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자는 헌터가 하고 싶다
1
“길었군.”
별이 가득한 밤. 남자가 발코니 난간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내려다보고 있는 시선의 끝에는 연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음악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추고, 술잔을 기울였다.
처음 이곳에 끌려왔을 때는 꿈도 못 꿀 광경이었다.
“평화가 좋긴 하네.”
유현.
대한민국의 18세.
비루한 집안 사정을 메꾸기 위해 사냥터에서 적을 죽이다가 느닷없이 등장한 게이트에 빨려 들어와 이름 모를 세계에 떨어졌다.
그게 천 년간 이어진 이세계 생활의 시작이었다.
“이젠 기억도 안 나네.”
유현이 로브의 가슴팍 사이로 손을 넣었다. 곧 공책 하나가 로브의 아공간을 빠져나와 허공에 떠올랐다.
[아티팩트 – 무한의 양피지]
이름처럼 무한한 분량을 가진 양피지다. 함께 여정을 떠났던 마법사에게 부탁해 공책의 형태로 가공했다.
유현은 이 양피지에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모두 적었다.
“첫 번째 페이지.”
마력을 부여하자 표지가 넘어가고 첫 번째 페이지가 나타났다.
아주 오래전 기록했던 삐뚤빼뚤한 글씨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곳은 흔히들 말하는 이세계였다.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그걸 알려줬다.
목소리는 나보고 용사가 되어 마왕을 죽이고 세상을 구하라고 했다.
자기가 시키는 대로 하면 마왕을 죽일 힘을 준다고 했다.」
「100일. 목소리가 부여하는 퀘스트는 매일 나를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몸은 물론이고 성격까지 개조당하는 것 같다. 힘들다.」
「1년 2개월 12일.
마을에 마물이 쳐들어왔다.
마을에 파견된 제국의 수비대와 힘을 합쳐 마물을 무찔렀다. 나는 수비대장의 눈에 띄어 수비대에 징용되었다.」
「15년 11개월 21일.
수비대가 전멸하고, 나는 혼자 살아남아 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제국 제5번 수비대 수비대장이라는 새로운 직위를 부여받았다.」
「29년 4개월 10일.
사람들이 나를 불멸의 마검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35년 6개월 11일.
여정을 떠난 여섯 번째 용사가 시체가 되었다. 다음 차례는 나였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45년 7개월 4일.
마물을 죽이며 마왕의 흔적을 쫓길 10년. 마왕의 72군단 중 하나를 발견했다. 단순한 마물이 아니라 마족으로 구성된 군단이었다.
ps.악마의 피에서는 쓴맛이 났다.」
「48년 12개월 12일.
군단장의 정신 공격에 넘어가 동료들을 죽이고 말았다.
휴식을 취했다면 쉽게 당하지 않았을 텐데. 후회된다. 죽고 싶었다.」
「51년 10개월 12일.
꿈속에서 동료들이 나왔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니 좌절하지 말고 다시 일어나 마왕으로부터 세상을 구해달라고 했다.
나는 한참을 울다가 여정을 재개했다.
동료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동료들의 복수를 하기 위해서.」
「300년 8개월 15일.
군단의 절반을 제거했다.」
「749년 2개월 9일.
유현, 지구, 대한민국, 서울, 엄마 이름은 황세연, 아빠 이름은 유창준, 동생의 이름은 유희연, 유하연.
오늘도 습관처럼 되뇌었다. 일기를 한글로 적는 것도, 혼자서 한국말을 중얼거리는 것도 다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기억한들 의미가 있을까.
몇백 년이 지났다. 내가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내 기억 속의 장소는 아닐 것 같았다. 가족들도 모두 죽었겠지.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무의미해졌다.
그래도 싸움은 포기하지 않는다.
반드시 세상에서 악마의 존재를 지울 것이다. 그게 동료들을 향한 마지막 책임이었다.」
「1000년 3개월 21일.
마계에서 마왕의 직속 군대와 50년간 싸웠다. 마왕은 내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최후의 결사대는 죽을 위기를 몇 번이고 넘겨 가까스로 마왕을 살해했다.」
「마왕이 죽기 전에 이게 끝이 아니라고 말했다. 좆까. 한국말로 욕을 박아주었다. 마왕이 웃으며 눈을 감았다.」
유현은 일기장을 덮었다.
첫 여정에 동행했던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뒤에도 수많은 동료와 함께했지만, 처음 만난 동료들만큼 유대감이 깊었던 이들은 없었다.
그들을 잃은 뒤로는, 언젠가 모두 나를 떠날 거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깊은 관계를 만들지 않았다.
“다 끝났다, 친구들.”
유현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온통 끔찍한 기억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먼저 떠나간 동료들의 바람 덕분이었다.
“목소리. 듣고 있는 것 다 안다.”
유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자신을 이 세계로 이끌고, 자신에게 힘을 주었던 목소리.
어느 순간부터는 들려오지 않던 목소리를 불렀다.
“네가 말한 대로 마왕을 죽였어.”
고요하다.
파티의 소음과 바람 부는 소리만이 적적하게 들려왔다.
“너는 이제 약속을 이행해야 해. 나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라.”
유현이 짧게 침묵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든 말든 상관없어. 이제 거긴 없을 테니까.”
한 국가가 사라지고도 남을 만큼 오랜 시간이 지났다.
설령 대한민국이 존재한다고 해도 자신이 알던 곳은 아닐 터. 그런 곳으로 돌아가기에는 이곳 판대륙에서 살아온 시간이 너무나 길었다.
“대신 하나만 묻지. 왜 나지? 왜 하필이면 나를 이 세상으로 불러왔지?”
유현은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를 찾을 때 하던 습관 같은 행동이었다.
“말하지 않을 건가?”
가라앉았던 분노가 서서히 되살아났다.
천년. 천지가 개벽하고도 남을 시간을 이곳에 강제로 끌려와 목소리의 노예처럼 살았다.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던가.
살을 에고, 뼈를 깎았던 수련.
사방에서 몰아닥치는 죽음의 위기.
스러져가던 소중한 존재들과 지구의 기억들.
그 모든 것들이 유현에게는 아픔이었고 쓰라림이었다.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할 거냐?”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들던 목소리는 정작 들려야 할 때가 되니 들려오지 않았다.
“......하하하하!”
유현이 실성한 듯 웃었다.
일대의 마나가 크게 진동했다.
“꺄악!”
“마물인가!?”
“일단 피해요!”
강력한 마나의 파동이 연회장까지 퍼졌다. 사람들이 급히 왕궁 내부로 피신했다.
“내 모든 것을 앗아가 놓고!”
이제 남은 것은 무엇인가.
위대한 영웅이라는 호칭과 존경.
모두를 구했던 힘.
그것뿐이었다.
모든 걸 털어놓았던 동료도, 소중한 가족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하...”
유현은 웃음기를 지웠다.
언제 그랬냐는 듯 휘몰아치던 마나가 잠잠해졌다.
“하다못해 내 삶을 포기해야 했던 이유라도 알려줘라, 제발.”
수천수만 번은 반복했던 질문.
언제나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기에 습관적인 푸념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지 않을까.
모든 일을 끝낸 지금이라면 답이 들려오지 않을까.
작은 희망을 품은 채 유현은 답을 기다렸다.
“......”
여전히 적막만이 가득하다.
유현의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끝까지,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구나.
“마지막 기회다.”
유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의 속에서는 목소리를 향한 살의가 끓어올랐다.
천년.
그 시간만큼 놈을 향한 분노가 쌓였다.
“나타나지 않는다면, 네가 지키고자 했던 세상을 내 손으로 끝내겠다.”
한 세계를 지킨 힘의 소유자.
동시에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존재였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다.
동료들이 지키고자 했던 세상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그저 이런 식의 협박이라도 통하길 바라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구원자 유현]
그때, 유현의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현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같잖은 새끼. 협박하니까 기어 나오네.”
[구원자 유현. 당신은 주어진 소명을 완수했습니다.]
“그래, 새끼야. 네가 말한 대로 마왕을 죽이고 세상을 구했다.”
[당신의 활약으로 세계는 안전해졌습니다.]
[약속한 대로 당신을 지구로 돌려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냥 여기 남는 건 안 되냐?”
[불가능합니다.]
유현이 한숨을 쉬었다.
몇백 년만 더 빨랐다면 어땠을까.
가족들이 다 살아있었으면, 자신이 기억하던 세계가 그대로 남아있었으면, 지구로의 귀환을 망설이지 않았을 텐데.
“너무 늦었잖아….”
이제는 고향보다도 더 친숙해진 판대륙. 지구에 가족이 없다면 굳이 이 땅을 떠날 이유가 없었다.
[구원자 유현. 당신의 가족은 살아있습니다.]
그때, 머릿속에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유현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
“......살아있다고?”
목소리는 답하지 않았다.
유현의 가슴이 맹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정말 살아있어? 다들 정말 살아있는 거야?”
[구원자 유현의 전송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그 순간.
몸을 거스르는 감각이 느껴진다.
중력이 뒤집히며 어딘가로 빨려들어 가는 듯한 느낌.
유현은 이를 악물며 자신의 육신을 강제로 붙들었다.
그의 모습이 흐릿해졌다 뚜렷해지기를 반복했다.
“대답해! 진짜 살아있는 거냐고!”
[전송을 시작합니다.]
직후, 유현의 모습이 홀연히 사라졌다.
고요한 침실. 잔잔한 바람만이 방안의 침묵을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