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몬스터의 힘을 파악한 유현은 두 번째 돌파에 마나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 덕에 사람들은 전광판을 통해 좀 더 확실하게 유현의 전투를 목격할 수 있었다.
“와하하!!”
“존나 멋있어!”
민첩한 속도와 커다란 동작.
공격 한 번에 바위 골렘이 으스러졌다. 사람들은 유현의 화려한 전투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끙차.”
유현은 길의 끝에 도달했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입구가 보였고, 그 앞에는 버튼이 있었다.
“이걸 누르면 된다는 거지.”
버튼을 누르자 스피커에서 소리가 울렸다.
-1단계를 클리어했습니다.
출구가 활짝 열렸다.
유현은 곧장 출구를 통과했고, 휴식 공간에 도착했다.
“이런 것도 있네.”
휴식공간에는 간단한 먹거리와 마실 거리가 있었다.
유현은 초코파이와 우유 한 팩을 마시고는 2단계의 입구에 섰다.
“갑시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번째 스테이지의 입구가 열렸다.
곧장 보인 것은 초록색이었다.
“허.”
유현이 헛웃었다.
처음에는 바위로 이루어진 바위지대. 두 번째는 현실감 넘치는 밀림.
이걸 보니 왜 선생들이 심사까지 해가면서 횟수를 줄이려 했는지 이해가 됐다.
“여기도 그냥 끝까지 가면 되나?”
유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거진 나무들 덕에 어디가 끝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아마존도 이런 느낌이려나.’
습도는 높고 태양은 뜨겁다.
어디선가 강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 울부짖는 소리도 들려왔다.
-두 번째 스테이지는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모두 죽이면 됩니다.
아까처럼 방송이 들려왔다.
대체 스피커를 어디다 달아 놓은 거야.
“키에에엑!”
스피커를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몬스터 한 마리가 포효했다.
“키에에에엑!”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유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느닷없이 등장한 몬스터들.
한 마리가 두 마리가 되었고, 순식간에 몇십 마리로 증가했다.
“보호색이군.”
파충류처럼 날카로운 두 눈동자.
크기는 악어와 비슷했고, 네 발로 땅을 디딘 것도 똑같았다.
다만 생긴 게 조금 다르다.
기다란 꼬리에 달린 날카로운 가시들. 저게 녀석의 무기 같았다.
‘다 죽이라고 했지.’
참으로 단순한 시험이었다.
유현은 경계하는 몬스터를 향해 곧장 쇄도했다.
속도에 당황한 몬스터가 급히 공격하려 했지만, 유현의 주먹은 가차 없었다.
퍽!
E등급에서 한 단계 나아간 몬스터의 수준. 이전처럼 한방은 아니었다.
그러나 몬스터의 몸에 치명상을 남기기에는 충분한 공격이었다.
“크아앙!”
전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몬스터들이 밀려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싸움.
하지만 유현은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미소를 머금은 채 전투를 이어갔다.
사방으로 몬스터들의 피가 튀고 살점이 흩어졌다.
한 방이 아니었을 뿐이지, 전투가 일방적인 건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테스트는 처음 보는군.”
박철수는 테스트를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선생 중 누구보다 많은 하이패스 테스트를 참관했지만, 오직 자신의 몸만을 활용해 싸우는 학생은 처음이었다.
그것은 마치 전투에 미친 광전사를 보는 것 같았다.
‘몸풀이 수준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유현처럼 압도적인 전투를 보여주는 학생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유현은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도 느낌이 달랐다.
천외천. 하늘 밖에 또 다른 하늘이 있듯 천재라고 불리던 이들 중에서도 그 천재성이 도드라지는 이들이 있다.
적어도 박철수의 눈에는 유현이 그런 천외천의 존재처럼 보였다.
“전투를 즐기는 저 모습 좀 보게. 대단하지 않은가?”
“꼭 노련한 전사 같군요.”
유현은 웃으며 싸웠다.
아직 학생일 텐데, 몬스터를 경험해본 적도 없을 텐데, 싸움을 즐기고 있었다.
“안 선생. 자네도 혹시 저 친구가 1년동안 운동해서 강해졌다는 말을 믿는가?”
안칠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걸 어떻게 믿나요. 하지만 일어나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도 안 합니다.”
“그렇지. 불가능한 일이 얼마든 일어나는 세상이니까. 그래도 궁금하지 않나? 대체 저 친구에게 어떤 일이 있었길래 최약체로 평가받던 사람이 저리도 뛰어난 전사가 되었을지.”
“그렇긴 한데… 별로 묻고 싶진 않네요.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겠죠.”
박철수도 그의 말에 동감했다.
그 길은 절대 쉬운 길이 아니었을 테고, 그래서 파고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적당히 믿자고.”
“네, 그러려고요.”
박철수는 유현의 싸움을 보면서 또다시 감탄했다.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완벽했다.
힘의 강약 조절, 전투의 템포, 스텝은 물론 주변 구조물의 활용까지.
전장의 모든 것을 아우르고 자신의 힘을 온전히 발휘하는,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은 싸움. 천재들도 한 수 접고 갈 경지였다.
-삐이이익!
시끄러운 통과음이 울렸지만, 장내는 조용했다. 테스트가 진행될수록 사람들은 유현의 전투에 말을 잃었다.
골렘을 쓰러뜨릴 때 보다 더 적나라한 현장이다.
산처럼 쌓인 몬스터들의 시체. 곳곳에 나뒹구는 혈흔과 신체 부위.
무기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이루어진 전투라고는 믿을 수 없는 잔혹한 학살의 현장.
전투에 열광하던 이들의 기세가 꺾일 정도였다.
“너무 잔인하다.”
“사냥 영상은 많이 봤어도 저런 건 처음이야.”
“흥, 몬스터 보고 불쌍하기는.”
서혜빈이 앞 좌석 학생들에게 쏘아붙였다. 그들은 상대가 서혜빈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한마디도 못 할 거면서 뭘 쳐다봐.’
서혜빈이 혀를 차고는 다시 전광판에 신경을 돌렸다.
‘완전 괴물이 따로 없네.’
밀림에서 벌어진 전투는 골렘과 싸울 때와는 사뭇 달랐다.
좀 더 폭력적이었달까.
어쨌든 그의 기량을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런 식으로도 싸우는구나.’
어디서 뭘 하던 사람일까.
대체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저렇게 광적으로 싸울 수 있을까.
온갖 궁금증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제는 유현이라는 사람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마저 들었다.
‘끝나고 찾아가 봐야겠어.’
유현은 스피커의 안내에 따라 다음 스테이지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휴식 없이 세 번째 스테이지를 시작했다.
***
테스트가 진행될 수록 경기장의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F등급의 활약. 유현이 보여준 반전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환호했다.
“...칫.”
주변의 환성을 들으며 한서희가 혀를 찼다. 적어도 그녀에게 유현의 활약은 좋기만 한 일이 아니었다.
오늘을 기점으로 유현을 향한 관심사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테니까.
예상했지만, 기분이 별로인 건 어쩔 수 없었다.
‘왜 이렇게 쉽게 돌파하는 거야?’
유현은 빠르게 세 번째 스테이지를 돌파하고 네 번째 스테이지에 진입했다. 네 번째조차도 무척 빠르게 돌파하는 중이었다.
그만큼 강하단 소리겠지만, 한서희는 내심 불만스러웠다.
‘시험이 좀 더 어려웠다면 좋았을 텐데.’
이왕이면 사냥형 게이트의 몬스터들이 아니라 던전형 게이트의 몬스터를 포획하든가.
아쉽게도 하이패스 테스트는 시험자에 따라 차별을 두지 않는다.
테스트가 무척 쉬워 보이지만, 만약 자신이 지금 유현 대신 저곳에 있었더라면 저렇게 빠르게 돌파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아쉽네.’
조금만 더 강한 몬스터들이 나왔다면, 유현의 힘을 더 자세히 알 수 있었을 텐데.
‘지금까지 결과로 보면, B등급까지는 쉽게 잡아내고 있어.’
몬스터가 강해질수록 스테이지의 체류시간이 늘어났지만, 기존 하이패스 테스트의 기록과 비교해보면 압도적으로 빠른 속도였다.
“왠지 분한….”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한서희가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막았다.
‘분해? 내가?’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도 아리송했다. 하이패스 테스트를 했던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유현이 비교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힘을 너무나 강하게 원하기 때문일까.
고민해보지만, 순간적으로 느꼈던 분한 감정을 설명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한 번 싸워보면 좋겠는데.”
그것은 지극히 사적인 감정.
기회가 오더라도 꺼낼 일 없는 욕심이었다.
-4단계를 클리어했습니다.
네 번째 스테이지를 클리어했다는 방송이 들려왔다. 관중의 함성은 더 커졌다. 그간 몇 번인가 하이패스 테스트를 참관했지만, 사람들이 이토록 열광하는 건 처음이었다.
“와!!! 씨바!! 미쳤어!!”
“저게 어떻게 F등급이냐고!”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빠르냐!”
한서희는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휴식공간에 진입한 유현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단계.”
테스트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다음이 마지막.”
유현이 땀에 젖은 머리를 뒤로 쓸어넘겼다.
“어렵다고 난리 치더니만 너무 쉽잖아.”
유현이 여유롭게 다섯 번째 스테이지에 진입했다.
온통 새하얀 공간이었다.
지금까지 통과한 스테이지들과는 달리 어떠한 구조물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여긴?”
스테이지의 입구까지 닫히자 정말 하얀색뿐이었다.
천장은 물론이고 벽까지.
어디가 입구고, 어디가 출구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마지막 스테이지입니다. 10분간의 휴식 이후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미세하게 들려오던 스피커의 지직거림이 사라졌다.
유현은 자리에 앉아 하품했다.
“바로 시작해도 상관없는데.”
어떤 시험이길래 10분의 유예가 주어지는 걸까. 큰 기대는 없었다.
어차피 지금까지 겪은 스테이지처럼 별 볼 일 없을테니까.
“흐아아~!”
유현은 기지개를 켜며 태평하게 드러누웠다.
두 눈을 감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서늘하고 시원한 공기.
판대륙에 있던 시절, 치열한 전장에서 승리한 뒤 맛보는 달콤한 휴식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곧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참가자는 전투를 준비해주시기 바랍니다.
누워있으니 10분은 금방 지나갔다.
다시 안내가 흘러나왔지만, 유현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험이 시작됩니다.
목소리가 들려온 직후.
피부에 닿는 공기의 감각이 달라졌다.
그 변화에 유현이 눈을 떴다.
“...엉?”
낯선 하늘이었다.
***
하얀 공간은 황폐한 폐허가 되어있었다.
순식간에 뒤바뀐 스테이지의 풍경에 관중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갑자기 바뀌었어.”
“시뮬레이션이네.”
몇몇 학생들이 안다는 듯 이야기했다.
시뮬레이션.
헌터 아카데미에 존재하는 특수한 시스템으로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펼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마치 게임처럼 몬스터의 이름과 체력이 표시되며, 단순히 몬스터만 출현하는 것 이외에도 게임 속의 퀘스트 시스템을 차용하여 훈련자의 몰입도를 높인다.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재미와 효율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획기적인 훈련 도구였다.
“저걸 하이패스 테스트에 도입할 줄이야.”
“이번이 처음 아닌가요?”
“그런 걸로 알고 있네.”
신소영이 신기하다는 듯 전광판을 응시했다.
시뮬레이션 시스템이 도입된 건 최근. 몇몇 학생이 테스트 삼아 해봤지만, 아직 정식 수업에 활용된 적은 없었다.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상태다.
“가상이 아니라 진짜 같네요.”
“그러게 말이야. 볼수록 신기하군.”
전광판 위로 펼쳐진 풍경은 현실과 다를 게 없었다.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고, 들판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무너진 석조 건물들 사이에는 사람과 몬스터의 시체가 널브러졌다.
“흐음.”
거기서 유현은 쭈그려 앉은 채 풀잎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현실과 같은 느낌.
촉각뿐만이 아니었다.
귓가에 스치는 서늘한 바람소리와 불꽃의 타닥거림조차 현실처럼 느껴졌다.
“크르릉.”
그때, 무너진 석조 건물 사이에서 무언가 걸어 나왔다.
사자와 비슷한 생김새. 전신에서 자라는 철을 갑옷처럼 두른 흉포한 짐승형 몬스터.
“...철사자?”
유현이 중얼거렸다.
몬스터의 머리 위쪽, 몬스터의 이름과 기다란 줄이 표시되어 있다.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볐지만, 그대로였다.
“이거 완전 게임이랑 똑같네.”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의 이름과 기다란 초록색 막대. 초록색 막대는 아마 체력 상태를 뜻하는 것이겠지.
‘이놈을 잡으면 시험이 끝나는 것이겠군.’
유현은 곧 철사자를 향해 쇄도했다.
“크아앙!”
달려오는 유현에게 마찬가지로 돌진하는 철사자. 온몸이 철로 둘러싸여 있음에도 그 속도는 민첩했다.
쩡!
유현과 철사자가 격돌했다.
마나가 실린 주먹이 철사자의 머리에 꽂혔지만, 철사자는 잠시 멈칫했을 뿐 멀쩡히 움직였다.
“버, 버텼어!”
“좋아! 그래야 재밌지!”
처음으로 유현의 공격을 맞고 아무렇지 않은 몬스터가 등장했다.
관중들의 환호가 자연스레 뒤따랐다.
철사자.
B+ 등급보다는 높지만, A등급보다는 낮은 A-등급에 속하는 사냥형 게이트의 몬스터.
하이패스 테스트의 마무리를 장식하기에는 최적인 몬스터였다.
“싸워라!”
“계속 버텨!”
철사자에게 관중들의 응원이 이어졌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때린 곳을 또 때리는 유현의 집요한 집중공격에 초록색 체력 바가 빠르게 줄어들었으며, 철사자는 길게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쿵!
또다시 침묵과 경악으로 물든 관중석. 적막한 관중석 사이로 방송이 울려 퍼졌다.
-마지막 스테이지를 클리어했습니다.
***
“아니, 시발!”
하이패스 테스트 컨트롤 센터.
테스트의 설계 일부를 담당한 전투 교관 기한경이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말이 돼 이게? 대체 저렇게 클리어하는 게 어딨어?”
마지막 스테이지.
철사자에게는 클리어 조건이 있다.
바로 외갑을 뚫기 위해서는 숨겨진 결계를 부수는 것이다.
그걸 부수지 않으면 데미지가 경감되게 설계되어 있었다.
하지만 유현은 그저 주먹질을 반복해 철사자의 외갑을 뚫었다.
“진짜 어이가 없네.”
기한경이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관중들의 함성을 뒤로한 채 경기장 내부 건물로 들어가는 유현.
누구나 자랑할 만한 결과를 냈지만, 그것을 뽐내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저건 겸손한 거야, 건방진 거야?”
자랑할 만한 성과인데도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마음에는 안 들지만, 대단하긴 했어.’
다섯 개의 스테이지 중 쉽게 클리어할 시험은 단 하나도 없었다.
헌데 유현은 그 모든 걸 손쉽게 돌파해냈다.
시험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저 아이가 강할 뿐이었다.
보통 사람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을 정도로.
“괜히 그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한 게 아닌가.”
기한경이 유현과 처음 만났던 교무회의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선생들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던 당당한 태도. 그가 한 말도, 행동도 다 이유가 있었다.
***
“수고했어요.”
경기장 내부 건물로 들어온 유현을 가장 먼저 맞이한 건 한서희였다.
그녀가 들고 있던 음료수를 유현에게 건넸다.
“마침 목말랐는데.”
유현이 음료수를 한입에 들이켰다.
시원한 이온 음료가 갈증을 해소했다.
“앞으로 많이 귀찮아질 거예요.”
“나 말이야?”
“네. 다들 F등급이라고 무시하던 당신의 진짜 힘을 알게 됐잖아요.”
“다들 이제 너처럼 달라붙는다고?”
“......네. 저처럼요. 당신의 생각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죠?”
유현이 음료를 홀짝이고는 답했다.
“길드에 관해 물어보는 거라면 똑같아. 지금도 어디 갈 생각 없고, 만약 가게 된다면 소나무로 가야지. 받은 게 있으니.”
“다행이네요.”
한서희가 안도했다.
아무리 계약서가 있다고는 해도, 역시 본인에게 이야기를 듣는 게 제일 마음이 편하다.
“......”
둘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유현은 신경 쓰지 않고 음료를 마셨지만, 한서희는 어색함을 참을 수 없었다.
“희연이는 잘 지내요?”
“어제도 전화했잖아. 거실에서 얼마니 시끄럽게 떠들던지 원.”
“미안해요. 그렇게 마음이 잘 맞는 친구는 처음이라서.”
유현은 지그시 한서희를 바라보았다.
“혹시 네가 고양이 키우라고 꼬드겼냐?”
“......아닌데요?”
“아니기는, 지금 얼굴에 내가 그랬다고 써있고만.”
한서희가 스마트폰을 들어 자신의 표정을 확인했다. 표정 관리는 완벽했다.
“현아!”
그때 입구에서 누군가가 뛰어 들어왔다. 안칠성을 비롯한 심사에 참가했던 선생들이었다.
“너 이 자식! 아주 장하다!”
다짜고짜 뛰어와 유현의 목에 팔을 두르는 안칠성. 유현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안녕하세요.”
한서희가 안칠성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를 발견한 안칠성이 눈을 크게 떴다.
“어, 어?”
어리둥절한 얼굴로 유현과 한서희를 번갈아 보는 안칠성.
교내 유명인사와 F반 학생의 조합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안칠성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왜, 왜 둘이 같이 있어?”
“그럴 사정이 있어서요.”
안칠성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유현에게 속삭였다.
“너 능력도 좋다?”
“예?”
“뭘 모르는 척이야. 너 정도면 내가 볼 때는 충분히 가능성 있어.”
유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크하하! 일단 교무실로 가자! 가서 2학년 등록해야지!”
안칠성이 호쾌한 웃음과 함께 유현의 어깨를 힘껏 두드렸다.
그러고는 다른 선생들과 함께 유현을 지나쳐 복도로 사라졌다.
‘무슨 말이지?’
안칠성의 말을 되뇌던 유현은 이내 상념을 털어냈다. 별로 중요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야, 나 먼저 간다.”
“잘 가요.”
유현이 한서희에게 구긴 캔을 건네고는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엉겁결에 캔을 받아든 한서희는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았다.
“......?”
다시 고개를 들었으나 유현의 모습은 이미 복도에서 사라졌다.
복도가 꽤 긴데, 벌써 없어졌다는 건 전력으로 달아났다는 소리였다.
“하아.”
자기가 마셨으면 자기가 좀 버릴 것이지.
“심지어 내가 사준 건데.”
순간 짜증이 치솟은 한서희는 캔을 내던졌다.
깡! 까깡!
구긴 캔이 이리저리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생각보다 큰 소음에 한서희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구석에 있는 카메라가 그녀를 보고 있었다.
“......”
한서희는 다시 캔을 주웠다.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발걸음에는 짜증이 가득 묻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