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다음 날.
금태양은 등교하지 않았다.
안칠성은 아이들에게 어제 테스트의 영향으로 금태양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주시하를 보며 슬며시 웃는 걸 보니 내막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다들 오늘 하루도 수고해라.”
조례를 마친 안칠성이 교실에서 나갔다. 옆에서 주시하가 실실거리는 게 들려왔다.
“좋냐?”
“응. 완전 좋아.”
“선생님이 아는 것 같은데?”
“아, 어제 저녁에 선생님한테 이야기했어. 그동안 있었던 일이랑, 내가 때린 것까지.”
안칠성은 그 이야기를 모두 듣고 주시하를 다독였다고 한다. 그동안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선생님한테 진작 말할 걸 그랬나?”
“글쎄다. 그랬으면 못 때렸을걸?”
“그건 싫다.”
주시하가 주먹을 쥐었다 펴며 웃었다.
“학교에서 벌 받는 것보다 내가 때리는 게 제일 시원해.”
“손맛을 알았구나.”
유현이 주시하의 어깨에 팔을 두른 그때였다.
“저기.”
“시, 시하야?”
반의 아이들이 주시하의 자리에 모였다. 느닷없는 관심에 주시하의 눈이 커졌다.
“나, 나?”
“응. 어제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진짜 멋있었어!”
유현은 씩 웃으며 자리를 피했다.
곧 그의 자리까지 아이들이 침범하여 주시하에게 질문 공세를 날렸다.
‘이제 시하도 인싸가 되는 건가.’
친한 친구의 관계가 넓어지는 건 언제나 환영이다.
물론 앞으로는 주시하를 독점할 수 없다는 소리도 되겠지만, 어쩔 수 없다.
‘친구가 많이 생기면 내가 없어도 잘 지낼 수 있을 테니까.’
한 달 반 정도 남은 등급 테스트.
테스트의 결과에 따라 서로의 반이 갈릴 것이고, 갈라질 확률이 높다.
‘적당히 할 생각은 없어.’
유현이 굳이 하위 클래스에 머무르려고 했던 이유는 욕심이 없는 탓도 있었지만 주시하 탓이 컸다.
친한 친구를 외롭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주시하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긴다면 머뭇거릴 이유가 사라진다.
‘상위 클래스로 가자.’
어제 상위 클래스의 시설을 맛본 유현은 마음을 바꿔 먹었다.
이왕 아카데미에서 시간을 보낼 거라면 인생에서 누려본 적 없는 즐거운 일들을 해보자고.
주시하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기고, 자신은 새로운 즐거움을 얻고.
서로에게 좋은 선택지였다.
“얘들아, 1교시 이동수업이니까 교과서 챙겨~”
학급 반장이 앞에서 크게 소리쳤다.
그 말에 유현은 교실을 나와 복도에 있는 사물함으로 향했다.
수업 시간에는 잠만 자지만, 교과서는 성실하게 챙기는 학생이었다.
“음?”
유현의 눈이 텅 빈 사물함을 응시했다. 교과서가 모두 사라졌다.
“......”
유현은 다시 사물함을 닫았다.
교과서를 도둑질하다니. 그 정도로 공부가 하고 싶다면, 유현은 기꺼이 자신의 교과서를 내줄 용의가 있었다.
“대단한 학구열이야.”
이름 모를 도둑을 칭찬한 유현은 금태양의 사물함을 열어 교과서를 챙겼다.
* * *
“왜 저렇게 태연하지?”
멀찍이서 자신의 복수를 지켜보던 서혜빈이 입술을 잘근거렸다.
당장 수업에 들어가야 하는 학생에게 교과서가 사라졌다는 건 상당히 큰 일. 하지만 유현은 별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좀 더 당황하고, 초조해하는 반응을 기대했던 서혜빈은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제대로 훔친 거 맞아?”
“맞습니다.”
하성진은 유현의 이름이 적힌 교과서를 보여주었다.
“그럼 대체 왜 저렇게... 어, 어! 뭐야!”
다른 아이의 사물함을 뒤져 교과서를 꺼내는 유현을 보며 서혜빈이 입을 벌렸다.
“저, 저, 저런 나쁜 짓을-”
“저희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유가 있잖아! 근데 쟤는 지금 무고한 학생의 교과서를 훔치고 있다고!”
하성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게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건가.
“이건 실패야. 다른 돌파구가 있었기에 저렇게 당황하지 않은 거였어.”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시끄러워. 아무튼, 유현의 인성을 고려하지 못한 우리의 패착이었네. 다음으로 가자.”
당차게 하위 클래스의 복도를 떠나는 서혜빈.
모습을 감춘답시고 어색하게 분장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하성진은 한숨을 쉬었다.
***
그날, 유현은 제법 많은 일에 시달렸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우유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다던가, 책상 서랍에서 벌레들이 잔뜩 기어 나온다던가, 모르는 번호로 엄청난 양의 스팸 문자가 온다던가, 건조대에 널어둔 속옷이 사라진다던가.
그 범인이 누구인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안 되겠다.”
베란다의 건조대에서 자신의 속옷이 사라진 걸 확인한 유현은 곧장 베란다 아래로 뛰어내렸다.
동급생이 착각하고 가져갈 만큼 평범하게 생긴 속옷이 아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빨래집게 여러 개를 동원하여 건조대에 묶어두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없어졌다는 건 누군가의 의도라는 뜻이었다.
‘서혜빈.’
유현이 맨발로 아스팔트 위를 질주한다.
어제 한서희와의 대화를 통해 당분간은 서혜빈을 지켜보기로 했다.
또다시 일을 일으킨다면 자기가 나설 테니 말해달라고 하여 유현도 받아들였다.
하지만 속옷까지 가져간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건 직접 해결해야 할 일이다.
‘죽인다.’
어머니가 사 주셨던 아주 소중한 속옷. 집에 돈이 들어오라는 뜻이 담긴 지폐 모양 사각팬티였다.
그 소중한 물건을 서혜빈이 가져갔다. 상한 우유도, 도둑질도, 벌레도, 스팸 문자도 다 참았지만, 그것만큼은 참을 수 없었다.
유현은 순식간에 상위 클래스의 기숙사 단지 앞에 도착했다.
어제처럼 문을 통해 들어가는 대신 담을 뛰어넘어 곧장 단지 내로 들어갔다.
“킁킁.”
마나와 마법을 활용하여 후각을 극대화한 유현. 얼마 지나지 않아 낯익은 냄새를 포착했다.
“찾았다.”
마주친 건 고작해야 두 번뿐. 하지만 몸에서 풍기던 고유한 체취만큼은 확실하게 후각에 남았다.
유현은 냄새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곳곳에 가로등이 켜진 어두운 단지 내. 어둠에 몸을 숨겨가며 천천히 서혜빈에게 가까워졌다.
그렇게 걸음이 멈춘 곳은 어제 찾아왔던 A동이었다.
유현은 건물의 내부로 들어가는 대신 벽에 가까이 붙었다.
이윽고, 마치 거미처럼 벽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상당히 기괴한 모습이었다.
냄새를 쫓던 유현은 꼭대기 층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여기군.’
유현은 베란다의 문을 밀었다.
잠겨있으면 깨려고 했는데, 다행히 열려있어서 그대로 들어갔다.
불이 꺼진 내부. 방인 것 같다.
벽을 더듬어 조심스레 스위치를 눌렀다. 방 안이 환해졌다.
“서재?”
벽면은 온통 책장이 장식했고 책장마다 빼곡하게 책들이 들어찼다.
유현은 조심스레 책장을 살폈다.
[유부남의 유혹 1권]
[나 혼자만 여자 1권]
[이세계 불륜남으로부터 살아남기 1권]
[쓰레기 같은 남자들만 꼬이는 이유에 대하여 1권]
[악덕 영주 사용 설명서 1권]
“제목들이 하나 같이…….”
유현은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아두고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바로 보이는 복도. 우측이 거실인지 TV 소리와 불빛이 새어 들어왔다.
“꺄하하하하!”
서혜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 속옷을 가져가 놓고 저렇게 웃고 있다니.
유현은 주먹을 불끈 쥐고는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복도를 지나 거실로 향했다.
“하하하─ 꺄아아아아악!”
소파에 누워 배를 긁적이던 서혜빈이 유현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높은 비명에 유현도 멈칫했다.
“꺄아아아아악!”
서혜빈이 비명을 이어가며 허둥지둥 소파 뒤로 몸을 숨겼다.
쿵- 하며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동시에 비명도 끊겼다.
“아, 씨. 아파라.”
소파 뒤에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뒤이어 소파 위로 머리가 빼꼼 올라왔다.
“너, 너 뭐야!”
“내 팬티 내놔.”
“신고한다!? 이거 범죄야!”
“그럼 네가 팬티 가져간 건 합법이고? 빨리 내놔!”
서혜빈의 눈썹이 뒤틀린다. 마치 그게 무슨 소리냐고 이야기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네 팬티를 왜 나한테 와서 찾아!”
“전적이 있으니까. 모른 척하려는 건 아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서혜빈은 태연하게 발뺌했다.
그가 말하는 건 분명 오늘 있었던 일들일 터.
하지만 거기에 자신이 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혹시 증거가 남을까 싶어 하성진을 동원하기도 했으니, 지금 저건 허풍이다.
“이거 처음 봐?”
유현이 주머니에서 벌레시체를 뭉텅이로 꺼내 툭 던졌다.
“꺄아아아악!”
“이것도 있어.”
상한 우유도 벌레 옆에 던져놓는다.
“이, 이걸 버려야지 왜 지금까지 가지고 있어!”
“어라, 뭔지 아는 눈치네.”
서혜빈이 아차했다.
이내 헛기침을 하며 다시 허풍을 뱉었다.
“내가 안 그랬어.”
“자꾸 거짓말할래?”
유현의 살벌한 눈빛에 서혜빈이 움츠러들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날카로운 기세. 더는 거짓말을 이어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
“팬티 어딨어?”
“바, 방안에…….”
“방이 어딘데?”
서혜빈이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달아오른 얼굴은 마치 홍당무 같았다.
“그, 근데 내가 훔친 건 아니야!”
유현은 들은 체도 않고 방 안에 들어갔다.
다른 건 몰라도 자기가 훔친 건 아니라는 건 믿어줬으면 좋겠는데.
‘아, 진짜 하성진.’
뭔가 소중해 보이는 걸 훔쳐 오라고 말했다. 그게 설마 팬티일 거라고는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고.
‘저 더러운 걸 버리지도 못하고.’
돈으로 디자인된 속옷.
괜히 버리거나 소각했다가는 가문에 금전적인 손해가 초래할 것 같아 바닥에 던져두었다.
이렇게 들킬 줄 알았다면, 어디 구석에라도 처박아두는 건데.
“하아.”
한숨을 쉬던 서혜빈은 그제야 자신의 방이 어지럽혀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종일 유현을 괴롭히다가 청소 서비스 부른다는 걸 깜빡해버렸다.
‘아, 안돼!’
서혜빈은 황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곧장 눈에 들어온 건 속옷이 잔뜩 늘어진 침대에 걸터앉은 유현의 모습이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엉?”
“팬티만 가지고 나와야지!”
“아, 미안. 근데 너도 이거 보냐?”
유현이 들고 있던 만화책을 흔들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
“......맞아.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유현이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일어나 바닥에 앉는다.
“너도 와서 앉아봐.”
“이, 일단 방에서 나가.”
두 사람은 거실로 나와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TV에서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이 송출되고 있었다.
“저게 재밌냐?”
“재밌으니까 보지.”
유현은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고요한 집안. 서혜빈이 어색하게 유현을 바라보았다.
“팬티 챙겼으니까 이제 가.”
“할 이야기가 아주 많은데?”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까.
고작 하루 만에 많은 일이 일어나서 유현은 잠시 기억을 되짚었다.
그 시작은 어제 있던 과제였다.
“어제 나온 몬스터. 네 짓이지?”
“그래.”
서혜빈은 발뺌하지 않았다.
유현이 여기까지 온 이상 시치미떼봤자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왜 그랬냐?”
“내가 말했잖아. 너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겠다고.”
“그랬었나?”
“그랬어!”
유현이 코웃음 쳤다.
“고작 그걸로 피눈물이 날 것 같아?”
“피, 피눈물까지는 아니더라도 친구가 다쳤으면 울긴 울었겠지.”
“안 울어. 대신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네가 우리가 지금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진 않겠지.”
순간 서혜빈은 목덜미에 솜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지지 않기 위해 억지로 목에 핏대를 세웠다.
“다, 다 너 때문이야!”
“나 때문이라고?”
“네가 나한테 그런 말만 안 했으면 내가 이럴 일도 없었어!”
고개를 갸웃하는 유현에게 서혜빈이 자신이 이런 일을 벌인 원인을 설명했다.
설명을 모두 들은 유현은 어처구니 없는 웃음을 흘렸다.
“야, 너는 그게 언제적 일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냐.”
“너도 나였으면 못 잊었을 걸?”
“그건 미안하게 됐다. 그냥 그때는 짜증이 났나 보네.”
서혜빈은 당황스러웠다.
여기서 갑자기 사과를 한다고?
이건 상정 범위 이외의 행동이었다.
“네가 사과하면 내가 한 일은 뭐가 돼?”
“너도 나한테 사과하면 되지.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꿍한 얼굴로 입을 다무는 서혜빈.
논리적인 답이었으나 그녀가 원하는 답은 아니었다. 여기서 사과하고 찝찝하게 끝나는 건 원하지 않았다.
“난 사과 안 해. 그리고 네 사과도 안 받아.”
“피곤하게 사네.”
“또 심한 말 한다.”
이 말의 어디가 심한 건지 유현으로서는 모를 노릇이었다.
“그냥 하나만 말할게. 앞으로는 건들지 마. 나도, 내 주변 사람들도.”
“싫어.”
유현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이건 조언이나 충고가 아니야. 경고지.”
서혜빈이 흠칫 몸을 떨었다.
고작 말뿐이었지만, 그 무게감은 어떠한 협박보다도 강했다.
“언제까지 네 집안이 너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아?”
유현이 서혜빈의 손목을 붙잡았다.
서혜빈은 뿌리치고 싶었지만, 손목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마치 손목이 잘린 것 같은 감각.
고통이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그녀의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아파…. 아파….”
유현은 손목을 놓았다.
손목 위로 새빨간 자국이 남았다.
“다음에는 이걸로 안 끝나.”
세상에서 가장 간단하고 쉬운 힘의 담론. 누구에게나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
유현은 서혜빈의 방으로 들어가 만화책들을 챙겨 나왔다.
“이건 보상으로 챙겨간다.”
그때까지도 서혜빈은 움직이지 못했다. 이토록 가까이서 죽음의 공포를 느껴본 것은 처음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