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달빛이 차오른 새벽.
수도권 외곽에 위치한 폐공사장.
“여긴가.”
유현은 대머리에게서 들은 주소를 따라 곧장 이곳으로 왔다.
공사가 중단되고 한참이 지난 건지 곳곳에 먼지 쌓인 자재들이 가득하다.
‘누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쏴아아아.
새벽의 차가운 바람만이 적적하게 불어올 뿐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유현이 내부로 들어섰다.
폐허의 적막을 깨고 어디선가 고요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혼자왔군.”
한 사내가 달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머리칼과 피부, 축 처진 눈꼬리. 눈동자는 힘이 없어 마치 죽은 사람을 보는 듯했다.
“......”
유현은 찬찬히 사내의 전신을 훑었다. 기다란 정장 코트로 전신을 가렸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은 풍채였다.
‘유령이야, 뭐야.’
유현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첫인상에 기분이 나빠지는 사람은 오랜만이었다.
“같이 오지 않은 건가?”
“내가 뭐하러 네 편을 데려오냐?”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 말이 맞군.”
“네가 시킨 짓이지?”
남자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그래. 나다. 내가 네 어미의 식당을 어지럽히고, 네 아비를 위협했다. 그리고 너의 동생들에게도 다가갔지.”
유현이 태연하게 귀를 쑤셨다.
굳이 입으로 듣지 않아도 다 아는 내용이다.
“너를 천천히 말려 죽이려고 했다. 실제로 효과가 있었던 것 같고.”
“그래. 네 덕분에 가족들이 아주 개고생을 했다.”
“내가 왜 그랬을까?”
“안 궁금한데.”
나쁜 짓을 하는 놈들이야 숱하게 봐왔다.
이제 와서 이유를 물을 만큼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싸우고, 죽이고, 문제를 해결하면 끝나는 문제다.
“넌 내 동생에게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남겼다.”
“동생?”
“골동 고등학교 화장실. 기억나지 않나?”
“아…! 거기구나!”
화장실에서 있었던 사건은 하나 뿐이기에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용케 누가 그랬는지 알아냈네? 절대 말 안 할 줄 알았는데.”
“기억을 읽었다.”
“그런 방법도 있었군.”
그때, 남자가 유현에게 고개를 숙였다.
“내 동생이 너의 동생에게 한 짓은 미안하다. 동생을 원상태로 되돌려 줘. 그럼 나도 너희 가족에게 더는 손대지 않겠다.”
“싫은데?”
유현은 단칼에 거절했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 마땅한 법. 상대가 누구든 그 생각은 똑같았다. 얼마나 사과하고 빌어도 바꿔줄 생각은 없었다.
“싫다면 강제로라도 하는 수밖에.”
남자가 코트를 벗었다.
묵직한 쿵 소리와 함께 코트가 바닥에 떨어졌다.
“별 걸 다 입고 다니네.”
“0.5톤이다.”
“입고 다닌다고 효과가 있냐?”
남자는 말 없이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았다.
맑은 쇳소리가 울렸다.
기다란 일본도가 달빛에 비춰 반짝였다.
“아카데미의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한들 넌 아직 고등학생이야.”
“......”
“다시 물어보겠다. 평화롭게 해결할 생각은 없나?”
“이제 와서? 웃기지도 않네.”
“세상은 넓다. 너는 아직 우물 속의 개구리고.”
유현이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싸울 거야 말 거야? 설교하러 왔어?”
남자가 피식 웃었다.
“죽지 못해 안달이 났군.”
“내가?”
“네가 죽으면 너의 가족은 영원한 고통 속에 살 거다. 법은 더 이상 너의 가족을 보호해주지 못할 거야.”
“그렇구만.”
유현의 반응은 태연했다.
“이렇게 말하니 실감이 안 나나?
더 확실히 말해주지. 너의 부모는 죽을 거다. 시체는 바다 밑에 가라앉거나 가축의 먹이가 되겠지.”
“......”
“그리고 두 동생은 고아가 되고 생이별하여 첫째는 집창촌에 팔려나갈 것이다. 둘째는 길거리에서 쓸쓸히 죽을 테고.”
“......유언은 그게 다냐?”
남자가 큰 소리로 웃었다.
상대를 낮잡아 보는 듯한 가소로운 폭소였다.
“유아 퇴행이라도 왔나? 단어 선택을 잘못한 것 같은데?”
“제대로 말했어.”
“나는 케이디의 전투 부대 소속 황사경. 네가 죽이고 말고 할 상대가 아니다. 이 이상의 대화는 시간 낭비겠군.”
남자의 전신에 푸른 빛이 휘감겼다. 마치 갑옷처럼 몸을 감싸는 마나들. 그것은 곧 형태를 갖췄다.
칠흑처럼 어두운 빛깔.
달빛을 빨아들일 것 같은 짙은 흑색의 갑주가 머리는 물론이고 전신을 보호했다.
“선수 치마.”
일본도 위로 마나가 덧씌워졌다.
섬뜩할 정도의 예기를 품은 칼날. 황사경이 검을 앞세운 채 유현을 향해 쇄도했다.
후웅!
푸른 빛의 검신이 허공을 베었다. 어둠 위로 새겨지는 푸른색 검로(劍露). 검의 잔상이 남았다.
‘빠르군.’
횡으로 베고, 그대로 찔러오고, 물러나는 듯싶더니 다시 베어 들어오는 쾌검.
덩치와 검의 길이가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계속 피할 수 있을 것 같나!”
캉!
느닷없이 울려 퍼진 쇳소리.
철붙이가 맞부딪히는 감각에 황사경이 움직임을 멈췄다.
‘무기는 들고 있지 않았을 텐데?’
그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상대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것이 쾌검(快劍)의 싸움.
끝없이 몰아세워 빈틈을 만들어내 치명상을 입히는 게 특징이다.
하지만 상대의 전력을 모르는 상황에서 전투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
“좀 치는데?”
검은색 투구 아래 감춰진 황사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유현은 웃고 있었다.
검격을 몰아쳤는데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모습.
당황스러웠다.
조금은 지칠 줄 알았는데 저렇게 태연하다니.
‘허세가 아니야.’
특성 - 쾌검.
누구나 쉽게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었다. 한두 번이라면 그렇다쳐도 유현은 모든 공격을 피했다.
그건 단순한 운이 아니다.
검의 경로를 읽고 반응하는 믿을 수 없는 동체 시력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말도 안 돼.’
그런 사람은 몇 없다.
적어도 같은 등급의 능력자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이들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공격은 그걸로 막은 건가?”
황사경의 시선이 유현의 손으로 움직였다.
어디서 꺼낸 건지 그의 손에는 특이한 생김새의 검이 들려 있었다.
짧고 둔해 보이는 뭉툭한 검신.
그건 검이라기보다는 몽둥이에 가까웠다.
“응. 간만에 재밌어지는 것 같아서 꺼냈지.”
“기이한 생김새의 무기로군.”
위협적인 무기는 아니다.
몸을 감싼 갑옷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드래곤의 갈비뼈로 만든 거야.”
“...무슨 말이지?”
유현이 씩 웃었다.
“설명하려면 복잡한데.”
“그럼 하지 마라.”
황사경이 땅을 박찼다.
‘어떻게든 쓰러뜨린다.’
처음 생각한 것처럼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단순한 학생 이상의 레벨. 그렇다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여기서 도망친다면 동생은 영영 되돌릴 수 없을 테니까.
“특성이란 거 말이야.”
유현이 몸을 틀어 검을 피했다.
“내가 알기로는 하나 밖에 못 쓰는 걸로 알고 있거든.”
황사경의 검은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그러나 어떤 공격도 유현에게 닿지 못했다.
“너는 왜 두 개냐? 그거 반칙 아냐?”
빠각!
유현이 휘두른 몽둥이가 황사경의 옆구리에 작렬했다.
갑옷이 있어 고통은 없었지만, 충격은 흡수할 수 없었다.
쾅!
황사경은 그대로 허공을 날아 공사장 한쪽 구석에 처박혔다.
“말해봐. 너는 왜 특성이 두 개지?”
전신을 보호하는 갑옷.
그리고 평범한 인간이라면 불가능한 속도의 검속.
두 가지 능력이 특성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제각기 다른 마나의 흐름이 여전히 요동치고 있었다.
“크윽.”
유현은 다시 일어서려는 황사경에게 다가가 사정없이 몽둥이를 내리쳤다.
쾅!
일방적인 폭력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폐건물 전체로 충격이 흩어지고, 황사경의 갑옷에 금이 갔다.
황사경은 빠져나오기 위해 애썼지만, 유현의 공격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후.”
유현이 공격을 멈췄다.
먼지 속에서 황사경이 꿈틀거렸다.
“물어봐 놓고 죽어라 팼네.”
유현이 다시 무기를 휘둘렀다.
황사경의 뒤통수에 한 번 더 강력한 충격이 내리꽂혔다.
“근데 이렇게 안 하면 화가 안 풀려서.”
줄곧 웃고 있었지만, 그 뒤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다.
단지 감정을 컨트롤하는 것에 능숙해져 있을 뿐이었다.
“기절했어?”
유현이 웃으며 아공간에 무기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쓰레기를 집어 들듯 황사경을 들었다.
시체처럼 축 늘어진 모습.
부서진 투구 사이로 얼굴의 일부가 엿보였다.
초점이 흐릿한 눈동자.
유현은 피식 웃고는 황사경을 내던졌다.
“검도 튼튼하고, 갑옷도 튼튼해. 네가 어디서 뭘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강한 놈이라는 건 알겠어.”
바닥에 엎어진 황사경이 간신히 숨을 몰아 쉬었다.
“근데 강하다고, 아무 말이나 막 하고 다니면 안 되지. 네가 여기서 죽는 이유는 그게 다야.”
유현이 팔을 들었다.
길게 뻗은 손날 위로 마나가 일렁인다.
칼날처럼 날 선 예리함.
대지에 낙뢰가 꽂히듯 황사경의 목덜미를 향해 손날이 쇄도했다.
“....자, 잠깐.”
손날이 목덜미를 파고들기 직전.
황사경이 각혈과 함께 목소리를 냈다.
“나는 이중 특성 보유자다.”
“뭐라고?”
“왜 내게 특성이 두 개가 있냐고 물었지. 태생적으로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렇구나.”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흥미를 잃었다는 듯 재차 손을 움직였다.
“내 동생은 나를 싫어했다.”
“죽을 때가 되니 말이 많아지는군.”
“죽기 전에 마지막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수 있잖아.”
유현은 손을 거두고 옆에 앉았다. 죽음에 예의를 차리는 것.
그것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전사가 전사에게 보낼 수 있는 마지막 송사였다.
“말해봐.”
“나는─”
푸확!
유현의 손이 황사경의 목덜미에 구멍을 뚫었다. 크게 뜨인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병신. 내가 미쳤다고 듣냐?”
“커, 커헉.”
“꼴에 시선 끌어보겠답시고 지랄하는데 너처럼 통수치는 새끼들 한둘이 아니었어.”
목에서 손을 뽑자 피가 솟구쳤다. 그와 동시에 쇳소리가 울렸다.
은밀하게 유현의 뒤를 노리던 단검이 바닥에 떨어진 것이다.
“천 년은 이르다, 인마.”
황사경이 입을 뻐끔거렸다.
호흡이 서서히 옅어졌다.
목구멍에서 치솟은 피가 주변을 적셨다.
“......”
유현은 황사경의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움직임이 멎었다.
“하아.”
한숨을 쉬고는 시체를 들고 공사장 뒤쪽 야산으로 향했다.
조용히 땅을 파고, 시체를 묻은 뒤, 공사장의 혈흔까지 처리한 다음에야 유현은 폐공사장을 빠져나왔다.
돌아가는 길.
건물의 옥상을 뛰어넘으며 유현은 생각에 잠겼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
아까 주차장에 있던 조폭들을 살려둔 것도 그래서였다.
그들도 결국에는 누군가의 명령을 듣는 이들이었으니, 가족들을 괴롭힌 건 본인의 의사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비를 베풀었다.
‘이제는 죽이고 싶지 않아.’
누군가를 죽일수록 평범한 삶과의 거리는 멀어진다.
살육이 반복되면 결국에는 스스로를 망치게 된다는 걸 유현은 잘 알고 있었다.
‘제발 앞으로는.’
앞으로는 일상을 방해하는 이가 없기를. 더는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