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오랜 옛날 한 생명체가 탄생했다.
프로미아 행성의 막대한 마력이 뭉쳐져 탄생한 개체였다.
개체의 이름은 핀들레이.
최초의 드래건이었다.
막대한 마력의 핀들레이는 마법체로서 많은 이적을 선사했다.
아름다운 하늘과 드넓은 대지.
풍요로운 산과 들.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까지.
자연을 창조한 핀들레이는,
가히 신에 필적할 정도였다.
***
어느 날, 드넓은 창공을 비상하던 핀들레이는 짙은 외로움을 느꼈다.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당황했지만,
그는 차분히 자신을 관조했다.
──── 콰콰콰콰콰...
순간, 심장에서 마력이 발현되었다.
핀들레이의 압도적인 마력에, 프로미아 행성의 모든 마력이 감응되었다.
하나의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그의 마력이 증폭된 것이다.
행성 전체를 아우르는 마력에, 세상이 개벽되었다.
──── 빛이 번쩍이고,
거대한 창공이 두 동강 났다.
하늘 위에서 무언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흔아홉 마리의 헤츨링과
신비로운 영체, 정령이었다.
핀들레이는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것이다.
***
수천 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흔아홉 마리의 헤츨링이 드래건이 되었다.
영체의 몸이었던 정령이 오대 원소가 되었다.
드래건이 사랑을 느꼈고,
정령이 사랑을 느꼈다.
사랑은 새로운 생명체를 잉태시켰고,
새로운 종족을 창조했다.
드래건과 정령의 후손인, 드래고니안.
마수와 정령의 후손인, 수인족.
정령과 정령의 후손인, 딴딴 체형 둠족 등.
프로미아 대륙을 지배할 새로운 종족들이었다.
시간이 지나 먼 훗날, 문명이 꽃피웠을 때,
드래건과 정령은 신으로 추앙받았다.
최초의 드래건과 아흔아홉의 자녀들.
그리고 자연의 오대 원소로 말이다.
***
그로부터 반만년이 지난 어느 날,
암흑룡 길가메시가 반란을 일으켰다.
지옥문을 개방해, 악마들을 소환한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악마들이 소환되고,
수많은 생명들이 학살되었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 정도였다.
프로미아의 수호신, 아흔여덟 마리의 드래건이 분노했다.
그들 모두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이윽고, 수천억의 악마들과 격돌했다.
악전고투가 벌어지고···
아흔여덟 마리의 드래건이 모두 소멸되었다.
악마들의 힘이 그만큼 강대했던 것이다.
드래건이 모두 소멸되자,
잠들어있던 최초의 드래건, 핀들레이가 눈을 떴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핀들레이가 악마의 침공을 눈치챈 것이다.
핀들레이 VS 수많은 악마들이 격돌했다.
──── 콰콰콰콰콰콰콰콰콰...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경천동지할 전투가 벌어지고···
제아무리 강대한 악마라도 핀들레이를 막을 수 없었다.
신에 필적한 핀들레이가 악마들을 압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핀드레이 혼자 무쌍을 찍고 있을 때,
암흑룡 길가메시가 습격했다.
“길가메시!”
길가메시가 배반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한 핀들레이.
결국, 치명상을 입었다.
“너는 어찌하여 나를 해하고, 악마들과 손을 잡은 것이냐!”
“아버지, 나는 당신을 증오합니다. 당신을 해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다 할 겁니다.”
“이노오오옴!!!”
격노한 핀들레이가 자신의 힘을 모두 쏟아부었다.
──── 콰콰콰콰콰콰콰...
무차별적인 폭격이 이뤄지고···
암흑룡 길가메시가 차원 균열에 봉인되었다.
영원히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지독한 형벌을 받은 것이다.
이 일로 모든 힘을 소진한 핀들레이는 절망했다.
악마들을 막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어떡해서든, 드래고니안의 멸종은 막아야 했다.
핀들레이는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한 가지 마법을 발현했다.
크리스탈 보호막 마법이었다.
“나는 죽지만, 내 자손들은 영원토록 프로미아를 지킬 것이다!”
마법과 함께 핀들레이가 소멸되고,
로도스 왕국에 크리스탈 보호막이 생성되었다.
이로써 드래고니안의 멸종은 막은 것이다.
***
“암흑룡 길가메시가 왜 드래건들을 배반한 거죠?”
“정령의 여왕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지만, 너무 오래된 얘기라···”
“정령의 여왕이라고요? 정령에게도 여왕이 있나요?”
“전설에 따르면, 그렇다는군.”
“아,”
“고대의 전설은 여기까지만 하지. 궁금한 게 있다면, 나중에 린에게 묻도록 하게.”
내 마력을 살폈던 위로그.
그가 경악하더니, 갑자기 고대 역사를 꺼내 들었다.
왜 고대 역사를 꺼내 들었는지 의문이었지만,
되묻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경청했을 뿐이다.
“지금부터는 로도스 왕국의 얘기네.”
위로그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로도스 왕국에 한 영웅이 탄생했지. 영웅의 이름은 안마유론의 베스. 바로 최강의 드래고니안, 로서였네. 로서는 모든 드래고니안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 그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장 많은 악마들을 사냥했고, 가장 많은 동료들을 구했다네. 그의 인품은 한없이 인자했고 훌륭했으며 어느 것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었지. ····· 그랬던 그가···”
10년 전, 안마유론의 베스가 반역을 일으켰다.
드래고니안의 영웅, 로서가 군대를 일으킨 것이다.
“군권을 거머쥔 순간, 그가 그렇게 돌변할 줄이야···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는 암흑룡 길가메시의 화신이었네.”
로도스 왕국의 영웅 로서가,
로도스 왕국을 무너뜨렸다.
샤론 공주를 제외한 모든 왕족과 귀족들이 처형당했다.
아주 잔혹하게 말이다.
“공주님을 모시고 미친 듯이 도망쳤다네. 바로 이곳, 라둔성으로. 지금은 테일러성이라 불리는 곳이지.”
로도스 왕국이 무너지고, 베스 제국이 건설되었다.
황제가 된 로서가 자국민들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암흑룡 길가메시의 맹목적 저주였다.
저주에 물든 드래고니안들이 다크템플러로 변질되었다.
로서의 영원한 노예가 된 것이다.
“다크 템플러!”
나는 깜짝 놀랐다.
다크 템플러라면, 악마의 기사와 함께 출현했던 마물이었다.
놈들의 정체가 드래고니안이었다니···
놀라운 사실에 벙찐 표정을 지었다.
“다크 템플러를 알고 있나 보군.”
“지구를 침략했던 마물입니다. 발록 카마쉬와 함께 했었죠.”
위로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껏 총 두 번의 전쟁을 치렀네. 1차전에서 2개의 군단과 싸웠고, 2차전에서 5개의 군단과 싸웠지. 이번 3차전에서 12개의 군단과 싸울 것이네.”
길가메시의 화신,
로서의 힘이 점점 강대해지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로서의 목적은 단 하나! 드래건 하트인 크리스탈을 파괴하는 것. ····· 우린, 반드시 크리스탈을 지켜야 하네.”
위로그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테일러 성의 전초기지.
난공불락의 요새, 글로디악.
글로디악에 핀들레이의 심장, 크리스탈이 봉인돼있었다.
위로그의 말처럼, 반드시 지켜야 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너무 의아해하지는 말게. 그분을 만나 뵙기 전, 대략적인 역사를 설명한 것뿐이니까.”
위로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따라오라며 눈짓했다.
나는 그를 따라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
“하이퍼 스피릿이라구요?”
“네, 군주님.”
“놀랍군요. 실력이 뛰어난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그분의 수하도 하이퍼 스피릿이라고 합니다.”
“확실한가요?”
“네, 디폴트 기사장이 직접 확인했습니다.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총관님과 함께 이곳으로 오는 중입니다.”
“그는 몇 살이죠?”
“20대 초반으로 들었습니다.”
“키가 꽤 컸었죠?”
“네, 키가 꽤 컸습니다.”
“어깨도 꽤 넓었고요.”
“네, 군주님.”
“으음, 그가 어떤 스타일인지 금방 알겠네요.”
“네? 어, 어떤··· 스타일이라뇨?”
뜬금없는 말에, 눈을 깜빡였다.
“훗, 제 스타일이요.”
군주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구, 군주님···”
당황한 린이 땀을 삐죽 흘렸다.
“농담이에요. 호호~”
자리에 앉은 군주가 차를 마셨다.
‘하이퍼 스피릿이라면 분명 큰 도움이 될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반드시 잡아야 해.’
따끈한 차가 무척이나 감미롭게 느껴졌다.
곧 있을 3차전을 잠시라도 잊을 만큼 말이다.
- 똑! 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군주님, 위로그 총관입니다.”
“들라 하세요.”
철커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총관 위로그와 함께, 젊은 사내가 들어섰다.
***
위로그와 함께 들어선 곳은, 샤론 군주의 집무실이었다.
“군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위로그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히며 예를 표했다.
“어서 오세요, 위로그 총관.”
샤론 군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은 태리 기사 단장입니다.”
위로그가 날 소개했다.
“말씀 전해 들었어요. 우선, 드래고니안과 테일러성을 대표해, 깊이 감사드려요. 하이퍼 스피릿인 그대는 우리 일족에게 천군만마나 다름없어요. 감사해요. 그리고 영광이에요. 저는 로도스 왕국의 마지막 공주, 샤론 테일러입니다.”
샤론이 고개를 숙이자, 나도 고개를 숙였다.
“군주님, 태리 단장의 마력을 직접 확인해 본 결과, 저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몸속에 숨겨진 미증유의 힘은 파악조차 하기 어려웠습니다.”
“아.”
위로그의 말에 샤론이 깜짝 놀랐다.
마력의 종주인 엘리멘탈이 감당할 수 없다니···
상식적으로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수 능력을 왜 각성하지 못했는지, 파악이 불가능합니다. 군주님께서 직접 살펴주시길 요청드립니다.”
“····· 알겠어요.”
위로그의 요청에 샤론이 수락했다.
그녀가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저는 크리스탈의 축복을 받은 몸이에요. 비록 잠시지만, 엘리멘탈 마스터가 될 수 있어요. 그러니 제게 몸을 맡기세요.”
“·····”
“뭐 하나? 어서 팔을 내밀지 않고.”
위로그가 다그쳤다.
나는 팔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 팔목을 잡았다.
“그럼, 시작할게요.”
그녀의 말과 함께, 신비한 마력이 몸속으로 주입되었다.
이윽고,
“마, 맙소사···”
샤론이 경악성을 질렀다.
아마도, 내 마력에 놀란듯한 표정이었다.
“사실이었군요. 이 정도로 대단한 마력이라니··· 그런데 무척이나 어두운 힘이군요.”
그녀의 평가에 고개를 끄덕였다.
내 힘의 원천은 그림자였으니 말이다.
“당신은 하이퍼 스피릿이지만, 온전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어요. 당신의 역량이 그만큼 넓고도 깊다는 소리예요. 당신 스스로 역량을 100% 발휘한 순간, 특수 능력을 각성하게 될 거예요. 그러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이것만큼은 분명했다.
내 역량이 그만큼이나 뛰어나다는 것.
위로그가 날 괴물 보듯이 쳐다봤다.
대체 얼마나 강하길래 그런 소리를 하냐며 투덜거렸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특수 능력을 각성할 것이다.’
발록과 함께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겨난 순간이었다.
***
샤론 군주의 집무실을 나와 연무장으로 향했다.
“특수 능력을 각성하고 싶다면, 벽을 뛰어넘어야 해요. 흔히 말하는 깨달음이죠. 당신이 만약, 깨달음을 얻는다면 오늘 당장이라도 각성할 거예요.”
샤론 군주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깨달음이라··· 잠깐, 연무장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잖아.’
연무장에는 발타제가 있었다.
발타제라면 기사단장의 역할을 충분히 할 것이다.
‘그렇다면은···’
아무도 없는 정원으로 순간 이동했다.
(발타제,)
(예, 주인님.)
(잠시, 어딜 좀 다녀와야겠다. 나 없이도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주인님.)
(그래, 수고해라.)
(예, 주인님.)
발타제와 연락 후, 지도를 펼쳤다.
위로그가 건네준 지도였다.
지도에는 리치 평야가 그려져 있었다.
고위급 악마가 존재한다는 장소였다.
‘고위급 악마라면 발록의 위치를 알고 있을 터. 발록을 잡은 후, 테사다르까지 잡는다면···’
공간의 잼, 3개를 모두 모아,
공간 능력을 각성할 수 있었다.
‘일단, 리치 평야로 간다.’
리치 평야의 고위급 악마부터 찾기로 했다.
놈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해둘 필요가 있었다.
● 불새 : 창공을 가르다.
‘불새.’
바닥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하늘 높이 비상했다.
차원 균열이 발생했던, 용암지대로 향했다.
‘생각보다 꽤 멀군.’
이틀 후면, 글로디악으로 출발해야 했다.
시간이 넉넉지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순간이동을 사용했다.
하늘에서 순간이동하자, 거칠 것이 없었다.
1km씩 쭉쭉~ 앞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보호막을 벗어나,
악마들의 권역에 들어섰다.
거대한 산맥도 순식간에 돌파했다.
불과 5분도 안 돼, 용암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제 이곳에서 어둠의 숲으로 향해야 했다.
어둠의 숲은 좌측 방향에 위치해 있었다.
처음 게이트를 벗어나 이곳에 도착했을 때,
폭풍우가 몰아쳤던 숲이었다.
꽤나 찝찝한 곳이었지만, 일단 저곳으로 향했다.
***
순간이동을 사용해 눈 깜짝할 사이에,
어둠의 숲에 도착했다.
하늘에서, 어둠의 숲을 내려다보았다.
별다른 특이점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숲이었다.
뭔가 불길함을 뒤로하고, 숲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였다.
!!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마치 무언가가 날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정도 느낌이면, 분명 뭔가가 있었다.
나는 바짝 긴장한 채 어둠의 숲, 위를 날았다.
- 비홀더 킹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시스템 음성과 함께, 머리끝이 쭈뼛거렸다.
‘으윽!’
온몸이 굳어진 채,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그저 힘없이 추락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