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으씨야아아아!”
나무가 우거진 숲.
하늘은 푸르고 햇볕은 밝았지만, 숲속은 어두웠다.
그런 숲의 한복판. 그늘진 곳에 한 남자가 누워있었다.
“나이쓰으으!”
휴대전화를 손에 쥔 유현은 반대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며칠에 걸쳐 이어진 길드 전쟁.
성전.
성전의 마지막 날이었지만, 여전히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이제부터 순위 방어전으로 간다.”
파죽지세의 3연승.
그러나 아직 7번의 전쟁이 더 남아 있다. 여기서 한 번이라도 삐끗했다가는 보상 순위권에서 탈락 확정이다.
“꽤 오래 걸릴 것 같은데.”
유현은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를 확인했다. 버튼을 누르자 남은 시간이 표시되었다.
[22시간 14분]
시험 시간은 꼬박 하루.
24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포인트를 얻어 위로 올라가야 한다.
“넉넉하네.”
누군가에게는 1분 1초가 소중한 순간이었지만, 유현은 여유롭게 자세를 고쳐 누웠다.
몇 시간이 남든 유현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자신이 있었다.
“흠흠~”
콧노래를 부르며 다시 게임에 집중하는 유현. 그런 그를 노리는 이들이 있었으니.
부스럭.
그때, 수풀 너머로 고블린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케르륵.”
“케륵, 케륵.”
손에 무기를 꼬나쥔 채 조금씩 유현에게 다가가는 고블린들. 성공적으로 뒤를 잡았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오싹-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고블린 뿐만이 아니었다.
사방에서 유현을 노리고 다가오던 몬스터들이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아, 거기서 왜 들어가!”
유현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그것과 동시에 몬스터들이 겁을 집어 먹고 도망쳤다.
“케륵, 케륵!”
“우어어어!”
주변에서 들려온 소음에 유현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뭐야?”
고요한 숲속. 조금 전까지 다가오던 기척이 사라진 걸 확인하고는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
“헉, 헉.”
최하위층.
주시하가 넓은 평원을 달렸다.
“키에에에엑!”
그 뒤를 여러 마리의 몬스터들이 뒤쫓았다. 거리는 조금씩 멀어졌지만, 몬스터들은 포기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힘들다.’
도망치기 시작 한 지 몇 분.
쉬지 않고 꾸준히 달린 탓에 체력이 부쳐왔다. 조금이라도 쉬면 몰라도 이 상태로 더 달리는 건 슬슬 한계였다.
‘차라리 싸울까?’
주시하가 뒤를 흘끗였다.
뒤쫓아오는 고블린의 숫자는 총 다섯 마리. 혼자서 상대하기에는 많은 숫자였다.
‘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주시하는 유현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지난 몇 주간 이어졌던 다양한 훈련들. 단순히 기초적인 훈련 외에도 몬스터와 마주했을 때의 마음가짐이나 전투 태세 등 다양한 것을 배웠다.
‘할 수 있어.’
주시하는 결단을 내렸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지금이라면 싸워 이길 자신이 있었다.
능력은 진화했고, 경험은 늘었다.
고작 F등급의 고블린들에게 겁먹을 수준이 아니었다.
‘더 이상 도망치는 건 싫어.’
주시하는 뜀박질을 멈추고 홱 몸을 돌렸다.
저마다 다른 무기를 손에 듣 고블린들이 순식간의 그의 앞에 도달했다.
“키에에!”
“키에에에엑!”
끔찍한 울음을 토하는 고블린들.
주시하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급해지면 안 돼.’
마나가 허공에 뭉쳐지며 검은색 입자로 변했다.
“키에에엑!”
고블린들이 주시하를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주시하는 적을 시야에 담은 채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렸다.
‘한 번에!’
옆에 둥실 부유하던 공이 전방으로 움직였다. 이윽고 구체에서 뾰족한 가시가 뿜어졌다.
푸확!
여러 갈래로 분리된 가시가 곧장 고블린의 신체를 꿰뚫었다.
“키에에에엑!”
고블린들이 울부짖었다.
급소에 적중당한 몇몇은 쓰러졌지만, 아직 서 있는 고블린도 있었다.
주시하는 작아진 구체에 마나를 추가로 덧입혀 구체의 밀도와 크기를 원상태로 되돌렸다.
‘정확도를 더 높여야 해.’
적의 급소를 겨냥한다면 보다 쉬워질 터. 입자를 다루는 동시에 조준까지 하는 건 어렵지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집중하고.’
다시금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주시하는 공격을 펼쳤다. 이전보다 적어진 가시의 개수. 하지만 컨트롤이 쉬워졌다.
“가라!”
주시하의 고함과 함께 가시가 고블린의 목덜미를 관통했다.
쓰러지는 고블린들.
인위적으로 제작된 몬스터들은 죽음과 동시에 형체를 잃고 사라졌다.
“......”
주시하는 적들이 사라진 자리를 응시했다. 처음으로 치러본 전투.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했던 탓인지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진짜… 내가 죽인 건가…?”
주시하의 시선이 자연스레 스마트 워치로 돌아갔다.
작은 화면 위로 숫자가 깜빡이고 있었다.
[5 PT]
5점.
조금 전 고블린들을 죽이고 받은 점수였다.
주시하는 그제야 웃었다.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비로소 몬스터를 잡았다는 게 실감났다.
“내가 해냈어.”
예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
주시하가 감격의 눈물을 글썽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눈앞에 닥친 수많은 장애물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다니. 그게 너무나 기뻤다.
‘다 현이 덕분이야.’
유현이 없었다면, 이 능력을 깨우치는 일도, 여기까지 노력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고마워, 현아.”
주시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현이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이미 위로 올라갔겠지.
시험이 끝나면 직접 이야기하고 싶다. 자신을 도와줘서, 구해줘서 정말로 고맙다고. 이미 수차례 이야기했지만, 몇 번을 말해도 부족한 마음이었다.
“더 올라가자.”
주시하는 다시 움직였다.
애당초 목표는 E등급.
하지만 D등급, 아니면 그 이상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현이한테 자랑할 수 있게 더 높이 가는 거야.’
주시하는 이전과 또 다른 마음가짐으로 적을 찾아 달렸다.
***
짙은 열풍이 휘몰아치는 화산 지대.
위험이 우거진 정글.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것 같은 거대한 빙하.
거센 폭풍이 몰아치는 광야.
A층의 기후는 다른 등급과 비교를 불허했다.
조금이라도 삐끗하면 당장 탈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험천만한 장소들.
그 장소들에서 A등급 학생들은 적과 맞서 싸웠다.
“크윽!”
척박한 화산 지대에 소환된 한서희는 상성이 맞지 않는 적과 힘겨운 전투를 벌였다.
쾅!
묵직한 바위 골렘의 주먹이 한서희에게 내리꽂혔다.
한서희는 간신히 회피하며 적을 향해 불덩이를 날렸다.
하지만 온통 바위로 둘러싸인 골렘에게 그녀의 불꽃은 큰 효과를 보이지 못했다.
‘화력을 높여야겠어.’
한서희가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녀의 손바닥 위로 피어난 불꽃의 색깔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진한 붉은빛을 띠던 불꽃은 점차 연해지더니 노란색 불꽃으로 뒤바뀌었다.
한서희는 그대로 불덩이를 날렸다.
아지랑이와 함께 날아간 불덩이가 바위 골렘의 머리에 적중했다.
“우어어어!”
조금씩 녹아내리는 머리.
바위 골렘은 아우성치다 쓰러졌다.
쿵.
한서희는 땀을 닦으며 손목을 확인했다. 200포인트가 추가되어 총 1400포인트가 됐다. 쉬지 않고 싸웠지만, S의 기준 점수인 10만점에는 한참 못 미치는 상황.
‘이 추세면 한계 인원 밑이야.’
등급 테스트에는 강등도 존재한다.
해당 등급에서 제한 인원 바깥으로 테스트를 마무리 지을경우 아래로 한 단계 떨어진다.
이 제한 인원을 시험의 탑에서는 한계 인원이라고 칭했다.
A등급의 한계 인원은 10명.
A등급 중 점수 순위가 10위 아래로 떨어진 상태로 테스트가 종료되면 B등급으로 강등되는 방식이었다.
‘총 참가 인원은 스무 명.’
A반의 절반 이상이 등급 테스트에 참가했다.
그러나 한계 인원은 10명.
S등급으로 올라가는 사람이 없다면, 참여한 사람 중 절반은 강등될 운명이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아래에서 올라온 다른 등급이 더 많은 포인트를 모아 자리를 꿰찰 수 있으니까.
‘하필이면 이런 곳으로 소환돼서.’
한서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스타트가 좋지 않았다.
일단 전투는 차치하고 상성이 좋지 않은 장소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바쁘게 움직인 한서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화산 지대를 빠져나왔다.
푸른 봉우리의 정상.
발아래로는 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고, 저 멀리 늘어선 수평선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온갖 환경이 한데 뒤섞인 괴이한 장소였지만, 그녀는 침착하게 자신에게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
쾅!
그때, 숲 위로 먼지가 피어올랐다.
허공으로 휘몰아치는 붉은빛의 무기들. 전투의 당사자가 누구인지 한서희는 곧장 알아차렸다.
“서혜빈.”
다시 한번 굉음이 울렸다.
숲이 진동하고, 새들이 비상했다.
거대한 나무 아래, 적과 대척하는 서혜빈.
그녀의 앞에는 육중한 체구를 가진 몬스터가 서 있었다.
“아, 진짜 더럽게 안 죽네.”
두 발을 딛고 선 양팔 오우거.
네 개의 팔에는 각기 다른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후웅!
오우거의 오른손에 들려 있던 거대한 바위가 서혜빈을 향해 날아갔다.
서혜빈이 전방으로 손을 뻗었다.
등 뒤에 부유하던 거대 망치가 날아오던 바위를 내려찍었다.
쾅!
굉음과 함께 산산이 조각나는 바위.
돌 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우박처럼 떨어졌다.
서혜빈은 자신의 머리 위로 방패를 소환해 떨어지는 조각들을 막아냈다.
“우어어어어!”
포효하는 오우거.
서혜빈이 마나를 흩뿌렸다.
붉은 에너지는 곧 수십 개의 붉은 칼날로 뒤바뀌었다.
쇄액!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쇄도하는 철붙이. 서혜빈은 정확히 적의 급소를 노렸고, 칼날들은 모두 치명타를 날렸다.
“우어어….”
양팔 오우거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둔중한 소리가 나고 형태가 서서히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휴.”
서혜빈은 흐른 땀을 닦으며 다시 움직였다. 전투를 마쳤지만, 쉬고 있을 시간은 없다.
‘일단 숲을 벗어나자.’
특성 - 장비 소환.
한 번 마나로 스캔한 장비라면 복제하여 소환할 수 있다. 단, 복잡한 장치가 가미된 장비는 불가능하다. 기계나 총 같은 것들.
‘우거진 숲속보단 장애물이 없는 장소가 유리해.’
싸우는 데 어려움은 없지만, 가능하면 변수를 줄이고 싶었다.
서혜빈은 뜀박질에 박차를 가했다.
“크아아!”
그때 저 앞에서 울려 퍼지는 몬스터의 포효. 뒤이어 전투의 소리가 뒤따랐다. 누군가 싸우고 있었다.
‘빼앗을까?’
몬스터의 점수는 적을 죽인 사람에게 돌아간다. 얼마나 많은 데미지를 넣었는가, 누가 먼저 발견했는가 같은 것들은 상관없었다.
‘누군지 확인부터 해보자.’
사냥 중인 몬스터를 빼앗지 않는 건 헌터들의 불문율. 하지만 만약 상대가 한서희나 이케가미 같은 놈들이라면 기꺼이 빼앗을 생각이었다.
서혜빈은 조심스레 다가갔다.
그곳에서 싸우고 있던 건 메이블 유였다.
“쳇.”
메이블 유.
친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아는 사람 중 누구보다도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다. 아마 여기서 몬스터를 빼앗아도 웃으며 넘길 것이다.
하지만 서혜빈은 그저 바라만 봤다.
아까 시비를 걸었던 이케가미 패거리나 한서희가 아니라면, 굳이 양심을 팔아먹고 싶지 않았다.
‘언제 봐도 참 편한 능력이야.’
선 채로 메말라가는 몬스터.
생명의 흔적이 서서히 사라지고 이내 쓰러졌다.
서혜빈은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는 메이블을 일별하고는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