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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을 나온 유현은 홀로 집에 돌아왔다. 아주 깊숙이 땅을 파서 묻었다.
자신의 손으로 죽였지만, 기분이 찝찝했다.
“지구라서 그런가.”
판대륙에서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그것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다.
“앞으로 이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유현은 한숨을 쉬며 집 안을 살폈다. 혈흔을 전부 지운다고 해도 이 집을 다시 쓰기는 힘들 것 같았다.
가구는 부서졌고, 벽은 허물어졌으니 수리하는 것보다 새집을 구하는 게 싸게 먹힐 듯 하다.
‘당분간은 숙박업소에서 머물어야겠군.’
숙박업소의 요금도 꽤 비싸니 길게 머물지는 못할 것이다.
그 안에 싼 원룸이라도 구해야 했다.
“이쪽으로는 문외한인데.”
부동산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다.
그리고 그보다 더 급한 건 돈이었다. 집을 사려면 결국 돈이 필요하다.
마석을 가지고 있지만, 팔 수가 없으니 말짱 도루묵이었다.
“일단 집부터 알아보자.”
마석의 환전이야 다른 헌터에게 부탁하여 해결할 수 있다.
그러니 집을 구하려면 얼마가 필요한지, 어떻게 구하는지부터 알아보는 게 우선이었다.
***
바깥으로 나온 유현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도서관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정보를 얻으려면 컴퓨터를 쓰는 게 좋고, 컴퓨터를 공짜로 쓰려면 도서관을 가는 게 좋다는 친절한 안내 덕분이었다.
“꺄하하!”
“도망쳐~”
도서관은 옆 동네 문화센터 건물에 있었다. 문화센터에 행사가 있는 건지 입구부터 사람들이 많았다.
“송진 문화원 정기 후원 행사?”
센터 입구에 붙은 현수막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송진. 유현도 알고 있는 대기업의 이름이었다.
“우리 집도 하나 후원해주면 안 되나.”
부질없는 바람을 뒤로하고 유현은 도서관으로 들어갔다.
왜인지 소란스러운 도서관. 유현이 아는 조용한 도서관과는 전혀 달랐다.
‘행사를 도서관에서도 하나?’
유현은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이 많았지만, 대부분은 아이들이라 어떤 행사인지 곧장 알 수 있었다.
‘낭독회?’
현수막 아래,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고운 흑색 머리칼과 새하얀 피부.
코는 오뚝했고, 책을 향한 날카로운 눈매는 도도한 느낌을 주었다.
미인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용모였다.
“거인이 말했어요. 그 난쟁이의 소원을 너에게 줄 테니 부디 이루어 달라고요.”
고운 목소리는 조금 허스키하게 들리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유현은 스르륵 낭독회에 빠져들었다.
“공주는 거인의 부탁을 들어줬을까요?”
“아니요!”
“들어줬어요!”
아이들은 낭독자의 물음에 호응했다. 여자는 옅은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건 다음 시간에 알려줄게요.”
“아아!”
“알려주세요!!”
아이들의 바람에도 여자는 냉정하게 책을 덮었다. 곳곳에서 아이들의 실망이 들려왔지만,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다.
‘자원봉사자 같은 건가.’
잠시 여자를 바라보던 유현은 이내 관심을 끄고 몸을 돌렸다.
오는 길에 얼핏 보기로는 컴퓨터가 있는 곳은 정보 열람실이었다.
그리고 정보 열람실은 도서관 3층에 있었다.
***
도서관 3층 관계자용 쉼터.
쉼터의 문에는 봉사자 한서희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쉼터 안에는 조금 전까지 낭독회를 하던 여자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양복 차림의 남자가 한서희에게 물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한서희는 꼴깍꼴깍 물을 들이켰다.
책을 읽으며 말랐던 성대가 다시 촉촉해졌다.
“바로 돌아가시겠습니까?”
“아뇨. 여기서 좀 쉴게요.”
“그럼 가서 점심이라도 사 오겠습니다.”
홀로 남은 한서희는 남자가 나간 걸 확인하고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곧 작은 화면에 귀여운 고양이 영상이 나타났다. 한서희는 그 영상에 시선을 고정했다.
“참, 아가씨.”
한서희가 황급히 스마트폰을 숨겼다. 입구에 선 남자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말을 이었다.
“점심은 뭘로 드시겠습니까?”
“아,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그것보다 다음에 들어올 때는 노크좀 해주세요.”
“아, 예. 죄송합니다.”
다시 남자가 나가고 한서희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들키는 줄 알았네.”
한서희는 다시 고양이 구경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할아버지에게서 문자가 왔다.
한서희는 잠시 영상 시청을 미뤄두고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 행사는 잘 마무리 했느냐?
송진문화원 정기 후원 행사.
후원처는 국내에서 손가락에 꼽히는 대기업 송진 그룹이었다.
한서희는 이곳에 기업의 대표자로 참여했다. 사람들과 사진을 찍고, 봉사자가 되어 아이들에게 책도 읽어 주었다.
-잘 마무리했어요.
답장에 대한 답장이 금세 날아왔다.
일이 바쁠 텐데도 빨랐다.
외손녀인 그녀를 향한 송진 그룹 회장의 사랑은 참으로 유별난 것이었다.
-고생했다. 푹 쉬어라.
한서희는 흐뭇하게 웃고는 다시 고양이 영상을 시청하려고 했다.
그런데 왜인지 모바일 데이터의 신호가 잘 연결되지 않았다.
한서희는 스마트폰을 들고 이리저리 이동하며 영상의 재생을 시도했다.
출입구에 가까워질수록 신호가 강해져 영상의 버퍼링이 빨라졌다.
‘그래도 느린데….’
한서희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
“하아.”
컴퓨터를 앞에 둔 유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컴퓨터라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몇 번 다뤄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 조작법을 완전히 까먹었다. 유현에게 키보드는 신기한 소리가 나는 버튼이었고, 마우스는 손에 쏙 들어오는 장난감이었다.
“물어볼 사람도 없고.”
정보 열람실의 위치 탓인지 이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안내 데스크도 비어 있는 탓에 혼자서 끙끙 앓는 수밖에 없었다.
“어쩐다….”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유현이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게 정보 열람실을 나온 그때, 복도에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그녀는 휴대전화에 시선을 집중한 채 정보 열람실로 걸어오고 있었다.
“저기요.”
이름을 모르는 유현은 저기요라는 호칭으로 상대를 불렀다.
휴대전화만 뚫어져라 쳐다보던 한서희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저, 저요?”
“자원봉사자죠?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한서희는 억지로 웃으며 휴대전화를 집어넣었다.
일단 이곳에 온 이상 자신의 역할은 후원 대표이자 자원봉사자이기도 했다.
“뭘 도와드릴까요?”
“제가 컴퓨터 써보는 게 처음이라서요. 좀 알려주세요.”
“......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한서희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상대의 표정을 보니 진지하게 하는 말 같았다.
“아, 혹시 시간이 안 되시나?”
“아뇨. 도와드릴게요.”
두 사람은 함께 정보 열람실로 들어갔다.
“진짜 컴퓨터 처음 써보세요?”
“예.”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그렇지 못하니까.
“아까 저기서 책 읽으시던 분이죠?”
“네, 맞아요.”
“원래 자주 읽어요?”
“아니요. 오늘은 행사 때문에 읽었어요.”
옆 컴퓨터에 자리잡은 한서희는 직접 행동을 보이며 컴퓨터의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어때요? 되죠?”
“와, 신기하다. 이렇게 검색하면 되는 거네요?”
유현은 컴퓨터를 곧잘 사용했다.
크게 어려울 것도 없기에 응용도 쉬웠다.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천만에요.”
유현은 곧장 컴퓨터를 통해 정보를 조사했다. 어디 집값이 싸고, 얼마가 필요한지 등.
옆에 앉은 한서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동영상 사이트에 접속했다.
사람이 없으니 굳이 잘 되지도 않는 휴대전화로 영상을 볼 이유가 없었다.
‘너무 귀엽다.’
한서희는 자리에 앉아서 한참 동안 고양이를 구경했다. 집냥이, 길냥이 가리지 않았고, 외국 고양이던 한국 고양이던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고양이가 나오는 영상은 모조리 챙겨보았다.
“고양이 좋아해요?”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한서희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무 놀란 탓에 뒤늦게야 보고 있던 창을 닫았다.
“왜 꺼요?”
“어, 언제부터 뒤에 있었어요?”
“계속 있었는데.”
계속 있었는데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고?
아무리 영상에 집중하고 있었다지만, 그녀의 신경은 항상 예민하게 주변을 탐지했다.
그런데도 조금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
이게 의미하는 건 한 가지.
상대가 기척을 지울 수 있을 정도의 강자라는 뜻이었다.
“그렇게 뒤에 서서 구경하는 거, 조금 기분 나쁘네요.”
“아, 기분 나쁘셨구나. 미안합니다.”
한서희는 컴퓨터를 종료하고는 잰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화난 것도 있었지만, 그녀의 걸음이 빨라진 데는 창피함이 더 컸다.
‘어떡해, 어떡해.’
고양이를 좋아하는 건 그녀가 간직한 비밀 중 하나였다.
기업의 후계자가 되려면 쓸데없는 일에는 시간을 낭비해선 안 된다는 할아버지의 가르침 탓이었다.
어려서부터 감춰오던 귀여운 동물 감상이라는 쓸데없는 취미를 하필이면 여기서 들켜버린 것이다.
‘그 정도면 좀 높은 등급 헌터는 될 텐데….’
괜히 소문이 퍼지진 않을까.
하지만 남자는 자신을 모르는 눈치였다. 그것도 수상했으나, 컴퓨터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 어느 정도 수긍은 됐다.
‘......상관없겠지?’
생각에 집중한 채 걸어가던 그녀는 어느새 문화센터의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와 있었다.
“언제 여기까지 왔대.”
다시 계단을 올려가려던 한서희의 귓가에 웬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거칠고 날이 서 있는 울음소리.
중간중간 사람의 웃음소리가 섞여 들리는 걸 보니 대강 어떤 상황인지 예상이 갔다.
한서희는 그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지하 주차장의 지상 입구 뒤쪽.
거기서 웬 건장한 남자 세 명이 고양이를 괴롭히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에요!”
한서희는 소리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
“일단 목록으로 추리면 이 정도인가.”
유현은 교통과 상권, 가격 및 계약기간을 고려하여 부동산 리스트를 완성했다.
모든 조건을 충족하려니 상당히 골치였지만, 어찌어찌 몇 개 찾을 수는 있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유현이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마석을 대신 바꿔줄 헌터를 구할 차례였다.
“아까 그 사람한테 말해볼 걸 그랬네.”
여자가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분명 헌터였다.
게다가 자원봉사자니까 친절하게 마석도 바꿔주지 않을까.
문득 이름 모를 여자가 머문 자리를 돌아본 유현은 의자 발치에 떨어져 있는 고양이 지갑을 발견했다.
“뛰어가더니 떨어뜨렸나 보네.”
지갑을 든 유현은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신경을 최대한 예민하게 세우고는 한서희에게서 느껴졌던 강자 특유의 기운을 뒤쫓았다.
‘근처에 있으면 가져다 줘야겠다. 없으면 데스크에 맡기고.’
돌려주면서 겸사겸사 마석에 관한 것도 부탁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