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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일어나고 며칠 뒤.
한성제약의 포션 공장이 강도에게 털렸다는 사실이 뉴스를 통해 대대적으로 공표되었다.
사건을 묻기 위해 한성제약 측은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내부자의 고발로 모조리 까발려졌다.
그 덕에 그들은 회사 내외로 때아닌 홍역을 앓았다.
포션의 수요를 맞출 수 없게 되어 위약금을 내야 했고, 연구비를 쏟아부은 포션 샘플도 모두 잃었다.
주가가 바닥을 치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피해가 막심한 만큼, 한성제약은 범인을 찾기 위해 공권력과 사적 용역을 활용했다.
하지만 수사는 시작부터 오리무중이었다.
헌터가 벌인 짓이 분명한데 어디에도 특성을 사용한 흔적이 남지 않았다.
또한, CCTV 자료는 서버가 통째로 초기화되는 바람에 모두 날아갔으며, 목격자들 역시 하나 같이 가면 이야기만 했다.
사원들을 대상으로도 수사가 이어졌다. 그날 해당 시간대에 머물렀던 직원들과 잡혀있던 영업 계획들을 조사했다.
거기서도 소득은 없었다.
직원들은 알 리가 없었고, 영업 계획과 관련된 데이터들도 모두 소멸되었다. 내부자가 있다는 심증은 포착했지만, 그게 누구인지 알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한성제약의 몰락에 박차를 가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조사 과정에서 대표를 비롯한 임원들의 비리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국내는 물론 해외 기업과 주고받은 비자금. 법인재산을 사적으로 활용하고, 정치권에도 온갖 뇌물을 찔렀다.
그 외에도 분식회계나 불법 영업 등 수많은 범죄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사회적인 파장이 거세졌으며, 한성제약에는 범죄 집단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관계자들은 처벌을 받았다.
왕대길 역시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억울하게 누명을 입었다는 주변의 증언 덕에 벌금 선에서 끝났다.
“잘렸습니다.”
“차라리 들켜서 다행이네요. 이 타이밍에 사직했으면 수상했을 텐데.”
“영업이도 같이 잘렸습니다. 제가 꽂아준 게 들켰어요.”
“그것도 다행입니다. 신입이라고 의심에서 벗어날 순 없으니까.”
넓은 거실.
대리석 바닥 위에 놓인 소파에 유현과 왕대길이 마주 앉았다.
사건이 일어난 뒤, 처음으로 가지는 만남이었다.
“그래서 김영업은 어딨습니까?”
“일단 집에 뒀습니다.”
“잘 둘러대셨죠?”
“예. 그때 머리를 내려친 게 어떻게 보면 다행인 것 같습니다.”
김영업은 그날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유현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강찬성도 마찬가지였다.
“흐아암.”
그때, 강찬성이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막 일어났는지 부스스한 머리.
눈꺼풀에는 아직 눈곱이 남아 있었다.
“......아, 뭐야.”
그가 거실에 있던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왜 또 우리 집에 있냐?”
“우리 집 가긴 좀 그래서.”
한숨을 쉬는 강찬성.
하지만 별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있었던 일이니 더 말해봤자 입만 아팠다.
“저기, 그래서 앞으로는 어떡하면 됩니까?”
왕대길의 질문을 받은 유현은 볼을 긁적였다.
자신이라고 명확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포션을 팔자는 제안은 고육지책이었을 뿐 더 장기적인 플랜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한성제약이 몰락할 것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포션 팔이라….’
한성제약이 없다면, 그 빈자리를 노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귀찮아.’
포션을 만들고 파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유현은 좀 더 이 방학을 여유롭게 즐기고 싶었다.
“흐음...”
잠시 침음하던 유현은 품속에서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이게 뭡니까?”
유현이 건넨 수첩을 받아든 왕대길이 고개를 갸웃했다.
“포션에 필요한 재료입니다.”
“처음 보는 재료인데요.”
“그게 없으면 저는 포션을 만들 수 없습니다.”
판대륙에서 얻었던 재료니 어차피 지구에서는 구하지 못할 재료다.
여기서 딱 잘라내면 왕대길도 더 귀찮게 달라붙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신고한다고 협박을 하면, 배짱을 부리면 된다. 당신이 재료를 못구해 와서 못 만드는 거라고.
“아, 아예 없는 건 아니군요. 만트라의 뿌리. 이건 구할 수 있습니다.”
“......예?”
“다른 것들은 각 재료의 효과를 알려주시면 재량껏 구해보겠습니다.”
만트라의 뿌리.
그것 역시도 판대륙에 존재하던 재료다.
“그걸 정말 구할 수 있다고요?”
“예? 예예. 흔한 재료는 아니지만, 다른 것들처럼 처음 들어보는 재료는 아닙니다.”
유현은 수첩을 빼앗듯 가져와 다시 글씨를 휘갈겼다.
“그럼 이것들은 들어봤습니까?”
수첩을 들여다보는 왕대길.
그의 눈썹이 구부러졌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몇 개는 들어봤습니다.”
“......”
유현이 소파에 등을 기댔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대체 이것들이 왜 지구에 존재하는 걸까.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단순한 우연일까?
하지만 우연으로 치부하고 넘어가기에는 석연치 않았다.
“아는 재료들부터 좀 구해주세요. 돈은 드리겠습니다.”
“아, 예.”
생각할 수 있는 가설은 하나뿐이었다. 그냥 이름이 똑같을 뿐, 판대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름이 중복된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다음에는 이쪽 주소로 오세요.”
유현이 수첩에 주소를 적어 찢어주었다.
“여긴 어딥니까?”
“작업실입니다.”
***
왕대길과 헤어진 유현은 최근 구한 작업실로 향했다.
포션의 구조를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둔 공간이었다.
“어제 20번까지 했었지.”
유현이 보관용 냉장고를 열어 21번이라는 스티커가 붙은 포션을 꺼냈다.
그리고 그대로 원샷.
씁쓸한 맛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크으~”
목구멍이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유현은 그 감각에 정신을 집중하며 손끝으로 마나를 발현했다.
이윽고 허공에 그려지는 흐릿한 마나의 형태. 포션의 구조였다.
“흐음….”
수많은 재료와 재료가 연결되며 일어난 마나 반응. 그것들이 뒤엉키며 어떤 단계를 이루었고, 궁극적으로 어떻게 효과를 냈는지 등.
유현은 시각적으로 나타난 포션의 구조를 보며 여러 정보를 파악했다.
“이것도 꽝이군.”
마나 재구조화 가속에 사용할만한 구조는 아니었다.
유현은 허공에 손을 저어 마나를 대기 중으로 돌려보낸 뒤, 다시 냉장고를 열어 다음 포션을 꺼냈다.
그 과정이 한참이나 반복되었다.
허공에 마나가 그려지고, 흩어지고.
그렇게 31번 포션을 꺼내 들었을 무렵, 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강찬성에게 온 전화였다.
“어, 왜.”
강찬성과 이야기가 오갈수록, 유현의 표정은 똥을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거 꼭 가야 해?”
-너 가면 네 동생도 갈 수 있어. 어때? 이건 진짜 길드 마스터다운 일이라서 동생한테 도움도 될 거야.
그 말에 유현이 고민했다.
확실히 길드에 소속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라면, 유희연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뭐 가서 일하고 그런 건 아니지?”
-전혀 아니야. 뭐 길드원이라고 소개할 것도 아니고, 그냥 네 동생 생각나서 부른 거야.
“...걔 아직 미성년자다?”
-어허이! 나도 여자친구 있어!
“그건 몰랐네. 그냥 아무거나 입고 가면 되지?”
-어. 그냥 적당히 차려입기만 하면 돼.
유현이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이 새끼 이거 포션은 내가 구해왔는데 부려먹네.”
강찬성의 전화는 1년에 한 번씩 헌터 협회가 주최하는 파티의 초대였다.
서로 다른 길드의 사람들이 모여 친목을 도모하거나 사업적인 대화를 나누는 자리라고 한다.
확실히 길드 마스터를 꿈꾸는 유희연에게는 도움이 될만한 기회였다.
-동생아. 오빠가 널 위한 자리를 만들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집에가서 해주마.
유현은 유희연에게 메시지를 하나 보내두고는 다시 포션을 마셨다.
“우웩.”
앞으로 몇 주는 더 걸릴 것 같았다.
***
뜨거운 태양이 도심에 드리웠다.
도로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고, 사람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움직였다.
한서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아…….”
횡단보도 앞.
한서희가 깊게 눌러쓴 모자를 슬며시 올렸다. 새카만 머리칼이 땀에 젖어 피부에 달라붙었다.
“덥다.”
짧은 바지와 반팔을 입었지만, 더위는 가시지 않았다.
비단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모자에 마스크까지 착용하고 있었으니까.
‘할아버지는 왜 혼자 오라고 하신 거지?’
아카데미의 방학 이후 그녀는 쉬는 날이 없었다. 길드와 관련된 업무를 배워야 했으며, 그렇지 않은 날에는 훈련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맞이한 오랜만의 휴일.
이날을 위해 그녀는 지난 며칠간 시간이 날 때마다 너튜브에 들어가 귀여운 동물 영상을 저장했다.
오늘은 그 영상을 침대에 누워 여유롭게 관람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할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전할 게 있으니 혼자 회사로 와라.
그래서 혼자 집을 빠져나왔다.
‘그냥 전화로 말하면 될 텐데 무슨 일 있으신가?’
보행 신호가 바뀌었다.
한서희는 속으로 할아버지의 의중을 생각하며 송진 그룹의 사옥으로 향했다.
“저 사람 한서희 아니야?”
“에이, 설마.”
회사에 가까워지니 간간이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이 생겼다.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있었지만, 은은히 풍기는 분위기마저 가리지는 못했다.
한서희는 걸음을 재촉하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 살 것 같다.”
건물 내부는 찬 공기로 가득했다.
한서희는 저도 모르게 모자를 벗었다. 곧장 주변에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야, 한서희다.”
“헐, 나 실물은 처음 봐.”
송진 그룹 회장의 외손녀이자 언젠가는 회사를 이끌어나갈지도 모르는 인물.
동시에 한서희는 SNS 스타였다.
전략적 차원에서 운영하는 기업용 계정이나 다름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그녀의 외모에 이끌렸다.
“예쁘긴 예쁘네.”
“무슨 연예인 같다.”
“가서 사진 찍어달라고 할까?”
관심은 곧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한서희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이곳이 일터인 탓에 다들 아직은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지만, 언제 자신의 주변을 둘러쌀지 모른다.
“무슨 일로….”
안내데스크의 직원은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할아버지…. 회장님이 말씀 안 하셨나요?”
“잠시 기다려주십쇼.”
직원이 초조한 얼굴로 컴퓨터를 두드리길 잠시. 한서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미리 하달된 내용은 없습니다.”
“...그럼 그냥 들어갈게요.”
“예!”
사실 약속의 여부는 중요치 않았다.
그녀가 어떤 볼일로 왔건 여기서 그녀의 출입을 제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엘리베이터 대기해놓았습니다.”
“고마워요.”
“직접 모시겠습니다.”
“괜찮아요. 혼자 갈게요.”
한서희가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올라갔다.
회장실이 위치한 층이었지만, 공간이 넓은 탓에 다양한 업무 공간도 혼재했다.
‘점심시간인데 사람이 많네?’
한서희가 복도를 걸으며 양쪽에 있는 유리창 너머를 훑었다.
다들 식사도 거른 채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정해진 시간을 넘어가면서까지 일하는 게 딱히 좋아 보이진 않지만, 사정을 모르기에 그냥 지나갔다.
똑똑.
한서희는 회장실 벨을 누르는 대신 문을 두드렸다. 곧 안쪽에서 회장의 비서가 나왔다.
“아가씨?”
“할아버지가 불러서 왔어요.”
“아, 그러시군요.”
한서희는 비서실로 들어와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곧장 회장실의 문을 열었다.
“할아….”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한서희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서희 왔구나.”
“왜, 왜 그러고 계세요?”
백발의 남자가 웃통을 벗은 채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있다.
남자는 그 상태로 윗몸일으키기를 몇 번 하더니 덤블링하며 바닥에 착지했다.
복근이 선명한 건장한 육체.
눈빛은 형형했고, 전신에서 강인함이 넘쳤다.
범상치 않은 노인의 이름은 한정수.
나이 70을 넘은 송진 그룹의 창립자였다.
“요새 일이 바빠 운동을 못 해서 좀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 다치시면 어쩌시려고요.”
“그럼 우리 손녀가 보살펴 주면 되지.”
한서희가 한정수의 팔을 꼬집었다.
“장난치지 마세요.”
“안 보살펴 줄 거냐? 그럼 이 할아비가 아주 섭섭한데.”
“그게 아니라 다치지 마시라고요…!”
한정수가 한서희를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알았다. 알았어.”
“근데 오늘은 왜 부르신 거예요? 전화로는 못 하는 이야기에요?”
“네가 오늘은 스케줄 없다고 해서 이야기도 하고 얼굴도 보려고 불렀다.”
“그럼 혼자 오라는 말은 빼시지. 밖에 엄청 더워요.”
“성욱이랑 같이 오면 그놈이 또 이것저것 간섭해서 안 된다. 그놈은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면서 네가 아직도 어린 앤 줄 알아.”
한정수가 옷을 챙겨입고는 책상에서 웬 종이 봉투 하나를 한서희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협회 잔치 초대장이다. 매년 하는 행사.”
“이건 삼촌이 가는 데 아니에요?”
“그 삼촌이 해외 출장 때문에 참여를 못 한다는구나. 그러니 네가 대신 가봐.”
한서희는 책상 위에 조용히 초대장을 내려놓았다.
“안 갈래요.”
“어리광부리지 마라.”
“어리광이 아니라요. 저는 아직 이런 행사에 참가할 자격이 없어요. 길드 단장도 아니고, 부단장도 아니잖아요.”
한정수가 피식 웃으며 한서희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단장도 없고, 부단장도 없는 지금, 가장 많은 권한을 가진 건 너란다. 네가 누군지 똑똑히 기억해야 해.”
부단장 대리.
지금의 한서희가 길드에서 달고 있는 예비 직함이었다.
“하지만 정식 임명된 건 아니잖아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네가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은 너를 한 길드의 대표로 받아들일 거야. 그러니 자신감을 가져라.”
길드의 대표.
그 말이 한서희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불안함이 드는 동시에 인정받은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알았어요.”
대답하는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정수 역시 그녀의 미소를 보며 따라 웃었다.
“점심 아직 안 먹었지?”
“네. 같이 먹어요.”
두 사람은 함께 회장실을 빠져나갔다.
“그나저나 우리 손녀는 연애 안 하나?”
굵은 목소리가 곧 새된 비명을 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