밝아졌다.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설핏한 미소가 입가에 그려졌다.
“혹시 저한테 주는 건가요?”
“갑자기 태도가 바뀐다?”
“......”
한서희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꼬리를 억지로 내렸다.
조금 전, 화가 나 제멋대로 소리친 걸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해졌다.
아무리 가지고 싶었던 것을 코앞에서 잃었다지만, 이런 식의 방법은 화풀이밖에 되지 않았다.
감정에 치우쳐서는 안 되는 자리에 있는 그녀에게는 크나큰 실책이었다.
“미안해요.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안 주셔도 돼요.”
“농담이야, 인마. 자, 가져라.”
유현이 들고 있던 인형을 한서희에게 던졌다.
무방비로 서 있던 한서희는 허둥지둥 날아오는 인형을 붙잡았다.
“막 던지면 어떡해요…!”
“받았으면 됐지.”
유현이 몸을 돌려 파티장으로 돌아갔다. 한서희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고마워요!”
고요한 복도로 울려 퍼지는 음성.
유현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을 휘저었다.
“정말 고마워요….”
두 번째 인사는 그녀의 혼잣말이었다. 왜 전세기를 포기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이상한 사람이야.”
한서희는 인형을 품에 꼭 껴안은 채, 복도를 벗어났다.
한편, 파티장으로 향하던 유현은 파티장에 직행하는 대신 화장실에 들렀다.
돈가스를 더 먹기 위해, 특성인 소화 가속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흡.”
유현이 정신을 집중하고 특성을 발동했다. 소량의 마나가 빠져나간 직후, 뱃속에서 신호가 왔다.
“끄으….”
미리 변기에 앉아 있던 유현은 시원하게 속을 비웠다. 하지만 아직 많은 양이 들어차 있다.
다시 한번 특성을 사용하기 전, 유현은 숨을 골랐다.
‘점수 제대로 땄어.’
유현은 조금 전 일을 생각하며 씩 웃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전세기를 포기한 건 아니었다. 단지 좀 더 먼 미래를 봤을 뿐이다.
‘한서희랑 친해지면 전세기 얻어 타는 건 일도 아니지.’
어쩌면 전세기 하나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게 안 되더라도 한서희는 장기적으로 이용할 구석이 많다.
“크크큭.”
낮은 웃음소리가 화장실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