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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여러분.”
길드 파티는 협회장 최칠기의 무대 인사로 막을 올렸다.
“생각보다 많은 분이 참여해주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전년보다는 줄었지만, 그래도 기대 이상의 참여율이었다.
“길드 파티는 다들 아시다시피 친목을 위한 행사입니다. 대형 길드와 중소형 길드가 가릴 것 없이 여러 대화를 주고받는 장소이죠.”
최칠기는 짧게 길드 파티의 목적에 대해 설명했다.
기본적인 의도는 친목. 거기서 더 나아가 상호 간의 도움을 주고받으며 궁극적으로는 헌터 생태계의 발전과 평화 유지를 목표로 하는 행사였다.
“참고로 오늘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한 시간 뒤에 진행되며 현장에서 참가를 받을 예정이니 그동안 준비된 식사를 맛있게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최칠기가 무대에서 내려가고, 본격적으로 파티가 시작되었다.
장내에 가벼운 팝송이 흘러나오며 가라앉았던 분위기를 띄웠다.
음식은 뷔페 형식으로 준비되었다.
배정받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음식을 가져오기 위해 움직였다.
“밥 먹자~”
구석 테이블에 앉아 있던 유현 일행도 음식을 가지러 이동했다.
유현은 천천히 음식들을 살폈다.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음식들.
일식, 중식, 양식은 물론이고 처음 보는 생소한 요리도 많았다.
먹어본 것 보다 못 먹어본 게 많았기에 유현의 고민은 길어졌다.
“흠......”
음식 앞을 서성거리던 유현은 결국 익숙한 메뉴 앞에서 멈췄다.
“구관이 명관이지.”
유현이 돈가스의 집게를 집은 순간.
누군가의 손이 유현의 손등 위로 올라왔다.
“어머. 죄송합….”
유현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숙이려던 한서희가 상대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췄다.
“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내가 먼저 집었어.”
“네?”
“집게 내가 먼저 집었다고. 방금 봤잖아. 내 손이 밑에 가 있고 네 손이 위에 있는 거.”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어허, 순서 지켜야지.”
드라마에서 일어났다면 운명적인 만남이었겠지만, 이곳에 로맨스는 없었다. 한서희는 한숨을 쉬며 한 걸음 물러났다.
“제가 그렇게 몰상식한 사람은 아니에요.”
떠들거나 말거나 유현은 접시에 돈가스를 담았다.
“그것보다 대체 왜 여기 있어요? 이건 길드 이벤트잖아요. 나랑 약속한 거 잊었어요? 길드 들어가게 되면 우리 길드로 먼저 온다고 했잖아요.”
유현이 돈가스 위에 소스를 뿌렸다.
정확히 세 등분으로 나눠 양념 치킨소스, 매운 소스, 일반 돈가스 소스를 균등하게 담았다.
“자, 너도 담아.”
“......”
“안 먹어?”
“내 이야기 안 들었죠?”
유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라 했지?”
“...줘요.”
한서희는 집게를 받아들고 접시에 돈가스를 담았다.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먹어야지. 듣지도 않고.”
한서희가 짜증스럽게 돈가스를 옮겼다. 튀김가루가 사방으로 튀었다.
“야, 좀 살살 담아.”
“싫은데요?”
“......”
평소와 다른 모습에 유현은 당황스러웠다.
“...내가 뭐 잘못했나?”
“그걸 모르는 것도 잘못이에요.”
그 순간, 유현은 왠지모를 기시감을 느꼈다.
한서희가 뱉은 말이 어딘가 익숙했다.
‘이거 어디서 읽었는데.’
예전에 읽었던 로맨스 만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분명 거기에도 상대 캐릭터가 이유 없이 화내던 장면이 있었다.
‘알고 보니 이유가 없던 건 아니었지.’
그 이유는 바로 상대의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 솔직히 잘 이해는 가지 않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설마 내가 그런 상황을 맞닥뜨릴 줄이야.’
유현은 냉기가 흐르는 한서희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머리가 예쁘네.”
“......?”
고개를 갸웃거리는 한서희를 보며 유현이 아차했다.
이런 칭찬은 디테일이 생명이라고 만화에서 읽었다. 디테일 없는 칭찬은 팥 없는 단팥빵이나 마찬가지라고 비유하여 공감할 수 있었다.
“비단 같은 머릿결을 위로 땋아 올렸네. 곱다, 고워.”
“......”
“옷도 예쁘구나. 라인이 잘 잡혀 있고, 무릎 위에서 밑단이 끝나 매끈한 다리가 드러나니 아름답고 매혹적이야.”
“......자꾸 뭐라는 거에요?”
한서희가 유현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엥? 이거 아니야?”
“뭐가 아닌데요?”
“내가 못 알아봐서 화난 줄 알았지.”
“하…….”
한서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됐는지 파악하려니 정신이 아찔해졌다.
“이렇게 서 있지 말고 따라와요. 앉아서 얘기하게.”
유현은 얌전히 한서희를 따라갔다.
도착한 원형 테이블은 다른 곳과 달리 텅 비어 있었다.
“앉아요.”
“말해. 이번에는 제대로 들을게.”
“여긴 길드 파티에요. 길드 관계자가 아니면 올 수 없는 곳이라고요. 우리가 맺었던 계약 벌써 잊었어요?”
유현이 돈가스를 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억하지.”
“그럼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건지 해명해요.”
“음...”
유현은 입안에 든 돈가스를 마저 씹었다.
그 태연한 모습에 한서희는 짜증이 치솟았다.
“당신은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네요.”
유현은 음식을 모두 씹어 넘긴 뒤에야 입을 열었다.
“정식으로 길드에 들어가진 않았어.”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길드랑 계약은 안 맺었어.”
“계약은 안 맺었지만 어떤 길드와 관계는 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요.”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랑 일을 하나 하고 있어. 여기 온 건 길드 마스터가 초대해서 온 거고.”
“계약 안 된 건 확실하죠?”
“계약서 쓰지도 않았어.”
한서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여전히 의심을 지우지 않은 눈치였다.
“어떤 길드에요? 하고 있다는 일은 뭐고요?”
“뭘 그렇게 자꾸 물어보냐.”
“계약 안 했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지금의 질문은 단순한 불안감의 표출이었다.
만약 관계를 맺은 게 다른 대형 길드라면, 향후 유현의 거취가 그쪽으로 기울어질지도 모른다.
“야, 일단 먹어.”
유현이 포크로 돈가스를 집어 한서희의 입에 가져다 댔다.
한서희는 사나운 눈으로 유현을 바라보더니 입을 벌려 돈가스를 먹었다.
바삭했다.
“뭐, 뭐하냐?”
그때, 두 사람 사이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강찬성이 경악한 얼굴로 서 있었다.
“오, 어떻게 알고 왔냐?”
“아, 아니. 뭐하냐니까?”
강찬성의 반응에 유현은 도리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서희도 벌써 그럴 나이가 됐구나.”
유현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체격은 건장하나 얼굴에는 주름살이 가득한 노인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구세요?”
“야, 협회장님이잖아...!”
강찬성의 답에 유현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이 협회장.’
나이에 맞지 않게 풍기는 기세가 남다르다. 과연 협회장이라는 직함에 걸맞는 위용이었다.
“협회장 최칠기입니다.”
“유현이에요.”
두 사람은 가볍게 악수했다.
“유현이라. 낯익은 이름이군요. 혹시 아카데미...?”
유현이 씩 웃으며 코를 쓱 닦았다.
“그게 바로 접니다.”
최칠기가 눈을 크게 떴다.
유현. 그동안 소문만 무성하던 인물.
아무런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기에 어떤 사람일지 줄곧 상상만 했었다.
“이거 놀라운 우연이네요. 한번 보고 싶었는데, 설마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최칠기가 양손으로 유현의 손을 붙잡았다. 진심으로 반가운 눈치였다.
“크흠.”
갑자기 들려오는 헛기침에 최칠기가 고개를 돌렸다.
한서희가 은근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둘이서 먼저 얘기하고 있었지? 아카데미에서 친했나 봐요?”
“자주 봤죠.”
“교실도 달랐을 텐데 자주 봤다는 건….”
역시 조금 전에 봤던 광경처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건가.
“저 친구가 맨날 하위 클래스 건물에 와서 혼자 있었거든요. 친구가 없나 봐요.”
“아….”
“가면 맨날 있어. 내가 그래서 거기서 쉬질 못해.”
한서희가지지 않겠다는 듯 반론했다.
“그건 내가 먼저 왔으니까 당신이 다른 데로 가는 게 맞죠.”
“거기가 우리 건물인데 내가 어디로 가냐?”
두 사람을 보며 최칠기가 피식 웃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상상했던 그런 관계는 아닌 것 같았다. 둘 사이에서는 어떠한 애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제가 괜한 오해를 했군요.”
최칠기가 의자를 빼 한서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앉으시죠.”
“아, 예!”
뒤에서 멍청히 서성이던 강찬성도 유현의 옆에 앉았다.
그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유현에게 속삭였다.
“뭐야, 둘이 무슨 사이야. 뭔데 그렇게 먹여주고 그래?”
“쟤가 하도 떠들어대서 입 좀 다물게 하려고.”
“거짓말. 너 저분 누군지 몰라? 자칫하면 어디 뒷골목에서 변사체로 발견될지도 몰라.”
“에이, 내가 그래도 멀쩡한 사람은 안 죽이지.”
“아니, 저쪽 말고 너 말이야, 인마!”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강찬성은 뒤늦게 최칠기의 눈치를 살폈다.
최칠기는 감탄이 담긴 눈으로 유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발이 넓으시네요. 서희와도 알고, 이분과도 아는 사이라니.”
“우연입니다, 우연.”
“그런 우연이 겹친 것도 참 신기합니다.”
최칠기가 작게 웃고는 강찬성에게 눈을 돌렸다.
“자기소개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강찬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저는 마망의 길드 마스터 강찬성이라고 합니다.”
마망이라는 말에 한서희가 눈을 빛냈다.
“마망이면 유마망의 모길드 맞죠?”
“아…. 예! 맞습니다!”
“반가워요. 꼭 한번 만나보고 싶었어요.”
강찬성이 허리를 숙이며 한서희가 내민 손을 덥썩 붙잡았다.
“저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포션 관련해서 많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 송진 그룹도 포션 쪽으로 관심이 많거든요.”
“......예.”
포션 이야기가 나오자 강찬성의 기세가 눈에 띄게 가라앉았다. 한서희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네?”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지신 것 같아서요. 자리가 불편하시면 다른 곳에서 이야기해도 괜찮아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마, 말씀하시죠!”
“잠깐만요. 그 전에….”
한서희가 슬쩍 유현에게 시선을 주었다. 유현은 정신없이 돈가스를 먹고 있었다.
“얘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이 친구가 일을 좀 도와주고 있습니다.”
“아, 그럼 혹시 오늘 이 사람을 초대한 게...”
“네, 제가 초대했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퍼즐이 맞춰졌다. 한서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런 작은 길드라면 일을 얼마나 도와주든 안심이었다.
“저기, 이제 자리 좀 비켜줄래요? 당신도 자리 있을 거 아니에요.”
한서희가 식사 중인 유현에게 말했다.
“왜. 나도 들을래.”
“들어도 모르잖아요. 빨리 가요.”
그 말에 순순히 일어나는 유현.
강찬성이 다급히 유현을 붙잡았다.
“가, 가지마.”
“들어도 모를 거라는 데 가줘야지.”
한서희는 그 모습을 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왜 그래요? 보내지 말까요?”
“예? 아, 그게...”
강찬성이 유현의 눈치를 살폈다.
“말해도 되냐?”
“상관없어.”
강찬성이 비장한 얼굴로 한서희를 바라보았다.
“그게 사실...”
밝혀지는 진실.
식사 중이던 최칠기가 손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포, 포션을 만드는 게 이 친구라는 겁니까?”
당황한 최칠기를 향해 강찬성이 긍정의 뜻을 보냈다.
“...맞습니다.”
한서희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한술 더 떠 눈빛에 초점까지 사라졌다.
“말도 안 돼….”
“진짭니다. 포션 설계부터 제조까지 이 친구가 다 하고 저는 그냥 길드 이름 빌려주고 영업하러 다닙니다.”
자리에 침묵이 찾아오고, 음악 소리만이 시끄럽게 들려왔다.
모두의 생각이 멈춘 지금.
먼저 고요를 깬 건 유현의 장난 섞인 목소리였다.
“자~ 그럼 들어도 이해 못 할 무식한 놈은 먼저 가겠습니다~”
“미,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