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띵-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만화책을 보던 유현은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로비 버튼을 눌렀다.
“키킥.”
재밌는 장면을 보며 입가를 씰룩거리던 와중, 엘리베이터가 중간에 멈췄다.
문이 열렸지만, 아무도 타지 않았다.
문을 닫기 위해 버튼을 누르려던 유현은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륵 닫혔다.
턱.
한서희가 재빨리 발을 밀어 넣어 엘리베이터의 문을 다시 열었다.
“왜, 왜 거기서 와요?”
한서희는 꼭대기 층에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확인하고, 유현에 대해 경고하기 위해 나온 차였다.
꼭대기 층에 거주하는 건 서혜빈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유현을 발견했으니,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얘기 좀 했어.”
“무슨 얘기요?”
“걔가 내 팬티를 가져가서 따끔하게 혼내줬지.”
“......팬티요?”
“어. 이거.”
유현이 주머니에 고이 접어 넣어놓은 팬티를 꺼냈다.
초록색 세종대왕의 자태에 한서희가 눈을 질끈 감으며 질색을 했다.
“아, 안 보여줘도 돼요!”
유현은 다시 팬티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대체 그 여자는 당신 속옷을 왜 가져간 거래요?”
“골탕 먹이려고 그랬대.”
“왜요? 예전에는 영입까지 하려고 했었잖아요.”
유현은 조금 전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던 한서희는 어처구니가 없다가도, 상대가 서혜빈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는 다 끝난 건가요?”
“확실하게 이야기했으니 다시 건들지는 않겠지.”
“다행이네요.”
아무리 서혜빈이라도 그렇게까지 말했는데 더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다.
“탈 거야?”
“아뇨. 가세요.”
한서희가 엘리베이터에서 발을 뺐다.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면 위층에 올라갈 용무도 없다.
“나중에 보자고.”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내려간다. 그 순간, 한서희는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
예능 프로그램의 높은 웃음소리가 고요한 거실에 울려 퍼졌다.
허공으로 흩어지는 소음 속에서 서혜빈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거실을 정리했다.
유현이 두고 간 벌레시체를 버리고 상한 우유를 처분한다.
“......”
정리를 마치고 멍하니 TV를 보던 그녀는 곧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직접 하지 않았을 청소를 시작했다. 빨랫감을 한곳에 모으고 널브러진 책들도 다시 책장에 가져다 꽂았다.
마지막으로 청소기를 돌린 뒤, 침대 위에 몸을 던졌다.
“후우-”
메마른 입술 사이로 한숨이 빠져나왔다.
‘그 사람은 대체 뭘까.’
하얀 천장을 보며 좀 전의 상황을 그렸다.
몇 번 본 적도 없는 사람에게 당한 수모. 불쾌함은 없었다. 그게 참 신기했다. 모욕을 당했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니.
‘왜지?’
옆으로 돌아누워 실밥이 터진 인형을 끌어안았다.
‘너무 무서워서?’
불현듯 그가 풍기던 살벌한 분위기를 떠올린 서혜빈은 흠칫하며 몸을 떨었다.
확실히 공포의 영향도 있었다.
그래도 그게 다는 아니었다.
‘되게 나이 든 사람 같았어.’
자신의 감정을 절제 할 줄 알고,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알며, 힘을 무턱대고 휘두르지 않는 사람.
그녀의 머릿속에 어린 시절을 함께 했떤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맞아. 할아버지 같았어.’
서혜빈은 유현에게서 연륜을 느꼈다. 할아버지의 호통처럼 조금은 날이 서 있지만, 그 속은 잔잔하고 따뜻한 바다 같았다.
‘신기하네.’
서혜빈의 마음은 한층 늘어졌다.
복수를 계획했다는 것도 완전히 잊은 채, 유현이 했던 말들을 곱씹으며, 할아버지와의 과거를 추억했다.
***
“등급 테스트는 1년에 한 번밖에 없으니까 다들 잘 준비해라.”
등급 테스트까지 앞으로 한 달 반.
안칠성은 그 말과 함께 종례를 끝냈다.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교실을 빠져나갔고, 유현 역시 손에 만화책을 든 채 교실을 나섰다.
“크으~ 아주 대단한 용기야.”
모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으로 에피소드가 마무리됐다.
유현은 가방에 만화책을 집어넣고 다음 권을 꺼냈다.
며칠 전, 서혜빈의 집에 갔을 때 보상을 명목으로 가져온 만화책이었다.
“현아!”
먼저 다른 친구들과 함께 나갔던 주시하가 급히 되돌아왔다.
“같이 가자!”
“먼저 가도 돼.”
“아냐, 오늘은 걸어가려고. 너랑 같이 갈래.”
유현은 만화책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고, 주시하와 함께 교정을 걸었다.
셔틀이 두 사람의 옆으로 지나갔다.
기숙사까지 가는 건 셔틀이 가장 빠르지만, 유현은 매일 이 길을 걸어 다녔다.
양쪽 가장자리에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가로수들. 그사이에 놓인 이면 도로를 걷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는 했다.
풀 내음은 향긋했고, 그늘은 시원했다. 유현은 이곳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하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거나, 책을 읽었다.
‘내일은 점심으로 뭘 먹지.’
오늘도 평소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걸었다. 옆에 주시하가 있지만, 두 사람 다 서로의 존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함께 걸어가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을 뿐이었다.
‘돈까스? 아냐, 그건 어제 먹었어.’
식당의 음식은 돈을 주고 사 먹거나 복지 포인트를 이용해 구매할 수 있다. 물론 유현은 한서희에게 갚아야 할 포인트가 있기에 매번 돈으로 사먹었다.
‘쌀국수를 먹을까.’
이국의 음식을 상상하며 군침을 삼키던 그때.
-뾰로롱!
옆에서 괴상한 효과음이 났다.
유현의 고개가 자연스레 주시하의 휴대전화로 돌아갔다.
작은 화면 위로 웬 캐릭터 하나가 반짝이고 있다.
“아, 꽝이네.”
“뭐야 그게?”
“뽑기해서 좋은 게 떴는데 이미 가지고 있는 거야.”
유현은 좀 더 자세히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화려한 3D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세계. 컴퓨터 게임에서나 볼법한 세계가 작은 화면 속에 펼쳐져 있었다.
“게임이야? 재밌어 보이네.”
“너도 해볼래?”
유현은 구미가 당겼다.
한 번쯤은 게임을 해보고 싶었다.
다만 집에 있는 컴퓨터는 사양이 좋지 않아 서핑 용도로밖에 쓸 수 없었다.
그런데 겨우 휴대전화로 저런 게임을 할 수 있다니. 지금까지 전화와 문자로만 쓰던 휴대전화의 새 발견이었다.
“해볼까?”
최근에 수행평가도 끝나서 무료하던 차였다.
만화책을 읽는 것도 재밌지만, 다른 오락 수단을 만들어두는 것도 시간을 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내가 깔아줄게.”
주시하는 유현의 휴대전화에 자신이 하던 게임을 깔아주었다.
그리고 그게 중독의 시작이었다.
* * *
“아, 십발!”
게임을 시작하고 일주일.
완전히 게임에 빠져버린 유현은 교실은 물론 기숙사에서도 휴대전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 새끼들 자꾸 돈만 처먹고 아바타를 안 주네!”
“원래 뽑기 어려워.”
침대 아래쪽에서 주시하가 말했다.
그 역시 유현과 같은 게임을 플레이 중이었다.
“넌 현질 얼마나 했냐?”
“난 많이 안 했어. 한 10정도?”
“하, 씨. 그거밖에 안 했는데 신화급 아바타를 두 개나 뽑았어?”
“헤헤. 내가 운이 좋나봐.”
유현은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렸다. 이번 기간 한정 아바타는 반드시 뽑아야 한다. 성능도 성능이지만, 디자인이 역대급이었다.
‘돈 벌 방법 없나?’
부모님한테 드린 돈을 현질하게 다시 달라고 하는 건 좀 그렇고.
그렇다고 무단으로 학교를 이탈하여 게이트에 처들어갈 수도 없었다.
설령 그런다고 해도 얻은 마석을 처리할 방법이 없다. 한서희도 더는 도와주지 않는다고 했었으니까.
‘흐음.’
불현듯 과거의 기억이 뇌리에 스쳤다.
언젠가 한서희가 말해주었던 헌터 아카데미의 ‘의뢰’ 시스템.
그걸로 돈도 벌고 포인트도 얻을 수 있다고 들었다.
“너 혹시 의뢰라고 알아?”
유현이 침대 아래로 머리를 내밀었다.
“의뢰? 들어는 봤는데. 왜?”
“아바타 좀 뽑게.”
“......”
주시하는 잠깐 지난날을 후회했다.
괜히 게임을 알려줘서 자신의 친구를 수렁으로 밀어버린 것 같았다.
“현아. 게임은 게임으로만 즐기는 게 좋아.”
“시끄럽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나 알려줘. 예전에 알았는데 까먹었다.”
“학교 끝나고 하는 거라 많이 힘들 텐데.”
“상관없어.”
유현의 머릿속에는 오직 게임 생각뿐이었다.
좋은 아바타를 뽑아 레벨을 빠르게 올린다. 그리고 결투장에서 더 많은 승리를 거머쥔다. 그다음 길드를 만들어 서버 최강이 되는 게 그의 최종 목표다.
‘그걸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해.’
난생처음 해본 모바일 게임에 유현은 아주 깊이 빠져들었다.
* * *
“뭐, 뭐?”
“현질이요.”
담당 학생의 의뢰 수행 사유가 ‘게임에 돈을 쓰기 위하여’라는 걸 알게 된 안칠성은 할 말을 잃었다.
“게임에 왜 돈을 써?”
“강해지려고요. 애들 사교육 시키는 거랑 비슷해요.”
“게임 캐릭터가 네 자식이야?”
“제가 시간 들여서 1렙부터 키웠으니 자식이죠.”
궤변처럼 들리면서도 맞는 말 같은 건 당당한 태도 때문일까.
안칠성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허가 서류에 사인을 해주었다.
다른 아이라면 몰라도 유현이라면 믿을 수 있었으니까. 사유가 어떻든 의뢰를 대충 수행할 녀석은 아니었다.
“근데 너 의뢰가 뭔지는 알고 하겠다는 거냐?”
“심부름꾼 아니에요?”
“......비슷해. 다만 네 생활 기록부에 꼼꼼히 기록되지. 의뢰 수행 태도는 어땠는지, 의뢰인에게 예의는 지켰는지, 의뢰 결과는 만족스러웠는지 등등.”
“복잡하네요.”
“그리고 네가 받을 수 있는 의뢰는 보수가 적은데 노동 강도는 높은 의뢰밖에 없을 거다. 낮은 등급에게 배정되는 의뢰들은 하나 같이 그렇거든.”
유현이 손을 들어 안칠성의 설명을 제지했다.
“그냥 몸으로 직접 뛰어볼게요.”
“후후, 내 설명은 재미없단 거냐?”
안칠성이 전산 작업을 마친 뒤 유현에게 학생증을 돌려주었다.
이제 유현에게는 의뢰가 있다면 정당하게 학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권리가 생겼다.
“의뢰 끝나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들어와라. 그 안에 체크 안 되면 벌점이니까.”
“예~”
교무실을 나온 유현은 그 옆에 있던 의뢰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책상이 즐비한 다른 교실과는 달리 내부가 깔끔했다.
의뢰 확인용 PC 몇 대가 늘어서 있고, 관리 요원 두 명이 접수원처럼 점잖게 앉아있었다.
유현은 의뢰 확인용 pc 앞에 앉아 자신의 학생증을 인식시켰다.
곧 의뢰 프로그램이 새로고침 되며 F등급이 수주할 수 있는 의뢰가 나타났다.
‘하나 같이 보수가 적네.’
F등급 의뢰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차라리 등급 테스트를 치른 다음에 의뢰를 받을까 생각도 했지만, 그때가 되면 아바타의 판매 기간이 끝난다.
“어쩔 수 없지.”
마우스를 드르륵거리던 유현은 이내 그나마 괜찮은 의뢰 하나를 선택하여 수주했다.
곧 해당 의뢰가 목록에서 사라지더니, 유현의 휴대전화에 알림이 울렸다.
“오? 이런 것도 있네.”
유현은 헌터 아카데미의 학생 어플을 열었다.
조금 전 수주한 의뢰가 어플에 표시되고 있었다.
“의뢰 메뉴가 따로 있잖아?”
어플에는 의뢰의 단독 카테고리가 있었다. 들어가 보니 의뢰의 확인은 물론 수주도 가능했고, 현재 받은 의뢰의 목록도 확인할 수 있었다.
“좋은데.”
유현은 만족스러움을 느끼며 의뢰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