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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격에 말을 잇지 못하는 관중들.
한주석 역시 벌어진 입을 주체하지 못했다.
마스톨이 당했다. 그것도 아주 처참하게.
그 사실을 눈으로 인식하고, 반향이 퍼져나가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군중은 경악했고, 좌절했고, 분노했다.
“마, 마스톨이 당했어!”
“저 새끼 뭐야!”
그 마스톨이 당했다.
무패의 챔피언.
격투장의 악마.
무시무시한 수식들이 퇴색될 만큼 초라한 패배였다.
“에라이! 미친 새끼야!”
“내 돈 어떡할 거야!”
관중석에 앉은 대부분이 마스톨에게 크고 작은 돈을 걸어둔 상태.
몇몇은 빚까지 내서 베팅했다.
마스톨이라면 뭣 모르는 애송이 하나쯤은 순식간에 때려눕힐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으니까.
그 믿음이 박살 나고 돈까지 잃는 데는 고작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으니,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이거 조작이야! 둘이서 짜고 친 거라고!”
결과를 부정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흥분한 상황에서 대중은 쉽게 선동당했다.
한 사람의 발언은 순식간에 여론이 되었고, 사람들이 관중석을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저 새끼 베팅할 때부터 알아봤어!”
“죽여버려!”
몰려 내려온 사람들이 반투명한 벽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격투장의 관리 인원들이 있었지만, 성난 군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시끄럽네.”
유현은 모여든 사람들을 흘겨보며 귀를 후볐다. 돈은 자기들이 걸어놓고 화풀이는 다른 사람한테 하는 꼴이라니. 숱하게 봐왔지만, 인간의 밑바닥은 여전히 볼품없었다.
“끙차.”
유현은 바닥을 뚫고 들어간 마스톨의 머리를 뽑아냈다.
옅게 이어지는 호흡. 두개골은 움푹 패였고, 양팔은 부러져 뒤틀렸다.
출혈이 심하니 죽음이 머지않았다.
“들리냐?”
뺨을 툭툭 치자 미세하게나마 반응이 있다.
“너 조금 있으면 죽어.”
“......”
“살 수도 있어. 바로 병원에 가면 말이야.”
유현은 마스톨이 착용한 장비를 차례차례 벗겨냈다.
“근데 우리가 약속했었지? 지는 사람이 죽는다고.”
마스톨의 한쪽 눈꺼풀이 스르륵 올라간다. 힘을 주기 어려운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언뜻 드러난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아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죽일 생각은 없어.”
유현의 말에 마스톨이 신음했다.
살짝 열린 입으로는 바람 빠진 소리만이 연신 빠져나왔다.
“아이씨, 이건 왜 이렇게 안 벗겨져.”
갑옷을 벗기려는 유현.
마스톨이 가까스로 손을 들어 유현의 손목을 붙잡았다.
“......”
“뭐라고?”
“N...O...”
소유한 것 중 가장 비싼 장비.
이건 절대로 줄 수 없다.
무엇보다 애초에 이 장비를 준다고 이야기한 적도 없었다.
“뭐라는 거야.”
조금 더 탈의를 시도해보던 유현은 벗겨지지 않는 갑옷을 포기하고 폭발 장갑만 챙겼다.
“베팅 금액도 챙겨간다. 다른 장비도 챙겨갈 테니까 알아두고.”
쓰러진 마스톨을 뒤로한 채 유현은 경기장을 나왔다.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은 그가 나오기만을 기다렸지만, 막상 달려드는 사람은 없었다.
“비켜.”
유현의 말에 사람들이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유현은 갈라진 인파를 지났다.
“빨리! 빨리!”
길이 생기자 대기하고 있던 마스톨의 경호원들이 급히 경기장으로 뛰어갔다. 그사이에는 회복 능력자도 섞여 있었다.
‘죽진 않겠군.’
인파를 완전히 벗어난 유현은 그대로 마스톨의 장비가 보관되어 있던 곳으로 움직였다.
“뭐야. 다 어디갔어.”
“모두 경매장에 처분되어 베팅 금액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래? 잘 됐네.”
어차피 돈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마스톨이라면 몰라도 자신에게는 하등 쓸모가 없는 장비들뿐이었다.
유현은 몸을 돌려 베팅장으로 향했다.
“마!”
그때, 저 앞에서 한주석이 달려왔다.
“너, 너 혹시 점마 쥑있나?”
“안 죽였는데?”
“아이고, 아이고, 다행이다.”
유현이 죽지 않았다는 것과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에 한주석이 안도했다.
“가자.”
“또 어딜가노?”
“어디긴. 돈 받으러 가야지.”
한주석은 그제야 베팅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설마 이길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그만 잊고 있었다.
“좀 천처이 가라. 궁금한 게 산더미다.”
“가면서 말해.”
“저놈 우예 잡았나? 갑자기 없어지더니 벽에 처박히더마.”
“발로 찼지.”
한주석이 탄식했다.
“내 말은 그게 왜 가능하냐는 거다. 너 뭐고? 뭐하는 놈이고? 사람은 맞나? 어디 외계인한테 실험당한 놈 아이가?”
“오, 비슷한데.”
한주석이 흠칫했다. 그저 답답하여 아무 말이나 되는 대로 지껄였을 뿐인데 비슷하다니.
“뭐, 뭐가 비슷하나?”
“전부 다?”
천 년을 살았으니 사람도 아니고, 외계인 같은 놈에게 갑자기 끌려갔으니 그것도 얼추 맞다.
“노, 농담이제?”
한주석의 말꼬리가 길게 올라갔다.
유현이 장난스레 웃었다.
“농담일까?”
“마! 장난치지 말고!”
“농담이야, 농담.”
한주석은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유현의 말은 좀처럼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번엔 제대로 말해봐라. 너 대체 어디서 뭐하던 놈이고. 너처럼 강한 아면 내가 몰랐을 리가 없는데.”
암시장의 모퉁이를 돌았다.
격투장의 사건이 벌써 소문이 된 건지 거리 곳곳에서 마스톨의 이름이 들려왔다.
“이름은 유현. 나이는 18살. 부모님은 건강하시고, 밑에는 두 동생이 있어.”
“마, 내가 언제 그런 거 물어봤나!”
한주석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 이것부터 물어보자. 너 대체 와 F급이노. 입학 시험때 뭘 했길래 F급이고.”
“나도 기억 안 나.”
“하… 미쳐뿌겠네.”
두 사람은 베팅장에 들어왔다.
베팅장은 마스톨에게 사기를 당했다며 돈을 찾으러 온 사람들로 수두룩했다.
어마어마한 숫자의 관리인원이 없었다면, 진즉에 털렸으리라.
유현은 막고 있는 관리인원 사이를 지나 환전소로 향했다.
“돈 찾으러 왔는데요.”
거기에 확인증과 베팅 증서를 내미니 곧장 돈을 지급해주었다.
“혹시 이것도 여기서 바꿀 수 있어요?”
유현은 폭발 장갑을 내밀었다.
직원은 어딘가와 전화 통화를 하더니 가능하다며 폭발 장갑을 받아갔다.
그렇게 수령한 돈까지 모두 합하니 낙찰받은 물건의 대금을 지불하고도 조금 남을 정도였다.
“아, 이래서 갑옷을 챙겨왔어야 했는데.”
유현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야, 가자.”
그 사이에도 머리를 쥐어짜던 한주석은 온갖 시나리오를 통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영문은 몰라도 힘을 숨길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제? 맞제?”
“그런 거로 쳐.”
한주석이 유현의 어깨를 토닥였다.
“네가 을마나 힘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앞으로는 힘내서 같이 살자. 내가 앞으로도 계속 비밀 지킬게. 알겠제?”
느닷없이 헛소리를 지껄이는 한주석. 왜인지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껴있었다.
“......너 지금 우냐?”
“우, 울긴 누가 우노! 이거는 그냥 땀이다, 땀!”
눈가를 쓱 닦는 한주석.
유현은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니 혹시 뭔 일 생기면은 나한테 말해라. 친구 좋다는 게 뭐고! 내는 그 가시나들처럼 이상한 짓 안 할 테니까. 알겠제?”
“그래, 알겠다.”
유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관리 인원 사이를 빠져나왔다.
빠져나오자 곧장 고성이 들려왔다.
“이 범죄자 새끼야!”
“내 돈 내놔!”
줄곧 돈을 찾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있던 이들이 안 된다는 걸 깨닫고 유현에게 표적을 돌렸다.
한두 명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유현을 둘러쌌다.
‘하긴 충분히 의심할 만하지.’
무패의 챔피언이 직접 돈을 걸라고 부추겼는데, 하필 패배했다. 누구라도 경기 결과에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근데 그건 니들 사정이고.”
한순간, 공기가 무거워졌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하는 강함. 무언가에 짓눌린 듯 누구도 꼼짝하지 못했다.
“갈 길 가라.”
이질적인 동양의 언어였지만, 말에 담긴 의미는 그들에게 분명히 전달되었다.
유현은 사람들을 밀어 넘기며 베팅장을 빠져나갔다. 한주석도 유현의 뒤에 바싹 붙어 그 뒤를 따라왔다.
“와, 지리네. 점마들 꼼짝도 못 한다.”
“지들이 돈 걸어놓고 왜 나한테 달라냐.”
“맞다. 저것들 다 양심에 털난 놈들이다.”
“너도 근데 베팅 안 하려고 했잖아.”
“......”
유현은 마석 거래소에 들려 마석을 몇 개 구입한 뒤, 경매장으로 향했다.
경매장에 들어간 유현은 직원에게 돈을 내고 팔 보호대를 수령했다.
“호오….”
유현은 팔 보호대를 살폈다.
전완근 부근에 착용하는 형태로 별 문양이 위쪽으로 가는 형태였다.
“여기에 마석을 끼우면 되겠군.”
유현은 오는 길에 마석 거래소에서 구매한 F등급 마석을 팔찌에 끼웠다.
그리고 보호대를 착용하여 체내에 남아 있던 극미량의 마나를 주입했다.
우웅.
옅게 진동하는 마석.
빛을 발하며 별 문양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곧 체내로 마나가 천천히 흘러들어왔다.
일련의 과정을 지켜본 유현은 결론을 내렸다.
‘판대륙의 물건이 아니군.’
비슷한 것 같으나 핵심적인 부분에 차이가 있었다.
우선 마나가 흐르는 통로의 설계.
판대륙의 방식이라면 이런 복잡한 방식이 아니라 보다 단순한 방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마석에서 마나를 추출하는 방식이 판대륙에서는 보지 못한 방식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이건 판대륙의 물건이 아니다.
‘비슷한 건 외형뿐이었네.’
그래도 이 정도로 똑같이 만든 건 놀라웠다. 적어도 외형만큼은 판대륙의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그냥 우연인가?’
혹시 출처를 알면 좀 더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유현은 직원에게 팔찌의 출처를 알 수 있냐고 물었지만,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아, 그래도 암시장의 수뇌부라면 알지도 몰라요.”
“수뇌부요?”
“진짜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요. 하하.”
지나가는 식으로 한 이야기겠지만, 그럴듯한 이야기였다.
암시장의 경매장에 흘러들어오는 물건이라도 누군가의 확인을 받기 마련이니까.
“누군지 아냐?”
“내도 그것까진 모르지.”
한주석은 부연을 덧붙였다.
암시장의 수뇌.
존재하긴 한다는 게 한주석이 한 발 담그고 있는 뒷세계의 소문이었다.
단, 누구에게도 정보를 드러내지 않은 탓에 집단인지 혼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누가 그 사람들이 있다고 말을 한 건 아이다. 근데 없으면 상식적으로 여기가 운영이 되겠나?”
“그렇긴 하지. 텔레포트도 있고.”
상식적으로 없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 시작은 있을 테니까.
“흠.”
턱을 매만지던 유현은 이내 생각을 털어냈다.
암시장의 수뇌부.
팔찌의 출처를 알기 위해서라도 알아볼 이유는 충분했지만, 집착할 일은 아니었다.
‘결국 판대륙의 물건은 아니니까.’
유현은 머리의 구석으로 팔찌의 출처를 밀어 넣었다.
언젠가는 파헤쳐야 할 일.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돌아가자.”
“마, 그 전에 계산은 해야지 않겠나.”
“......의외로 이런 건 철저하구나.”
“의외일 건 뭐고? 원래 챙길 건 챙기는 사람이다.”
유현은 한주석 몫의 돈을 넘겼다.
한주석은 꼼꼼하게 돈을 계산한 뒤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빵빵하이 좋구마!”
두 사람이 암시장을 떠나고, 그 뒤로도 암시장에는 한동안 유현의 이야기가 돌았다.
당일, 다음 날, 그다음 날까지도.
몇 날 며칠이 지났지만, 유현의 이야기는 끊이질 않았다.
전언 되며 뼈가 붙고 살이 붙은 이야기는, 동양에 사람을 사냥하는 도깨비가 있다는 괴소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