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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형 형태의 격투장.
반투명한 방어막이 격투장을 이중 삼중으로 둘러쌌다.
안전을 위해 관중석은 격투장에서 조금 먼 곳에 만들어졌다.
전체적인 생김새는 복싱이나 레슬링의 무대와 비슷했지만, 그 크기는 몇 배나 컸다.
“와아아아아!”
마스톨의 경기가 정해지고 한 시간.
관중석은 순식간에 사람들로 가득 찼다.
“억수로 많네.”
한주석도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격투장의 부흥을 이끈 마스톨의 경기. 그동안 말로만 들었지 그 위상을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흙바닥이었다카더만.’
흙바닥 위에 대충 링을 두른 게 암시장 격투장의 시작이었다.
그 형태는 꽤 오래 지속되었는데, 사람들은 몰렸지만, 누구 하나 시설의 업그레이드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스톨이 이곳에 오고, 고작 몇 년 만에 과거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격투장에 투자하면 사람들이 더 몰려올 것이고, 자신에게 열광하는 사람이 더 늘어날 거라는 그의 혜안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우우우우우!”
사람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경기장 위로 유현이 먼저 올라온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오히려 팔을 크게 흔드는 유현을 보며 한주석은 한숨을 쉬었다.
“점마, 대체 뭐하는 놈이고….”
유현에 관한 의문은 몇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느닷없이 아카데미에 나타나 한서희와 연결되지 않나, 사상 최초로 F등급 주제에 하이패스 테스트를 통과하지를 않나, 또 서혜빈한테 면전에 대고 악담을 퍼붓질 않나.
그래서 더 한숨이 나왔다.
오늘 이곳이 유현의 묫자리가 될까봐.
‘머리도 억수로 좋고, 쌈질도 잘하는 건 알겠는데 여기는 자리가 아이다.’
솔직히 말해 유현이 설계한 작전은 제법 그럴듯했다.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쟁취하기 위해 마스톨과 경쟁하는 것.
그 마스톨에게 승리하고, 그를 격투장까지 이끈 것.
그리고 베팅을 통해 도발하고, 승리할 시 엄청난 자금을 얻을 수 있게 된 것. 그 자금으로 자신이 낙찰받은 물건의 대금을 납부하는 것까지.
평범한 사람이라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큰 그림.
머리가 좋은 것뿐만 아니라, 엄청난 배짱이 없다면 시도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내가 미친놈이제. 저런 안줄 알았으면 안 데려오는건데.”
그냥 마석만 받아서 대신 해결해 줄 걸. 아쉬움이 남았다. 분명 유현은 강하고 똑똑하지만, 상대는 그 마스톨이다. 싸움의 프로이자, 이기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도 서슴지 않는 악마 같은 놈이었다.
‘죽지만 마라, 제발.’
한주석은 간절히 빌었다.
지금까지 격투장에서 죽은 사람은 없지만, 앞으로도 없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암묵적인 룰은 말 그대로 불문율일 뿐 제제가 있는 규칙이 아니기 때문이다.
‘니가 뒤져뿌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돌아가나.’
***
사방에서 들려오는 함성.
반투명한 보호막에 막혀 있지만, 함성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귓전을 울렸다.
유현은 관중의 뜨거운 반응을 배경음악 삼아 살짝씩 몸을 흔들었다.
“하하하하하!”
“저놈 씰룩거리는 것 좀 봐라!”
“곧 뒤질 물고기가 파닥거리는 것 같잖아! 하하하!”
유현에게 쏟아지는 관심은 오직 무시뿐이었다.
그는 격투장의 초심자였고, 상대는 57연승의 챔피언이자 유명세가 자자한 마스톨이었으니까.
관중에게 유현은 그저 마스톨의 싸움을 위한 도구였다.
얼마나 시원하게 맞고, 처참하게 당하고, 비참하게 고꾸라질지.
관중들이 기대하는 것은 저 엑스트라가 어떻게 패배할지 뿐이었다.
“와아아아!”
“마스톨! 오늘도 보여달라고!”
“너한테 전재산 다 걸었다!!”
마스톨이 경기장에 올라왔다.
아까와는 달라진 모습.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방어구를 둘렀고, 온갖 무기들이 곳곳에 장착되어 있다.
“아주 단단히 준비해오셨네.”
마스톨은 지금껏 매입한 장비 중 가장 좋은 것들만을 선별해왔다.
자신을 무시한 유현에게 처절한 밑바닥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오늘 너를 격투장 최초의 사망자로 만들어주마.”
격투장의 악마 마스톨.
그의 머릿속에 만신창이가 되어 바닥을 기며 목숨을 구걸하는 유현의 미래가 그려졌다.
“꿇어라, 빌어라, 절망 속에서 과거를 후회하며 죽어라! 크하하하하하하!”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다. 토막내고, 토막내어 격투장의 밑바닥에 영원이 묻어버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나!”
“또 씨부리네. 뭐라는 거야.”
유현은 귓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노란색 귀지를 파냈다.
“끝까지 날 무시하는군.”
이곳에는 질서가 없다.
따라서 심판도 존재하지 않는다.
경기의 시작도, 끝도 링 위에 올라간 싸움꾼이 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 타협이나 대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스톨은 시작을 결정했다.
“처 죽여라!!”
“와아아아아아!”
함성 속에서 마스톨이 유현을 향해 쇄도했다.
갑옷을 둘러 더 비대해진 몸이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
마스톨은 순식간에 유현의 지척에 도달했고, 그대로 유현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유현은 그때까지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그냥 등신이었군.’
마스톨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손에는 오늘 낙찰받은 폭발 장갑이 장착되어 있다.
곧 거대한 폭발이 일며 상대가 박살날 것이다.
“......?”
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주먹이 도착한 자리는 비어 있었다.
“피했어?”
함성이 이어지던 장내가 시간이 멈춘 듯 조용해졌다.
주먹을 뻗은 채 굳어 있던 마스톨은 뒤늦게 자세를 고쳐 잡았다.
몸은 방어 태세를 취했지만,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분명 닿는다고 생각했다. 아니, 상식적으로 닿아야 했다. 그런데 닿지 않았다.
‘왜?’
머릿속으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생각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나보다 빠르다고? 그놈이?’
갑옷을 통해 강화된 신체.
신발에 부여된 특성 – [쾌속]은 폭발적인 움직임을 가능케 만들었다.
실제로도 [쾌속]을 활용한 기습은 누구도 피하지 못했다.
“빠르네.”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톨이 즉각 반응하여 몸을 돌리며 주먹을 뻗었지만, 이번에도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젠장!”
마스톨이 고함치며 유현을 쫓아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나 공격은 번번이 빗나갔고, 그의 인내심은 서서히 한계로 치달았다.
“빠르긴 한데 실속이 없네.”
유현이 좌우로 고개를 흔들고 혓바닥을 내밀며 마스톨을 자극했다.
마스톨의 검은 투구 아래로 그의 눈빛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이 개새끼가!”
마스톨이 갑옷을 벗었다.
쿵 소리를 내며 묵직한 갑옷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아직 한 겹의 갑옷이 더 남아 있었다. 조금 더 가벼워 보이고, 날렵한 생김새의 갑옷이었다.
“처 죽여주마!”
갑옷의 모든 부위가 붉은색 빛을 내기 시작했다.
전신으로 휘몰아치는 마나를 보며 유현은 휘파람을 불었다.
“신기하네. 그것도 나 주는 거냐?”
그 순간, 마스톨의 모습이 사라졌다. 유현은 그 자리에서 허리를 틀며 허공을 향해 힘을 실은 발차기를 날렸다.
쾅!
잔상조차 남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쇄도하던 마스톨이 발차기를 얻어맞고 저편으로 날아갔다.
유현은 혀를 차며 발을 회수했다.
“아까 낙찰받은 장갑인가.”
의도한 건지, 닿은 건지, 폭발과 함께 바짓단 일부가 날아갔다.
‘효과는 좋군.’
과연 돈을 처바른 값을 한다.
게임이든 현실이든 역시 현질이 장땡이라니까.
“아아아아아아악!”
나가떨어졌던 마스톨이 고함과 함께 벌떡 일어났다.
곧장 유현의 눈에 들어온 건 회색빛으로 뒤덮인 그의 복부였다.
“나, 나왔다!”
“그래! 이제 시작이라고!”
“그만 봐줘 병신아!”
고요하던 관중석이 다시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특성인가.’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열광하는 걸 보니 전투와 관련된 능력 같았다.
유현은 슬슬 끝낼 타이밍을 잡았다.
굳이 상대가 강해질 때를 기다려줄 이유가 없었다.
유현이 전신으로 마나를 퍼뜨렸다.
마나로 신체는 더 단단해지고, 유연해졌다.
이어서 남은 마나로 마법을 사용했다. 머릿속으로 복잡한 술식을 그려 마나를 주입하자, 코어의 마나가 빠져나가며 마법으로 뒤바뀌었다.
[강화]
마법의 힘이 두 다리에 깃들었다.
신체의 한 부위를 폭발적으로 강화하는 마법이었다.
***
“젠장할. 존나게 아프네.”
마스톨은 가까스로 특성을 전개하여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다만 그 충격을 모두 상쇄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저장됐어.’
특성 – 리벤지 실드.
충격을 방어하고 흡수하여 비축하는 능력. 그 힘을 그대로 자신의 힘으로 사용할 수 있다.
지금 모인 충격량은 유현의 발차기 한 대 분량. 그것도 굉장히 강했지만, 조금 더 힘을 모아야 했다.
‘어디 갔지?’
마스톨이 유현을 찾아 고개를 들었다. 왜인지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젠장.”
마스톨은 긴장을 삼키며 주머니에서 함정을 꺼내 주위에 뿌렸다.
챠쟈쟈쟉!
바닥에 떨어지자 벌레처럼 곳곳에 자리 잡는 녀석들.
리모트 마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폭탄으로 미리 인식해놓은 폭탄의 주인이 아닌 사람과 접촉하면 터진다.
‘주변에는 없어.’
내심 안심하던 그 순간, 마스톨은 위화감을 느꼈다.
‘내가 왜 여기까지 날라왔지?’
그건 유현의 발차기 때문이었다.
‘그럼 녀석은 대체 어떻게 반응했지?’
그게 의문이었다.
비싼 돈을 주고 구입한 공방일체 갑옷의 공격 모드.
그 속도는 전투기와 비슷하며, 아까 유현과의 거리였다면 순간이동이라고 느꼈을 만한 속도였다.
그런데 반응했다.
날아오는 전투기를 걷어찬 셈이었다.
“......”
마스톨의 호흡이 조금씩 가빠졌다.
고작 한 번이었지만, 유현의 힘을 인지하기에는 충분했다.
상대는 그동안 상대해왔던 정상적인 범주의 인간이 아니었다.
‘죽는다.’
심장이 거칠게 울리며 머리가 달아올랐다. 정신을 좀먹은 두려움이 순식간에 전신을 잠식했다.
완전한 공황.
마스톨은 두려움을 참지 못하고 목에 핏대를 올렷다.
“어디냐! 어디야 개자식아!!”
여전히 조용한 주변. 심상치 않은 마스톨의 모습에 관중석도 덩달아 고요해졌다.
‘젠장, 젠장, 젠장, 젠장.’
조여오는 공포 속에서 그의 머릿속에 기억의 파편이 떠올랐다.
아까 전, 유현을 마주쳤을 때 보았던 잔잔한 바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바다가 언제나 잔잔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시발….”
거센 풍랑 속에서 – 오늘은 역시 출항하지 말 걸 그랬어, 라고 생각해봤자 다가오는 파도 앞에서 도망칠 곳은 없었다.
참으로 어리석고 멍청한 짓이었다.
본능이 보내는 신호를 그때 믿었어야 했는데.
“이제 좀 조용해졌네.”
마스톨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조용하니까 얼마나 좋아.”
격투장에 굉음이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