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헌터 아카데미의 상위 클래스에는 고급스럽게 꾸며진 라운지가 있었다.
그곳은 상위 클래스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이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일종의 특권 같은 장소였다.
그 라운지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손에 든 만화책의 책장을 넘길 때마다 웨이브 진 붉은 색 머리칼이 출렁거렸다.
“쟤도 입만 다물면 예쁘긴 예뻐.”
“야, 나는 아무리 예뻐도 성격 좋으면 별로다.”
라운지의 입구에 모인 이들이 그녀를 바라보며 떠들었다.
하지만 여자는 신경 쓰지 않고 독서를 이어갔다.
“차라리 좀 쌀쌀맞긴 해도 한서희가 낫다.”
“한 번 한서희한테 고백해 볼까?”
“아서라, 새끼야. 저번에 어떤 새끼 고백했다가 팩폭 맞고 울면서 자퇴했잖아.”
“그래도 서혜빈 보다는 낫잖아~”
여자가 홱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붉은색 눈동자가 그들을 노려보았다.
“야! 꺼져!”
터져 나온 일갈.
그녀를 보며 떠들던 남자들이 황급히 도망쳤다.
“아, 진짜. 교실 시끄러워서 여기로 왔더니 이젠 또 지나가는 놈들이 지랄이네.”
여자는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다시 도서에 집중했다.
하지만 독서는 오래가지 못했다.
“서혜빈님! 서혜빈님!”
한 남자가 남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서혜빈은 한숨을 쉬며 책을 덮었다.
“아침부터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남자가 숨을 고르고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아까 오는 길에 한서희를 만났습니다.”
“그게 뭐?”
“용태가 수상하여 그림자에 숨어 몰래 따라가 봤습니다. 제가 뭘 봤는지 아십니까?”
남자는 자신이 하위 클래스에서 봤던 풍경을 낱낱이 고했다.
그녀가 누구와 만났고,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이야기를 들은 서혜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게 정말이야?”
“예, 제가 똑똑히 보고 들었습니다. 분명 길드 계약을 맺은 게 틀림없습니다.”
“말이 돼? 한서희가 F반이랑 길드 계약을 맺는다니.”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들었습니다.”
서혜빈은 그 말을 좀처럼 신뢰할 수 없었다.
한서희. 송진그룹의 후계자이자 차기 소나무의 부단장으로 손꼽히는 존재. F반 따위에 시간을 쓸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F반에 갔을까.’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이유는 하나였다.
“걔 이름이 뭐라고?”
“유현이라고 했습니다.”
“유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기에 그녀의 추리는 방향성을 잡았다.
“한서희가 이유도 없이 길드 계약을 제의할 리는 없어. 아마 그 유현이라는 애가 F반에 있을 실력이 아닌 걸 거야. 이를테면, 숨겨진 실력자라는 거지.”
“그런데 이미 계약을 맺었으면 뭣하러 거기까지 직접 갑니까?”
그 말에 서혜빈은 다시 머리를 굴렸다. 확실히 현장에서 계약서가 오가지 않았다면, 계약은 이미 맺어진 상태라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직접 거기까지 간 건 왜일까. 곧 그녀는 두 가지 가설을 도출했다.
하나는 두 사람이 연인관계인 경우.
그러면 직접 F반에 방문한 것도 이해가 간다.
다른 하나는 그 유현이라는 남자가 한서희의 약점을 잡은 경우다. 이 경우도 직접 행차한 게 이해가 됐다.
“......첫 번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왜? 내가 보기엔 이것도 괜찮은데. 재벌과 서민 사이 금단의 사랑. 로맨틱하지 않니?”
동의를 구하는 서혜빈의 눈빛에 남자는 조용히 눈을 피했다.
하필 그의 시선 끝에 놓인 것은 서혜빈이 읽던 만화책의 표지였다.
[누구도 우리의 사이를 막지 못해!]
제목을 읽은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타이틀이었다.
“처음에 몇 마디는 작게 소곤거려서 못 들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그럼 후자 쪽도 가능성이 있어.”
“제가 볼 때는 후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
서혜빈이 숨을 허, 하고 뱉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전자는 아무래도….”
“쯔쯧. 너는 아직 여자 마음을 잘 모르는구나. 금단의 사랑이 얼마나 사람을 흥분하게 하는지 알아?”
별로 알고 싶지 않은데요.
남자는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는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흠.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그 여자를 얌전히 둘 수는 없어.”
한서희가 하려는 일은 방해하고 보는 게 상책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만나야지. 그리고 그 남자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자. 연인이든, 비밀을 쥐었든, 우리에게 이득이니까.”
“이미 길드 계약은 된 것 아닙니까?”
“내가 위약금도 못 물어줄 것 같아?”
한서희가 직접 길드 가입까지 시킨 걸 보면 남자는 분명 상당히 강한 능력자일 것이다.
어떤 사정이 있어 잠깐 F반에 있을 뿐이겠지.
‘그런 사람을 소나무에 가게 둘 수는 없지.’
강한 헌터는 곧 길드의 경쟁력이다.
업계의 경쟁자인 소나무에게는 단 한 사람이라도 순수히 넘길 수 없었다.
“한주석한테 시켜서 데려오라고 해.”
“알겠습니다.”
“미리 말하는데, 애들한테 시키라고 해. 괜히 직접 움직여서 한서희 눈에 띄지 말고.”
***
1교시가 끝났다.
유현은 뒤통수에 꽂히는 시선을 느끼며 기지개를 켰다.
“쟤가 진짜 걔야?”
“그렇다는데?”
“가출하고 실종됐다더니 멀쩡하네.”
유현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유현의 실종은 한때 1학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기에 다들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쟤네 부모님이 아카데미 와서 전단지 돌리셨었지?”
“맞을걸?”
다들 뒤에서 수군거리기만 할 뿐, 누구 하나 다가오는 이 없었다.
유현은 슬쩍 주시하를 돌아보았다.
수업이 끝난 직후, 주시하는 책상에 엎드렸다.
‘얘도 친구가 없고, 나도 친구가 없고.’
이건 초등학교 때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더 친해졌을지도 모른다.
“주시하, 저 새끼 바로 자는 척하네.”
“저러면 그냥 넘어갈 줄 아나 본데?”
“쳐? 아니면 좀 기다려?”
주시하를 향한 험담도 자주 들려왔다. 교실에 들어온 지 고작 한 시간이 조금 넘었지만, 들은 욕설만 해도 한 바가지였다.
유현은 주시하를 욕하는 이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자마자 생각났다. 그만큼 과거에 임팩트를 남긴 인물들이었다.
“야, 시하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엎드렸던 주시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 어? 부, 불렀어?”
“너 왜 우리한테 인사 안 해?”
“......미안해.”
“말로만 그러면 다야?”
인기척이 서서히 다가왔다.
유현은 돌아보지 않고 앞에 앉은 주시하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너 게임기 가져왔지?”
노랗게 머리를 물들인 남자가 엉거주춤 몸을 돌려 앉은 주시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 당연히 가져왔지.”
“근데 왜 바로 안 줘?”
“아, 미안! 잠깐 까먹었어….”
금발 남자가 유현을 흘겼다.
“이 새끼 때문에?”
“아, 아니야! 그건 아니야.”
유현은 남자와 눈을 마주했다.
금발 머리와 어두운 태닝 피부.
얼굴 곳곳에 장식된 피어싱까지.
교복에 붙은 금태양이라는 이름마저도 양아치라는 교내 직종에 어울리는 인간이었다.
“너, 이름이 유현이라고 했지?”
“그래.”
“너 1년 꿇어놓고 왜 여기 와 있냐?”
“선생님이 있으라고 했어.”
금태양이 씩 웃었다.
“너 때문에 우리 시하가 게임기 주는 걸 까먹었대잖아.”
“미안.”
유현이 웃으며 사과했다.
이런 놈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배알이 꼴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괜히 여기서 문제를 일으켜 학교생활을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 말로만?”
유현은 대답하는 대신 가만히 금태양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금태양이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눈을 피했다.
“야, 빨리 게임기 줘.”
“여, 여기.”
“좀 빌린다?”
“알았어. 대신 오늘 안에는….”
게임기를 받아든 금태양은 주시하의 말을 무시하고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는 게임기를 켜는 대신 유현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저런 놈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좀 더 작고, 왜소했고, 소심했다.
주시하 다음으로 괴롭힐 만한 놈이라고 생각했기에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네.’
1년 만에 그게 가능한가?
금태양은 고개를 갸웃하며 게임기를 켰다. 주변에 앉아 있던 그의 패거리들이 게임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야, 쟤 방금 네 말 씹은 거 아니야?”
“저 새끼 싸가지 존나 없네. 이거 그냥 넘어갈 거냐?”
금태양은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유현의 눈빛이 어딘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 봐주지 뭐.”
그렇게 쿨한 척 다시 게임에 집중하려던 그때.
“그거 봐주면 다음에 또 저래. 미리 싹을 잘라놓자.”
“맞아, 태양아. 주시하 새끼 자기 친구 왔다고 존나 나댈걸?”
무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떠들었다.
별생각 없었던 금태양도 곧 그들의 생각에 동의했다.
듣고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혼 좀 내줘야겠어.”
“애들 모아서 한 번에 조지자.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하잖냐.”
무리는 두 사람을 칠 계획을 궁리했다.
***
점심시간.
유현과 주시하는 하위 클래스 공용 식당에 앉아 급식을 먹었다.
“그 새끼들이 아직도 너 괴롭혀?”
유현은 밥을 먹으며 아까 전 이야기를 했다.
“괴, 괴롭히는 거 아니야. 그냥 게임기 빌려주는 거지.”
“그런 놈들이 그렇게 욕을 해대냐? 너도 다 들었지? 그리고 그 게임기 말이야. 그것도 빌려서 안 돌려주잖아.”
“도, 돌려주긴 해. 조금 오래 걸리는데 나는 상관없어. 친구니까.”
친구라는 말에 유현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너 진짜 그게 친구라고 생각하냐?”
유현은 자신이 친구라고 부르던 존재들을 떠올렸다.
전장에서 함께 싸우며 미래를 꿈꾸던 이들. 서로에게 등을 맡겼고, 서로의 목숨을 지켰다.
유현에게 친구란, 자신의 목숨조차 바칠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 그럼 친구지….”
“친구라는 말 아무한테나 가져다 붙이지 마.”
친구라는 말이 아까운 놈들.
전쟁통에 타인의 목숨으로 삶을 연명하던 무뢰배와 다를 게 없었다.
“미안….”
유현은 한숨을 쉬고는 테이블 저쪽에 앉은 금태양 무리를 응시했다.
우연인지 그들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와줄게.”
“응? 뭐를?”
“게임기 가져와 준다고.”
그 말에 주시하가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 쳤다.
“아냐! 정말 괜찮아! 어차피 돌려줄 거야.”
“안 돌려주면? 그러면 돌려달라고 말할 수 있어?”
“그건….”
“그런 것도 말 못 하는 게 친구냐?”
주시하는 말 없이 고개를 떨궜다.
대답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갔다 온다.”
“어?”
주시하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유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