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완연한 밤이다.
하늘에 낀 먹구름은 어둠을 더 짙게 만들었다. 달빛만이 띄엄띄엄 아카데미를 비추는 가운데, 그런 달빛조차 외면한 하위 클래스의 오래된 기숙사에서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삐걱.
기숙사의 낡은 창문 하나가 열리더니 한 남자가 비밀스럽게 빠져나왔다.
남자는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후.”
유현은 가볍게 호흡을 뱉고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냈다.
그 상태로 기다리길 잠시.
위쪽에서 그림자 하나가 아래로 떨어졌다.
“마, 가자.”
“...덩치치고는 되게 가볍다?”
“이거 다 근육이다. 몰랐나?”
한주석과 유현은 카메라의 눈을 피해 아카데미를 빠져나왔다.
그 과정은 첩보 활동을 방불케 했다.
트랩을 해제하고, 특성으로 설계된 감시 시스템을 회피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하수구를 통해 외부로 나오는 데 성공했다.
돌아가는 길도 함께 마련해두었으니 이후의 걱정은 없었다.
“암시장이 어디야 근데?”
“내만 따라와라.”
한주석이 앞장서고 유현은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어둠 속을 달려 서울의 중심으로 향했다.
남들의 눈을 피해 빌딩의 외벽을 달리거나, 옥상을 뛰어넘기도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사람들로 붐비는 번화가였다. 늦은 시각인데도 불구하고 바글바글했다.
“여기서부턴 걸어간다.”
유현은 한주석을 따라가며 신기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짝이는 간판과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네온사인. 높고 낮은 건물의 사이로 다양한 차림의 사람들이 오갔다.
누구는 파티에 어울리는 복장이었고, 누구는 당장 전장에 뛰어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복장이었다.
“여긴 사람들이 다양하네.”
“처음 와보나?”
고개를 끄덕이는 유현을 보며 한주석이 감탄했다.
“이야~ 헌터 칸다면서 여기 츰 와보는 아는 내도 츰보네.”
“여기가 어딘데?”
“시장. 헌터들이 필요한 물건 사고파는 곳이다. 뭐, 놀데도 검퍼서 저렇게 놀러 나온 일반인들도 많다.”
통칭 ‘헌터 마켓’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전국에 몇 곳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이 많은 광역시에나 있으며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곳은 바로 서울에 거점을 둔 이곳이었다.
헌터들은 헌터 마켓에서 포션이나 무기, 함정이나 스크롤처럼 전투에 필요한 물건들을 구매한다.
워낙 다양한 상품들의 수요가 있는 만큼 헌터 마켓에는 분야를 막론하고 많은 점포가 모여있었다.
커다란 증류기가 설치된 포션 판매장은 물론이고, 직접 장비를 제작하는 대장간 등.
그 사이에 있는 술집이나 주취자들은 바다에 스며든 기름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여기서 어디로 가?”
“잠자코 내만 따라와라.”
오면서 봤던 풍경과는 달리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유흥시설이 많아졌다.
무거운 차림의 헌터들도 드나드는 걸 보니 일반인들만 이런 시설을 이용하는 것 같진 않았다.
두 사람이 멈춘 곳은 사람들이 길게 늘어선 클럽 앞이었다. 여기서부터는 거리의 절반이 유흥시설이었다.
“여기야?”
“여기다.”
“그냥 노는 곳 같은데.”
유현은 사람들 뒤에 줄을 섰다.
“뭐하나?”
“들어가려면 줄 서야지.”
한주석이 유현을 잡아당겼다.
“우리가 놀러온줄 아나. 인마 웃기네.”
클럽의 입구로 성큼성큼 걸어가는 한주석. 곧 커다란 덩치의 가드가 그의 앞을 막았다.
“VIP가 아닌 분은 뒤로 줄을 서주세요.”
“제일 비싼 술, 룸 잡아서 세 병. 잔은 다섯 개.”
“이쪽 분은 동행이십니니까?”
“그래.”
가드가 옆으로 물러나 길을 터주었다. 한주석은 익숙한 듯 지하로 내려갔다.
‘뭐야.’
유현은 줄을 선 사람들과 가드와 한주석의 뒷모습을 차례로 살펴보고는 지하로 내려갔다.
어두운 클럽의 내부. 계단을 전부 내려가자 점잖은 차림의 남자가 옆으로 붙었다.
“안내하겠습니다.”
남자를 따라 클럽 안쪽으로 진입했다. 아직 영업이 시작되기 전이지만, 내부는 음악과 조명으로 시끄러웠다. 전광판에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빛에 유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끝으로 가시면 됩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클럽 내부에 마련된 룸이었다.
남자는 방의 열쇠를 건네주고 떠났다.
“입구에서 무슨 말을 했길래 들여보내줘?”
“암호다, 암호. 나중에 또 암시장 가고 싶으면 내한테 말해라.”
암시장은 온갖 불법행위가 판치는 곳이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도록 출입 위치와 방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진다. 또한, 주기적으로 암호와 방법이 바뀌기에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
“가자.”
한주석은 카드키로 문을 열었다. 제 역할을 다한 카드키가 허공으로 흩어지며 사라졌다.
소리 없이 문이 열리고 강력한 마나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불이 꺼진 방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가구는커녕 의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여기였나….”
벽을 더듬던 한주석이 벽을 향해 마나를 내보냈다.
곧 일렁이는 포탈이 마법처럼 벽 위에 나타났다.
‘장거리 이동마법.’
그 포탈의 정체를 유현은 단번에 눈치챘다. 판대륙에서는 텔레포트 게이트라고 불리는 마법이었다.
“먼저 갈 테니까 따라와라~”
한주석이 포탈 너머로 사라졌다.
유현도 곧장 그 뒤를 따라갔다.
텅 빈 방안. 포탈이 서서히 옅어지며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
마나가 온몸을 훑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지구의 이름 모를 장소에 와 있었다.
“으, 매스껍구마.”
한주석이 얼굴을 찌푸리며 소감을 뱉었다.
그에 반해 유현은 평화로웠다.
“넌 괜찮나?”
“괜찮은데?”
비슷한 걸 많이 써봐서 그런가.
유현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높은 곳에 색색의 빛이 반짝였다.
“별 같제?”
“여기가 대체 어디야? 지구 맞아?”
“아무도 모른다 그건.”
유현이 시선을 내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가로등이 거리를 밝히고, 수많은 가게가 깔려 있었다.
“외국인도 있네.”
“블랙마켓. 우리 말로 카면 암시장이제. 세상 사람들이 다 여기로 모인다.”
지구상에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암시장. 전 세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는 통로를 통해 이곳을 찾아온다.
“이렇게 크면 책임자도 있을 것 같은데.”
“있기야 하겠제. 근데 아무도 모른다.”
암시장의 운영자에 관해서는 성별, 인종, 나이 등. 하나 같이 소문만 무성할 뿐 정확한 정보는 없다.
“자, 이걸로 얼굴 가리라.”
한주석이 유현에게 가면을 건넸다.
“이건 왜?”
“가리기 싫으면 말고. 근데 괜히 얼굴 팔려봤자 좋을 거 없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런 불법적인 곳에서 괜히 얼굴이 알려지면 나중에 어떤 불이익이 생길지 모른다.
실제로 거리를 지나는 사람 중 대부분이 가면을 착용한 상태였다.
유현은 품속에서 자신의 가면을 꺼내 착용했다.
“뭐고. 가면을 들고 다니나?”
“겸사겸사.”
“묵직하게 생깃네. 근디 그게 어떻게 거기서 나오나? 헤안하네.”
혹시나 싶어 아공간 조끼를 착용한 게 도움이 되었다.
“자, 그라믄 갑시더.”
개성 넘치는 가면을 착용한 두 사람은 거리로 섞여들었다.
***
‘괜히 암시장이 아니네.’
암시장을 돌아본 유현의 소감이었다.
두 사람이 포탈을 통해 나온 곳은 중앙에 있는 포탈 관제소.
거기서 동쪽에 있는 마석 거래소까지 가는 동안 그는 온갖 것들을 다 봤다.
어떤 가판은 정육점처럼 몬스터의 시체가 걸려 있고, 어떤 곳은 가판 위에 마약이나 총기들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참으로 당황스럽고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마, 겁나나?”
마석 거래소에 마석을 넘기고 환전을 기다리던 중, 한주석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냥 좀 신기하네.”
“조심해라. 잘못하면 다친다.”
음지의 왕국으로 통하는 블랙 마켓.
외부의 법률이 통하지 않음은 물론,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상식이나 윤리적 의식이 결여된 장소다.
“어깨 부딪히면 등에 칼 꽂히냐?”
“그럴 수도 있제.”
살인조차 허용되는 공간.
관리인이 있지만, 돈만 쥐여주면 살인도 눈감아준다. 암시장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별로 위험해 보이지는 않는데.”
“여긴 그나마 중심가라서 그렇제. 좀만 깊숙이 들어가면 분위기 장난 아이다.”
“그럼 돈 바꾸고 좀 더 돌아보자.”
가면 아래로 드러난 한주석의 입이 일그러졌다.
“돌았나? 위험하다캤잖아.”
“재밌을 것 같은데.”
“재밌긴 하제. 헤안한 게 억수로 많으니까. 도박장도 있고, 경매장도 있다.”
경매장이라는 말에 유현의 흥미가 한층 깊어졌다.
“넌 가고 싶으면 돌아가. 난 좀 더 돌아볼 테니까.”
“마, 니 그러다 일치른다.”
“그럼 탈출하지 뭐.”
“그게 쉬운 일이 아이라고...”
마침 유현의 번호가 불렸다.
유현은 창구로 가 돈이 담긴 블랙마켓 전용 통장을 수령했다.
블랙마켓 전용 어플을 통해 송금을 요청하면, 일정 시간이 지난 뒤 요청한 계좌로 돈을 넣어준다고 한다.
‘현찰로 받는 것보다 편하네.’
두 사람은 경비가 삼엄한 거래소를 빠져나왔다.
이걸로 암시장에서의 볼일은 끝났다. 하지만 유현은 바로 떠날 생각이 없었다.
“진짜 갈거가?”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긴 아쉽지.”
“이야, 인마 진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주석은 유현과 함께 경매장까지 동행했다.
“여기가 경매장이다. 경매는 일주일에 한 번 있는데, 마침 오늘 있네. 몇 시간 있으면 시작할 거다.”
“그것도 보고 가야겠네.”
“뭐하러 보나? 살 것도 아이면서.”
“혹시 모르지.”
한주석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어딘가로 향했다. 그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유현은 경매장을 나와 다른 곳을 둘러보았다.
‘저건 격투장인가?’
경매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중앙에 커다란 링이 설치되어 있고, 주변에는 관중석이 설치된 장소가 있었다. 매표소에 사람의 이름이나 배당이 적힌 걸 보니 아마 돈을 걸고 서로 싸우는 곳 같았다.
‘챔피언도 있네.’
그것도 무려 57연승의 챔피언이었다. 챔피언의 다음 상대도 10연승의 강한 상대였지만, 배당 차이가 압도적이다.
“마, 그거 잠깐 자리 비웠다고 그새 여까지 왔나.”
그때, 사라졌던 한주석이 다시 나타났다. 손에는 웬 팜플렛이 들려 있었다.
“뭐야 그건?”
“경매 카탈로그다. 오늘 뭐 나오는 지는 알고 봐야제.”
카탈로그에는 금일 경매에 출품되는 물품들의 목록과 경매 유의사항이 적혀 있었다.
유의사항을 대충 읽은 유현은 페이지를 넘겼다.
곧장 보이는 인상적인 사진.
크고 작은 눈알들이 목걸이처럼 연결된 모습이었다.
“몬스터 눈알 목걸이?”
“토템아이가? 아이티 출신 유명 주술사가 만든 거라고 쓰있네.”
“별 걸 다 파네.”
유현은 페이지를 넘기며 물건들을 살폈다.
몬스터 눈알 목걸이처럼 해괴한 것들도 있었지만, 던전에서 나온 아티팩트같은 희귀한 물건들도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던 중, 마지막 페이지의 물건이 유현의 시선을 끌었다.
‘이거….’
어디선가 본 듯한 낯익은 모양새.
유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표면에 별장식이 새겨진 팔 보호대.
별의 모서리에는 작은 홈들이 파여 있었다.
판대륙에서 자주 보던 물건으로, 홈에 마석을 끼워 필요할 때 마나를 가져와 사용하는 보조 도구였다.
‘내가 아는 물건이 맞나?’
아래의 설명을 읽었다.
일단 용도는 자신이 알던 것과 비슷하다.
‘사야겠어.’
우연히 용도나 생김새가 겹쳤을 확률이 높다. 판대륙의 물건이 애초에 이곳에 있을 리 없으니까.
하지만 설령 판대륙의 물건이 아니라고 해도 큰 손해는 아니었다.
마나가 부족한 지금, 이런 식의 보조 도구가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