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한 시간 전.
S등급 기준 포인트를 충족한 유현은 여유롭게 산으로 향했다.
훌쩍 뛰어갈 수도 있었지만, A등급의 환경이 모험심을 자극해 도보를 선택했다.
기존의 다듬어진 길을 벗어나 게이트로 향하던 것도 일종의 모험심이었다.
그러다가 심상치 않은 풍경을 마주했다. 그게 어떤 현장인지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상대의 의도 역시 빠르게 파악했다.
‘내 점수를 빼앗을 심산이로군.’
다른 시험자의 점수를 빼앗거나, 해악을 끼치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었다.
그게 바로 눈앞에 기세등등하게 서 있는 녀석들의 행동 근거일 것이라고 유현은 생각했다.
“에라이, 산적 같은 놈들아.”
“...뭐? 산적?”
“요즘 시대가 어느 땐데 길목에서 사람을 습격해? 전란도 아니고.”
“뭐라는 거야.”
“뭘 뭐라는 거야. 한국말 못 알아들어? 와줘서 고맙기는, 시팔. 나 때는 말이야. 너 같은 놈들 보이면 그냥 보이는 족족 족쳤어.”
유현은 먼 과거를 회상했다.
판대륙에 소환됐던 초기.
길목을 지날 때는 물론, 마을에 머물 때도 도적 떼들에게 쉴새 없이 시달렸다.
힘이 없을 때는 당하기만 했고, 어느 정도 힘을 길렀을 때는 그들과 싸워 무찔렀다.
하지만 세상은 넓었다.
시간이 지나면 도적들이 다시 나타났다. 몇 번을 죽이든, 몇 년이 지나든. 도적단이 기업처럼 운영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인원이 비면 본사에 입사한 직원을 파견하고, 파견하고, 계속 파견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 지금 생각해도 치가 떨린다.”
그들은 더러운 똥이자 사회의 악이었다. 아무리 전란이라지만, 도적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쩜 그렇게 끝도 없이 등장했을까.
“내가 너 같은 놈들을 몇백 년 동안 봤어.”
“......”
“여기선 안 볼 줄 알았는데 기어코 나오네. 하, 진짜 여기 있는 놈들을 죽일 수도 없고….”
이케가미가 고개를 돌려 일행과 수군거렸다.
“저 새끼 머리가 어떻게 된 것 같은데?”
일행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자꾸 중얼거리는 데 그 말들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렴 어때. 빨리 포인트 뺏고 쉬러 가자.”
“맞아. 미친놈이든 아니든 상관없잖아.”
“그렇긴 하지.”
이케가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유현은 이전처럼 작은 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누구는 굶주린 백성들이 도적질한다고 그러는데, 진짜 일부다. 탈영병도 있고, 자기네 군단에서 쫓겨난 마족도 있고. 하, 시발. 그 마족 새끼들이 특히나 가관이야. 그 새끼들은 잠도 없고 겁도 없어. 베이스캠프 주변에 마법이란 마법은 싹 다 둘러놨는데 그걸 자기 팔다리 잘라서 해제하더라니까? 그리고 다시 재생되는데….”
단단히 돌았군.
이유는 몰라도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아 앞뒤 분간이 안 되는 것 같다.
판단을 끝마친 이케가미는 전방으로 손을 뻗었다.
“그놈들 날개가 막 이렇게 돋아나는데 그걸로, 우왁!”
흙으로 된 벽이 유현의 옆과 뒤를 가로막았다. 곧 천장까지 막혀 전방을 제외하고는 모든 퇴로가 차단되었다.
“남은 헛소리는 F등급 밑바닥 놈들한테 하시지.”
포인트를 모두 빼앗기면, 자연스레 기준 미달이 되어 가장 아래 등급으로 내려간다.
이케가미의 말 덕분에 유현은 그 사실을 상기했다.
“맞아. 포인트 다 빼앗기면 강등되지.”
“그걸 이제 알았냐?”
“그럼 좀만 듣고 가. 어차피 너 F등급 가면 영영 못 들을 텐데.”
“......뒤져라, 그냥.”
흙으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가시가 유현에게 쇄도했다. 그와 동시에 다른 패거리들도 공격을 날렸다.
기다란 붕대가 유현의 몸을 구속하고, 화살과 폭탄이 날아들었다. 유현의 머리 위로 쏟아진 폭포 같은 물줄기는 일말의 움직임조차 차단했다.
쾅!
공격이 뒤섞이며 굉음이 일었다.
“으읍!”
바닥에 누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메이블은 두 눈을 크게 뜨며 발버둥 쳤다. 자칫하면 죽을지도 모르는 공격이었다.
“읍! 읍읍!”
“닥쳐!”
이케가미가 걷어차자 메이블이 몸부림을 멈췄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유현이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검은 연기에 가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죽진 않았겠지?”
“안 죽어.”
이케가미는 단호하게 말했다.
애초에 죽을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 아니었다. 목적은 기절. 하이패스 테스트를 통과한 전적이 있기에 강도를 높였지만, 기절 이상으로 가진 않을 것이다.
“이, 이케가미.”
“뭐야?”
학생 하나가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붕대가 돋아난 손목이 이케가미의 눈에 들어왔다.
“왜? 뭐 어쩌라고.”
“느, 느슨해졌잖아! 안 보여?”
이케가미는 그제야 눈치챘다.
유현을 구속하고 있기에 팽팽하게 당겨져야 할 붕대가 느슨하게 풀어져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연기 치워봐!”
흙으로 만들어진 감옥에 물이 쏟아졌다. 시야를 메우던 검은 연기가 단숨에 주변으로 흩어졌다.
“......”
텅 빈 내부. 유현의 흔적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씨발! 뭐야!”
당황한 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메이블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감옥 내부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묶여 있었을 텐데.
“이 새끼 대체 어디로 튀었어!”
풀숲은 물론 나무 위까지 뒤적이던 그들은 뒤늦게 유현을 발견했다.
“저, 저기 있다!”
메이블은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다.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그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야, 씨.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그 말이 딱이다.”
나무 위에 올라가 있던 이케가미가 흙을 타고 내려왔다.
흩어져 있던 일행들은 금세 다시 유현의 앞에 모였다.
“조금 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당했어.”
“경황 같은 소리 하네. 잡아!”
붕대가 유현을 향해 뻗어 나갔다.
이번에도 붕대는 유현의 몸을 붙드는 데 성공했다.
“하! 그렇게 쉽게 붙잡히면서 끝까지 허세 부리기는.”
“마나 밀도가 너무 낮아. 너는 훈련 좀 열심히 해야겠다.”
우두둑, 두둑.
유현이 가볍게 힘을 주자 붕대가 끊어졌다.
“......어?”
붕대의 주인은 저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A급 몬스터도 붙들던 붕대였는데, 저렇게 쉽게 끊는다고?
“미, 미안. 이케가미. 내가 좀 지친 것 같아.”
“다물어.”
이케가미는 아까보다 명확한 적의를 불태웠다.
“어떻게 빠져나갔는지는 몰라도 운이 두 번 따라주진 않을 거다.”
유현이 공격에서 도망친 것도 자신들이 방심했기 때문이고, 몸을 붙들었던 붕대를 끊어버린 것도 아군이 지쳤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우연이 겹친 상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몸뚱이 하나는 좋아 보인다만, 마나가 없으면 그래봤자 일반인이지.’
이케가미가 패거리에게 소리쳤다.
“다들 방심하지마! 한 번에 끝낸다!”
“알겠어!”
이케가미와 패거리들이 다시 태세를 갖췄다.
마나가 움직이고, 전투가 재개됐다.
유현의 주위로 또다시 흙이 솟아나 벽을 만들었다. 사방이 막힌 벽에는 아까와는 달리 작디작은 창문 하나만이 뚫려 있었다.
“저 안으로 공격해!”
작은 구멍을 통해 공격이 쏟아졌다.
벽 안쪽에서 들려오는 폭음.
이케가미는 승리를 확신했다.
‘끝이다.’
녀석과 했던 내기는 승리로 돌아가고, 처음으로 S등급에 도달하는 건 자신이 될 것이다.
왜 내기를 하게 됐는지 따위는 이제 기억나지 않았다. 지금은 단지 저 재수 없는 자식을 진창에 처박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마무리 간다!”
큼직한 폭탄 하나가 구멍 안으로 쏙 들어갔다.
콰앙!
폭음이 대지를 흔들었다.
참호에서 수류탄이 터지듯 작은 창문 밖으로 폭발의 여파가 새어 나왔다.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길 잠깐. 이케가미는 흙벽을 무너뜨렸다.
“한 번 더!”
“뭐, 뭐? 한 번 더 하라고?”
“그래! 확실하게 끝을 봐야지!”
이케가미가 잔해를 둘러싸는 형태로 새로운 벽을 만들었다.
이전처럼 작게 뚫린 구멍 안으로 다시 한 번 공격이 쏟아졌다.
내부에서 연이어 울려 퍼지는 폭음.
폭발이 끝나고, 이케가미는 다시 벽을 무너뜨렸다.
“하하하하!”
이케가미가 크게 웃었다.
다른 패거리들도 그를 따라 쿡쿡거렸다. 자신들을 무시하던 유현의 낯짝을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하하하하!”
“꼬시다! 하하하!”
웃지 않는 사람은 메이블 하나뿐이었다.
‘어떻게 저런 짓을….’
만약 입이 막혀있지 않았더라면, 몇 번이고 비명을 질렀을 만큼 잔혹한 행동이었다.
“근데 이케가미. 쟤 스마트 워치도 부서졌으면 어떡하지?”
“부서지겠냐? 튼튼하게 만들었겠지.”
“그런가?”
이케가미가 멀찍이서 무너진 벽을 치웠다. 까만 흙이 그의 손짓에 따라 한쪽으로 움직였다.
이윽고 바닥이 드러났다.
그런데 그곳에 죽은 듯 누워 있어야 할 유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 없는데?”
이케가미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어디 갔지?
외부로 향하는 통로는 작은 구멍 하나뿐이었다. 도망칠 구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주, 죽어서 재가 된 거 아니야?”
“말이 되는 소릴 해. 여기까지 올라온 놈이 아무리 마나를 다 썼다지만 그렇게 된다고?”
이케가미는 곰곰이 생각했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땅을 팠나? 그 사이에?’
바닥 역시 특성으로 구현해냈다.
내구도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으며, 사람의 손으로 파헤칠 강도가 아니었다.
흙과 마나의 균일 결합.
오랜 연구 끝에 만들어낸 궁극의 특성 활용법이었다.
‘드릴로도 파헤칠 수 없을 텐데.’
이케가미의 생각은 거기서 더 이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답이 없었다.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만.”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높은 나뭇가지 위에 유현이 멀쩡히 서 있었다.
“어, 어떻게...”
유현이 아래로 훌쩍 뛰어내려 이케가미가 쌓아놓은 흙더미 위로 착지했다. 마치 깃털이 내려앉듯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대체 어떻게 빠져나온 거야!!”
이케가미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흔들리는 눈동자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그냥 뒤로 나왔는데?”
“이런 시발!”
이케가미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다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번번이 빠져나가다니. 얄밉기 그지없는 놈이었다.
“넌 오늘 진짜 뒤졌어!”
유현의 뒤쪽으로 흙이 솟아나며 퇴로를 가로막았다.
이케가미는 그대로 유현에게 달려들었다.
“그 소리만 몇 번째야. 건망증있냐?”
“아가리 닥쳐!”
이케가미가 유현을 향해 단단한 흙을 뭉친 주먹을 뻗었다.
턱.
기세 좋게 날린 주먹이었으나 유현의 손에 허무하게 붙잡혔다.
“이거 놔!”
이케가미는 손을 빼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벽에 틀어박힌 것처럼 손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무, 무슨 힘이...”
“너 이름이 뭐냐?”
“뭐, 뭐라고?”
“이름이 뭐냐고.”
이전과 다를바 없는 목소리였지만, 이케가미는 왠지 모를 긴장감을 느꼈다.
평소라면 역정을 냈을 그가 얌전히 유현의 말에 답했다.
“이케가미 신이치.”
“오, 일본인이야?”
“일한 혼혈이다.”
“어허, 일한이라니. 우리나라에선 한일이라 해야지.”
“닥쳐.”
유현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자존심 엄청 쌔구나.”
“......”
“때로는 좋은 덕목이 되기도 하지. 지금은 아니지만 말이야.”
유현이 손목을 비틀었다.
이케가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아아아아악!”
“딱히 원한은 없어. 저기 누워있는 쟤랑 아는 사이도 아니고.”
유현이 메이블을 일견했다.
그녀는 호기심 넘치는 강아지처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냥 지나가려고 했어. 우라질 산적질 하는 게 좀 많이 역겹긴 한데, 그래도 저 친구의 목숨을 위협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아아아아아악!”
이케가미의 비명이 더 높아졌다.
“근데 난 왜 걸고넘어지냐? 어? 쟤 하나로는 모자랐어? 포인트도 다 모았겠다, 간만에 산림욕도 좀 했겠다, 기분 좋았는데 너희들 때문에 다 잡쳤잖아, 이 씨부럴놈들아.”
유현이 이케가미의 뒤쪽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구경하던 패거리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들 역시 이케가미 만큼은 아니지만, 긴장되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픈 과거를 떠올리게 한 죄, 내 앞을 막은 죄, 날 방해한 죄, 내가 빨리 쉬지 못하게 한 죄, 포인트를 빼앗으려 한 괘씸죄. 또 뭐 있더라. 아무튼 짜증나니까 벌을 내릴 거다.”
“으으윽...”
“벌은 포인트 압수다.”
유현이 스마트 워치로 손을 뻗은 그 순간, 이케가미의 손을 붙든 쪽의 힘이 살짝 빠졌다.
이케가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꺼져. 내가 줄 것 같아?”
아픈 손을 다잡은 채 뒤로 몇 걸음 물러나는 이케가미. 그 뒤에는 패거리가 서 있었다.
“달라고 안 했는데?”
유현이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압수한다고 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