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아침이 다가오고, 등급 테스트는 서서히 막바지로 치달았다.
종료까지 앞으로 3시간.
누가 강등되고, 누가 승급할지, 최종 결과의 윤곽이 조금씩 뚜렷해지는 가운데.
S등급 기준을 달성한 첫 참가자가 나왔다.
“후.”
A층.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이는 한 여자가 산속을 걸어가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은색 머리칼이 나부낀다.
아침을 맞은 새들이 짹짹거리며 그녀의 주위를 날아다녔다.
메이블 유.
그녀는 가장 먼저 먼저 S등급 달성 기준을 충족하는 데 성공했다.
휴식은 최소한으로 하고 치열하게 싸웠다.
이제 남은 마나도 없다. 하지만 이곳, 포탈로 향하는 길목은 안전지대로 형성되어 몬스터가 출현하지 않는다.
“간지러워라.”
뺨에 볼을 비비는 새들.
그녀가 가진 능력은 이처럼 작은 동물에게도 포근함을 느끼게 했다.
‘다른 분들은 통과하셨으려나.’
피로가 쌓인 와중에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같은 반 학우들이 떠올랐다.
함께 S반이 된다면 좋을 텐데.
만약 자신 혼자 교실이 달라진다면, 조금은 외로울지도 모르겠다.
“하암-”
메이블이 입을 가리며 하품했다.
틈이 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능력을 사용했지만, 여전히 피로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안전지대를 걸으며 회복된 소량의 마나를 다시 자신에게 사용했다. 코어가 다시 바닥나고, 몸에는 조금이나마 활력이 돌았다.
“좋았어.”
메이블은 작은 주먹을 불끈 쥐고 다시 힘차게 걸음을 뻗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산의 정상 부근에 있는 포탈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
S등급이 코앞에 다가왔다는 게 기뻤지만, 좀처럼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피로가 쌓인 탓이었다.
‘들어가서 한숨 자야겠다.’
S층에는 편하게 쉴 수 있는 장소가 제공된다고 했다. 샤워까지는 아니더라도 누워서 잘 수 있는 공간 정도는 있으리라.
“후훗.”
편하게 잠들 생각에 다시금 메이블의 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힘차게 걷던 것도 잠시.
메이블이 걸음을 멈췄다.
포탈로 향하는 통로의 중간에 교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길을 막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통과한 사람들이구나.’
그리 친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는 얼굴이었다. 적어도 혼자서 S반에 있을 걱정은 사라졌다.
‘누굴 기다리고 있는 건가?’
메이블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는 메이블.
이케가미를 비롯한 그의 패거리들은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역시 네가 처음이구나.”
“이케가미씨도 점수를 전부 모으셨나요?”
천진한 질문에 이케가미를 포함한 패거리들이 실소했다.
그들이 왜 웃는지 이유를 모르는 메이블은 그저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아, 미안, 미안. 너무 순진한 것 같아서.”
“뭐가 순진해요?”
“내가 점수를 다 모았다고 생각하는 거 말이야.”
메이블의 표정이 더 아리송해졌다.
“다 모은 게 아닌가요?”
“아니지.”
“그럼 여기 계시면 안 되죠!”
메이블이 발을 동동 굴렀다.
같은 반이 될 사람이 생겼다고 좋아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빨리 가서 몬스터를 더 잡아야죠!
아, 혹시 점수가 모자라세요? 그런 거라면 제가 몇백 점 정도는 드릴 수 있어요.”
이케가미의 미소가 굳었다.
메이블은 그제야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이케가미씨?”
“난 너 같은 부류가 역겨울 정도로 싫어.”
“갑자기 그게 무슨….”
이케가미가 메이블의 팔을 낚아챘다. 스마트 워치를 착용한 오른팔이 허공에 매달렸다.
“아, 아파요!”
“순진한 척 하는 거냐? 아니면 멍청한 거냐? 그것도 아니면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가?”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놔주세요!”
이케가미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잘 들어. 우린 여기서 네 점수 노나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던 거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눠 먹는다고. 넌 나보다 한국에 오래 살았으면서 그런 것도 몰라?”
그런 와중에도 메이블은 새롭게 배운 단어를 되뇌었다.
“그런 단어는 처음 들어봐요. 노나먹다. 나눠먹다. 두 개가 같은 의미군요.”
“......넌 아무래도 멍청한 게 맞는 것 같다.”
이케가미가 패거리를 향해 턱짓했다. 뒤쪽에 서 있던 이들이 메이블을 향해 다가갔다.
“오, 오지 마요! 건들면 능력을 사용할거에요!”
“마나도 없으면서?”
“이, 있어요!”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이케가미가 웃었다.
“너 거짓말 진짜 못한다.”
“읏...”
“난 너처럼 멍청하지 않아. 네가 여기에 제일 먼저 올 것도 알았고, 마나를 전부 사용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이케가미가 품속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것 봐. 이게 지금 네 상태야.”
작은 화면 위로는 메이블의 현재 몸상태가 있는 그대로 표시되고 있었다.
“이, 이게 뭐에요?”
“테스트 시작하기 전에 내가 널 넘어뜨렸었지. 그때, 네 몸에 붙였어.”
이케가미의 손이 메이블의 뒤쪽으로 움직였다.
교복 상의 안으로 들어오는 손에 메이블이 눈을 질끈 감았다.
“자, 봐봐.”
그녀가 다시 눈을 떴다. 이케가미의 손에는 작은 휴대용 장치가 들려 있었다.
“신체 측정 장치. 공복 상태는 물론 마나의 잔량과 위치까지 추적할 수 있지.”
“......애초에 다른 사람 점수를 갈취할 생각이었군요.”
“당연하지. 그게 안 된다는 소리도 없었잖아.”
“대체 왜요? 제 점수를 빼앗아봤자 다 같이 나누면 얼마 되지도 않잖아요!”
“그건 걱정하지마. 네 점수 빼앗아서 나누면 딱 기준에 맞거든. 설마 우리가 계속 여기에 죽치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메이블에게 붙어있던 장치는 GPS 기능도 제공했다.
이케가미와 그 패거리는 제각기 다른 곳에서 점수를 쌓고, 쉬다가 메이블이 안전지대에 진입했을 때 이곳으로 모여든 것이다.
“하…….”
메이플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한 얼굴이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는지.
“왜, 왜 하필 전가요? 제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나요?”
“그냥 네가 제일 빨리 통과할 것 같아서. 속여먹기도 쉽고 말이야.”
“당신은 정말….”
메이블은 좌절했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이런 짓을 해서 S등급에 간다고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나요? 제가 다 이를 거에요! 당신이 나한테서 점수를 빼앗았다고 다 이를 거라고요!”
이케가미가 폭소했다.
그는 한참을 웃다가 눈물을 닦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이것도 엄연히 테스트의 일부야. 범죄나 규칙 위반이 아니라고. 네가 용서를 하고 말고는 하등 상관없어.”
“맞아. 이 멍청한 년 같으니라고.”
패거리들도 뒤에서 한 마디씩 거들었다.
명백한 적의 속에서 메이블은 울컥하는 감정을 참지 못했다.
혼자가 아니게 됐다고 좋아했는데, 정작 그 사람들은 처음부터 점수를 빼앗을 생각이었다니.
“풋, 이제는 눈물이야?”
“......”
“울어봤자 바뀌는 건 없어.”
“정말 너무해요.”
글썽거리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메이블의 숨이 거칠어지고, 약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이케가미는 한심한 눈빛으로 메이블을 바라보았다.
“넌 참 편하게 살아온 것 같아. 이런 상황에 질질 짜는 것만 봐도 그래.”
이케가미는 메이블이 착용한 스마트 워치로 손을 뻗었다.
메이블은 몸을 이리저리 흔들며 반항했지만, 곧 패거리 중 하나의 능력으로 몸이 굳었다.
“무사히 돌아가고 싶으면 얌전히 있어. 참가자끼리 싸우면 안 된다는 규칙도 없었으니까.”
메이블의 스마트 워치가 풀렸다.
이케가미는 그녀를 내동댕이쳤고, 패거리가 메이블의 손과 발을 뒤로 묶었다.
“이케가미, 입도 막을까?”
“테이프 붙여서 안쪽으로 밀어 놔.”
혹여나 누군가 발견하지 않도록 뒤처리까지 깔끔히 했다.
언젠가는 들키겠지만, 괜히 여기서 들켜봤자 좋을 게 없었다.
“자, 점수 다 나눴다.”
그 사이, 이케가미는 메이블의 스마트 워치를 조작해 자신을 비롯한 패거리들에게 점수를 배분했다.
스마트 워치를 확인한 그들은 저마다 웃음꽃을 피웠다.
“조금 모자라긴한데 이 정도면 거의 성공이네.”
본래 보유한 포인트에 메이블에게 빼앗은 포인트를 더하니 S등급의 기준에 더 가까워졌다.
“쩝, 조금 아쉽네. 한 두 마리만 더 잡았어도 바로 통과하는데.”
“별수 없지. 그래도 이렇게 채운 게 어디야? 솔직히 채울 자신 없었는데 말야.”
이케가미가 손뼉을 쳐 패거리의 시선을 모았다.
“잡담은 그만하고. 빨리 얘 치우고 남은 점수 채우러 가자. 같이 몰려다니면서 잡으면 금방이니까.”
메이블은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이케가미를 응시했다.
구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등바등했지만, 단단히 묶인 밧줄은 풀릴 낌새조차 없었다.
“읍! 으읍!”
“뭐라는 거야.”
이케가미가 메이블을 발로 밀었다.
“야, 들어.”
다른 패거리들이 메이블을 짐짝처럼 나눠 들었다.
그러고는 이케가미를 따라 험준한 숲속으로 들어갔다.
“어디 두지?”
“대충 던져둬.”
이케가미의 말에 패거리는 메이블을 적당한 곳에 내려놓았다. 전봇대에 버려진 쓰레기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너무 밉게 생각하지는 마.”
이케가미가 쭈그려 앉아 메이블의 앞머리를 넘겼다. 눈물 젖은 얼굴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다들 각자만의 방식이 있는 거니까. 알겠지?”
얄미운 말을 남기고는 몸을 돌리는 이케가미.
옆에 있던 풀숲이 흔들린 건 그때였다.
“......”
사람의 키보다 높은 이름 모를 풀의 군락. 바람 한 점 불지 않았지만, 풀숲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메이블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돌아갔다.
“뭐, 뭐야?”
“몬스터? 안전지대에?”
멀리서부터 양옆으로 눕기 시작하는 풀잎들.
풀숲에 가장 가까이 선 이케가미는 침착하게 풀숲을 주시했다. 무언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우, 씨바.”
고조된 분위기 속에서 욕설이 울려 퍼졌다.
그들의 앞에 나타난 건 유현이었다.
교복은 물론이고 전신에 초록색 이파리가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하.”
상대가 유현이라는 걸 깨달은 이케가미는 긴장을 놓았다. 다른 패거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놈이면 안심이지.’
여기까지 올라온 게 신기하지만, 이미 힘은 다 빠졌을 것이다.
무엇보다 제대로 점수도 채우지 못했을 테고.
“길이라도 잃었냐?”
“맞아. 벌써 여기로 오면 안 되는데?”
풀숲을 빠져나와 몸을 털던 유현은 뒤늦게 이케가미를 발견했다.
“깜짝이야. 언제부터 있었어?”
“너 오기 한참 전부터.”
“그래? 되게 빨리 왔네.”
풀을 떼던 유현의 시선이 좌측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메이블과 눈이 마주쳤다.
잔뜩 울상이 된 얼굴.
구속된 몸뚱이.
이케가미와 메이블을 번갈아보던 유현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구만.”
이케가미가 씩 웃었다.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
“엉? 무슨 얘기?”
“무슨 상황인지 알겠다며.”
이케가미가 주머니에서 신체 측정 장치를 꺼내 유현에게 던졌다.
유현은 날아온 장치를 낚아챘다.
“뭐야 이게?”
대답 대신 스마트폰을 확인하는 이케가미. 유현의 현재 상태가 화면 위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너도 마나가 바닥났구나.”
유현이 눈가를 좁히며 장치를 살폈다. 장치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놈 봐라?”
와작.
유현이 주먹을 움켜쥐자 장치가 박살났다.
우수수 바닥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들.
이케가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미, 미친 새끼가!”
“훔쳐본 놈이 잘못이지 어디 큰 소리야?”
“이런, 씨... 아니, 아니야.”
이케가미는 애써 속을 가라앉혔다.
차분하자. 어차피 이 녀석만 잡으면 이제 쓸 일 없는 장치다.
S등급까지 남은 건 앞으로 몇 점.
유현을 잡아 포인트를 나누면 합격 기준을 충족하고도 남는다.
“후후후.”
이케가미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F등급부터 여기까지 올라왔다면 상당한 실력자일터. 싸우면 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녀석의 마나는 이미 바닥난 상태고, 능력을 쓸 수 없다면 상대가 누구든 쉽게 이길 수 있으니까.
“와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