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아카데미에 입학한 이후 유현은 처음으로 집에서 주말을 맞이했다.
“오빠아아아아!”
방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유현이 베개를 뒤집어썼다.
쿵쾅거리는 울림이 가까워지더니 벌컥 문이 열렸다.
“오빠! 일어나아아아!”
유하연이 침대 위로 올라가 유현을 거칠게 흔들었다.
새벽에 돌아온 유현은 잠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판대륙에서는 제대로 잠을 잘 수 없어 잠이 없었지만, 지구의 평화 속에서 수면욕을 되찾은 그였다.
“하연아, 오빠 힘들어.”
“놀자~ 일어나~”
오랜만에 오빠와 보내는 휴일.
유하연은 이날을 절대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았다.
“놀이터 가자!”
“언니랑 가.”
“언니 친구랑 놀러 갔어!”
“엄마랑 아빠 있잖아.”
“둘 다 출근했어!”
유현이 한숨을 쉬었다.
평소에는 유희연이 주말에 동생을 돌본다.
그런데 오늘은 잽싸게 나간 걸 보면 애초에 동생을 떠넘길 생각이었던 것 같다.
‘고얀 자식.’
유현은 주섬주섬 침대에서 일어났다.
자신이 학교에 있는 동안 막내를 돌보는 건 동생이니 이 정도는 눈감아 주는 수밖에.
“가자, 가.”
“와아악!”
유하연이 비명을 지르며 방을 빠져나갔다.
“목청도 좋아.”
두 사람은 곧장 집을 나섰다.
단지 내 놀이터로 향하려던 유현을 유하연이 붙잡았다.
“여긴 친구들 없어.”
“그럼 어디로 가게?”
“어린이집 놀이터.”
거기까지 간다고?
유현은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동생을 놀아줄 수 있는 날은 많지 않으니 최대한 동생이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었다.
“날씨는 좋네.”
버스를 타고 한참을 이동해 어린이집에 도착했다. 어린이집이 쉬는 날이라 그런지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없는데?”
“괜찮아! 그네 밀어줘!”
유하연이 쪼르르 그네로 달려갔다.
유현은 그네 뒤에 서서 천천히 그네를 밀었다.
‘이럴 거면 여기까지 안 와도 됐을 거 같은데.’
조금씩 빨라지는 그네의 속도.
고도가 서서히 높아졌다.
유하연은 겁먹은 기색도 없이 재밌다며 소리를 질러댔다.
“와하하! 짱 빠르다!”
“안 떨어지게 꽉 잡아.”
“꺄하하하하!”
유현은 그네를 힘차게 한 차례 더 밀어버린 후 그네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나무의 그늘이 햇빛을 가렸다.
적당한 온도. 유현은 몸이 나른해지는 걸 느꼈다.
‘한숨 잘까.’
동생이야 잘 놀고 있고, 필요하면 부를 테니 잠깐 정도라면 눈을 붙여도 될 것 같다.
유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천천히 졸음이 밀려온다.
.
.
.
“내가 먼저 놀고 있었잖아!”
“어쩌라고!”
일련의 소란이 들려왔다.
감았던 눈을 게슴츠레 뜨는 유현.
놀이기구를 두고 대치 중인 아이들이 보였다.
한쪽은 동생이었고, 다른 쪽은 처음 보는 아이들이었다.
저들끼리 놀러 나온 건지 보호자는 보이지 않았다.
“비키라고!”
남자아이 하나가 유하연을 밀쳤다.
넘어지는가 싶더니 팔을 허우적거려 뒤로 몇 발자국 밀려나는 데 그쳤다.
“왜 밀어!”
“그럼 비키던가!”
“내가 먼저 놀고 있었다니까!”
빼액거리며 고성으로 싸우는 아이들.
남자아이들이 유하연을 위협하듯 동시에 앞으로 다가왔다.
“가라고!”
“맞아. 맞기 전에 가!”
유하연은 씩씩거리며 그들을 노려보더니 이내 홱 몸을 돌려 벤치로 다가왔다.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이다.
“짜증 나.”
“오빠가 도와줄까?”
“싫어.”
입술은 댓 발 나와놓고 고집부리기는.
유현은 잠자코 앉아 있었다.
싫다는 데 굳이 나설 생각은 없었다.
“그럼 이제 집에 갈까?”
“그것도 싫어.”
유하연이 벤치에서 껑충 내려왔다.
“나 저거 안 탈래. 오빠 나랑 시소 타자.”
유현은 속으로 혀를 차며 시소로 움직였다.
시소에 올랐지만 무게 중심이 맞지 않은 탓에 유현 쪽으로 기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빠! 다리 좀 들어봐!”
“그럼 내가 조종하는 거잖아.”
“빨리이!”
유현은 동생이 시키는 대로 다리를 움직였다. 시소가 다리의 움직임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
“하하하!”
조금 전까지 짜증을 부리던 유하연은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
유현 역시 즐거워하는 동생을 보며 웃었다.
“재밌어?”
“짱 재밌어!”
유하연은 오빠와 보내는 이 시간이 너무나 즐거운 한편, 무서운 마음도 들었다.
유현이 사라졌던 지난 1년.
유하연은 유현의 환각을 볼 정도로 그를 그리워했다.
하나뿐인 오빠. 언제나 잘 놀아주고, 즐겁게 해주던 사람.
어린 그녀에게 유현의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하연아, 갑자기 왜 그래. 재미 없어?”
감정은 곧바로 표정에 나타났다.
유현은 동생의 얼굴이 심상치 않다는 걸 눈치채고는 시소를 멈췄다.
“오빠, 또 집 나가면 안 돼.”
“저번에도 말했잖아. 이제 안 그런다고.”
“그래도 무섭단 말야! 예전에도 갑자기 없어졌잖아!”
어제까지 보던 얼굴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것.
유현은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판대륙에서 수많은 사람을 잃으며 뼈저리게 느꼈다.
전날 술잔을 나눴던 사람이 다음 날 전투에서 시체가 되기도 하고,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던 이가 눈앞에서 죽기도 했으니까.
‘그게 가족이면 어떨까.’
상상하는 것만으로 몸서리가 일었다.
당장 자신도 이런데 동생의 기분은 어떨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오빠 진짜 안 없어져.”
“진짜? 진짜로?”
“약속할까?”
유현이 시소를 멈추자 유하연이 시소에서 내려 쪼르르 달려왔다.
“자! 약속해!”
서로의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한다.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사라지지 않겠다고.
‘이 귀여운 동생도 나이 먹으면 희연이처럼 되겠지.’
오빠 새끼~, 내 방 들어오지 말라고~, 나가라고~
유희연의 거친 언행이 막내의 입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니 벌써 부터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사춘기는 피할 수 없는 파도. 지금부터라도 마음의 준비를 해놓는 수밖에.
“하연아. 근데 친구들이랑은 안 놀아?”
“응.”
“왜? 오빠 이제 힘든데.”
“내가 먼저 타고 있었는데, 자기들이 타겠다고 나 밀었어!”
“서로 양보하면서 놀아야지. 네가 친구들이랑 안 놀면 여기까지 온 보람이 없잖아.”
“쟤네가 사과하면 같이 놀게.”
유현이 한숨을 쉬었다.
꼬맹이 주제에 자존심 하나는.
“야! 비켜!”
그때였다.
저쪽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초등학생 고학년은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유하연의 친구들에게 윽박지르고 있었다.
유현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보아하니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놀이기구를 가지고 놀겠답시고 비키라고 소리치는 것 같았다.
‘저게 인기가 많네.’
놀이터에 하나밖에 없는 흔들 놀이기구. 본래는 몇 개 더 있었지만, 지금 남은 건 하나뿐이다. 나머지는 스프링만 덜렁 있어 흔적으로만 존재했다.
“나오라고!”
초등학생 남자애가 놀이기구에 타고 있던 아이를 거칠게 끌어냈다.
그러고는 자기가 그 자리에 대신 올라탔다.
그걸 보며 유현은 혀를 찼다.
‘요새 애들은 인성이 왜 저래?’
어디서 저런 되먹지 못한 짓을 배운 걸까. 그냥 적당히 양보하고 기다리면 되는 것을.
“하연아. 너는 저러면 안 된다?”
유현이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 옆에 있던 유하연이 보이지 않았다.
“엥? 어디 갔어.”
“야아아아악!”
익숙한 음성의 고음이 들려왔다.
소리의 근원을 확인한 유현은 피식 웃었다.
‘일 났네.’
어느새 놀이기구 앞에 서 있는 유하연. 그 앞에는 놀이기구를 빼앗았던 초등학생이 주저앉아 있다.
보아하니 초등학생을 밀어서 떨어뜨린 듯했다.
“내 친구 왜 밀어!”
유하연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초등학생들과 친구들 사이를 막아섰다.
다들 당황하여 눈만 깜빡거릴 뿐이었다.
“사과해!”
바닥에 엎어진 아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야, 너 지금 나 밀었어?”
“너가 먼저 밀었잖아!”
“나 4학년이거든! 너라고 하지 마!”
“어쩌라고 밥탱아!”
유현이 실소했다.
아이들의 표정은 심각했으나 오가는 말싸움은 유치하기 그지없었다.
‘한 성격 하네.’
키 차이가 머리 하나는 더 나는데 조금도 겁먹은 기색 없이 초등학생들과 맞섰다. 저런 건 언니를 닮은 걸까.
“맞고 싶냐!?”
“때려봐! 나도 때릴 수 있어!”
“이 자식이!”
초등학생이 유하연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것을 기점으로 싸움이 시작됐다. 뒤쪽에서 겁먹은 채 서 있던 유하연의 친구들도 합세했다.
“허허.”
유현의 눈에는 작은 것들의 싸움이 그저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저 나이부터 패싸움을 하다니.
‘제법 의리가 있어.’
친구들은 그냥 도망칠 줄 알았다. 만약 그랬다면 나서서 말리려고 했는데 설마 함께 싸울 줄은 몰랐다.
이건 이제 누군가 참견할 싸움이 아니다. 시작한 이들이 끝을 봐야 하는 싸움이다.
“아악! 깨물지 마!”
“밀었겠다!”
아이들의 싸움은 그럴듯하게 이어졌다. 바닥을 뒹굴고 모래사장 위로 던져지는 등, 전체적으로 난잡한 싸움이었다.
유현은 근처에 서서 아이들의 움직임을 계속해서 살폈다.
크게 다칠 상황이 생기면 그때 나설 생각이었다.
‘그래도 애들이라고 거기까진 안 가나.’
싸움은 한동안 이어졌고, 먼저 드러누운 건 유하연과 그녀의 친구들이었다. 패기는 좋았지만, 신체적인 조건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에이씨.”
“더럽고 치사해서 안 논다.”
자리를 뜨는 초등학생들.
유현은 미리 놀이터 밖으로 나가 초등학생들의 앞을 막았다.
“얘들아.”
유현이 아이들을 지그시 내려다본다.
초등학생들이 움찔하며 긴장한 얼굴로 유현의 눈치를 살폈다.
“왜, 왜요?”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유현이 허리를 숙여 눈높이를 맞춘다. 살벌한 눈빛에 아이들이 덜덜 떨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이들을 상대로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경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알면 됐어.”
아이들이 도망치듯 뛰어갔다.
유현은 초등학생들을 일별하고는 다시 놀이터로 돌아갔다.
싸움이 많이 힘들었는지 아이들은 여전히 모래사장 위에 드러누워 있다.
“괜찮냐?”
유현이 동생의 옆에 쭈그려 앉았다.
유하연이 홱 고개를 돌렸다.
“오빠 바보.”
“왜?”
“싸우는 데 도와주지도 않고.”
“내가 끼면 경찰서 가서 안 돼.”
무엇보다 애들 싸움에 굳이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유치하기도 하고, 딱히 위험하지도 않았으니까.
“저기….”
그때 유하연의 친구 중 하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너 괜찮아?”
유하연이 몸을 일으켰다.
아이는 연신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 아까는 밀어서 미안.”
유하연이 씩 웃으며 아이를 토닥였다.
“괜찮아!”
“정말로?”
“응! 내가 양보했으면 됐는데 고집부려서 미안.”
누워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일어나 유하연의 주변으로 모였다.
다들 아까 전 유하연이 자신들을 도와줬던 것을 이야기하며 큰 소리로 웃었다.
“어린 애들 답구만.”
유현은 다시 벤치에 앉았다.
아이들은 그 뒤로 한참을 놀았다.
“오빠! 가자!”
어두워지고 나서야 아이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유현은 유하연의 손을 잡고 함께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배 안 고파?”
“고픈 것 같기도 하고, 안 고픈 것 같기도 하고.”
“맛있는 거 사줄까?”
“와! 치킨 먹을래!”
집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주문해둘까.
유현이 휴대전화를 꺼낸 찰나.
유희연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오빠, 어디야 지금?
“하연이랑 놀고 집 가는 중인데.”
-혹시 무슨 짓 했어? 엄마가 오늘은 그 사람들 안 왔다는데?
“주말이잖아.”
유현은 태연하게 거짓을 이야기했다.
비밀스럽게 처리한 일이다. 굳이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다.
-원래 하루도 안 빠지고 왔어. 근데 어제 오빠가 나한테 그 얘기 하자마자 안 오잖아.
“......”
-에휴. 봐봐, 역시 오빠한테 맡기면 바로 끝나잖아. 근데 엄마 아빠는 죽어도 오빠한테 말하지 말라고.
“그래서 한서희한테 말했냐?”
-걔한테 말하면 오빠한테 전달해줄 것 같아서. 어쨌든 나는 엄마 말 지켰으니까 효도했다.
수화기 너머로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누가 그랬는지는 안 궁금해? 이유라든가.”
-별로? 어차피 해결됐잖아.
유희연의 대답에 유현은 할 말을 잃었다. 그래도 이유 정도는 궁금할 줄 알았는데.
“밥 안 먹었으면 기다려. 치킨 시킬 거니까.”
-난 피자.
“치킨 먹어.”
-비밀번호 바꿔놓는다?
“하연이한테 잔소리 듣고 싶으면 그러던가.”
“언니! 나 여기 있다~!”
-......
잠시 침묵이 흐르더니 전화가 끊겼다.
기집애, 반항 한 번 안 할 거면서 쓸데없는 소리 하기는.
“자, 하연이가 뭐 시킬지 골라.”
유현은 동생에게 핸드폰을 넘기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잘 풀려서 다행이네.’
어제 너무 성급하게 녀석을 죽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죽었다고 그 밑에 똘마니들이 더는 움직이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늘 어머니의 가게에 찾아오지 않은 걸 보면, 확실히 끝난 것 같다.
‘아마 그놈의 행방을 찾고 있겠지.’
이름이 황사였던가.
시체나 핏자국 같은 건 확실하게 처리했으니 아마 죽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평생 찾아다녀라. 내 앞에 나타나지 말고.’
언젠가 다시 나타나 똑같은 짓을 벌인다면, 그때 취할 태도는 한 가지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