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말 그대로입니다. 저희는 주인님의 분신입니다. 주인님께서 자작이면 저희도 자작. 주인님께서 백작이면 저희도 백작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주인님께서 생존해 계시는 한 저희는 절대로 소멸되지 않습니다.)
(절대로 소멸되지 않는다?)
(현실에서 죽어도 이면 세계에서 다시 부활하게 됩니다. 24시간 후에 말입니다. 이미 주인님과 이면 세계는 하나로 연결된 상태니까요.)
━━━ 쾅! 쾅! 쾅! 쾅! 쾅…!
“이노오옴! 갈기갈기 찢어버릴 테다!”
여전히 밖에서는 1악이 난리 치고 있었다.
(주인님 저놈의 목을 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목을 치겠다?’
1악을 개똥같이 보는 발타제가 무척이나 든든했다.
‘물어볼 게 뭐 있어 나야 땡큐 감사지.’
(허락한다.)
발타제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께 보여드리겠습니다. 소멸을 두려워 않는 그림자 병사가 얼마나 강한지를 말입니다.)
(소멸을 두려워 않는 그림자 병사라)
‘그래 뭣이 됐든 살려만 다오.’
지옥의 문턱에서 생존의 희망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한껏 고무된 발타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인님께 영광을! 그림자 병력 출격하라!)
말과 함께 어둠 속에서 그림자 병사들이 벌떼처럼 솟구쳤다.
(주인님께서 직관하시는 자리다. 우리 군의 전력을 확실히 보여야 할 것이다. 모든 병력 위치로!)
- 척! 척! 척! 척! 척…!
쇳소리와 같은 발걸음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울려 퍼졌다.
발타제의 지휘 아래 그림자 병력이 각자의 위치에 도열했다.
발타제 룬 레슬러 프리실라 가츠를 선두로
25명의 그림자 남작이 뒤에 섰고
그 뒤에는 그림자 기사가
그 뒤에는 그림자 투사가
그 뒤에는 그림자 전사가
그 뒤에는 그림자 병사가
각각 다섯 명씩 도열했다.
그림자 병사들조차도 최상급 장비를 착용 중이었다.
그 위 등급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모두가 삐까번쩍했다.
완벽한 장비를 갖춘 2만의 정규 병력.
그 위용에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될 정도였다.
(먹구름에 거센 파도!)
레슬러가 자신의 오함마를 번쩍 들어 올렸다.
(먹구름에 거센 파도?)
(뭔 소리여 저거)
(먹구름이 어딨다는 것이여.)
(어디 비 온다는 소리 같은디)
(파도는 무신 여기가 무신 바다여?)
그림자 병사들이 웅성웅성거렸다.
(거 함마질하기 좋은 날씨네. 하!하!하!하!)
한껏 고무된 레슬러
그가 대소를 터트렸다.
(흠흠)
발타제가 땀을 삐죽 흘리며 헛기침했다.
(다들 주목! 긴말하지 않겠다. 우리가 누구냐!)
발타제가 소리치자
(그림자!!!)
2만의 병력이 동시에 대답했다.
(우리가 누구냐!)
(그림자!!!)
(우리가 누구냐!)
(그림자!!!)
(우리가 누구냐!)
(그림자!!!)
발타제가 손을 번쩍 들었다.
(돌격!)
돌격 명령이 떨어지자
(와아아아!!!)
그림자 병사들이 1악을 향해 달려들었다.
***
처음에는 그저 잔잔한 파도였다.
그렇게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1악의 막강한 힘 앞에 속절없이 쓸려나갈 뿐이었다.
이윽고 잔잔하던 파도가 조금씩 거칠어지더니
거센 파도가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1악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겁 없이 날뛰는 불나방을 보는듯한 표정이었다.
과연 그랜드 오브 그랜드였다.
곧이어 거센 파도가 해일이 되어 들이닥치자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
수십 수백 수천을 죽여도 소용없었다.
그림자 병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방팔방에서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다.
1악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두려움이 일렁거렸다.
두려움은 공포로 변했고 공포는 공황상태를 야기시켰다.
1악은 그렇게 가랑비에 옷 젖듯 점점 피로 물들어 갔다.
‘맙소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아니 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오늘에서야 뼈저리게 느꼈다.
특히 죽음을 도외시한 섬광 같은 공격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발타제의 검 룬의 도끼 레슬러의 오함마 프리실라의 단검 가츠의 창이 번쩍일 때마다 1악의 몸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주인 언제까지 지켜만 보고 있을 텐가.)
폭룡의 말에 피식 웃었다.
안 그래도 지금 참전하려던 참이었다.
(가자)
손에 쥐고 있던 폭룡을 다시 한번 말아 쥐었다.
순간 폭룡이 화답이라도 하듯
힘을 발현했다.
마력이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그와 함께 두려움이 사라졌다.
전신에서 검붉은 아우라가 번쩍였고
주체 못 할 힘에 용기가 치솟았다.
바닥을 박찬 후 몸을 띄웠다.
순식간에 1악을 향해 날아갔다.
체공 상태에 머문 순간 폭룡을 휘둘렀다.
시뻘건 적강기 다발이 1악에게 쏘아졌다.
━━━ 쾅! 쾅! 쾅! 쾅! 쾅…!
폭발의 충격에 1악이 뒤로 물러서자 놈에게 짓쳐 들었다.
━━━ 쾅!
거대한 낫으로 폭룡을 막았다.
“이노옴!”
1악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순간 이동.’
눈 깜짝할 사이에 1악의 뒤로 이동했다.
━━━ 쾅! 쾅! 쾅! 쾅! 쾅…!
폭풍처럼 공격을 퍼부었다.
허리에서 시작된 반동으로 검을 횡으로 그었다.
━━━ 콰앙!
꽤나 충격이 컸는지 1악이 주르륵~ 밀려났다.
‘아직이다.’
폭룡의 무게를 이용해 몸 전체를 회전시켰다.
━━━ 쾅! 쾅! 쾅! 쾅! 쾅…!
폭룡 휠!
말 그대로 폭풍처럼 짓쳐 들었다.
1악이 계속해서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이때
1악의 손 발이 더욱 다급해졌다.
양옆에서 발타제와 룬이 짓쳐 들었기 때문이었다.
━━━ 쾅! 쾅! 쾅! 쾅! 쾅…!
공격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커헉.”
어느새 피에 절어버린 1악
한 움큼의 핏물을 토해냈다.
그러고는 털썩~ 하고 무릎을 꿇었다.
대한민국 최강의 헌터이자 최강의 빌런이었던 1악
수십 년간 이어졌던 그의 악행도 오늘로써 끝이었다.
“……그 그림자… 크흑 그림자….”
무엇이 그리도 억울한지 눈물을 보였다.
“그 그림자… 내 그림자가….”
놈은 연신 그림자만 연발하고 있었다.
“그림자의 주인은 바로 나다.”
그 말을 끝으로 놈의 목을 단숨에 베었다.
★ 그림자 부활 : (0/10)
1악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림자 부활.’
1악의 그림자가 주욱~ 하고 늘어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림자 1악이 생성되었다.
- 오염된 영혼입니다.
‘젠장.’
1악의 영혼도 오염된 상태였다.
(나 난… 여 여긴… 아 안돼… 아 아드리안느… 사 살려줘…)
- 오염된 영혼이 곧 소멸됩니다.
(내 내가 잘못했어… 으 으악! 으아악! 안 돼! 아악!)
그림자로 부활하자마자 뜻 모를 소리만 지껄였다.
‘아드리안느?’
당최 무슨 소린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1악 마귀는 어딨나!)
(…… 사 살려줘…)
(마귀는 어딨냐고 물었다!)
(…… 크크크 마귀… 크하하하……)
1악이 광소를 터트렸다.
(이런 미친)
눈동자를 보니 이미 광기에 젖어 있었다.
(…… 그녀가 죽었다…)
(마귀는 어딨냐니까!)
(내 내가 신이 되고자 한 것은… 내가… 신이 되고자 한 것은… 으하하하! 내가 신이 되고자 한 것은…)
- 오염된 영혼이 소멸되었습니다.
알 수 없는 말만 남긴 채 순식간에 소멸되었다.
‘하.’
기가 막혀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주인이시여)
발타제가 다가왔다.
(수고했다 발타제.)
(감사합니다.)
(부상은 괜찮은가?)
그림자 자작들 모두가 피를 흘리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저희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까요.)
발타제 말에 깜짝 놀랐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다니
(피를 이렇게나 흘리는데도?)
(말 그대로입니다.)
꽤나 놀라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치료는 해야 했다.
아공간에서 엘릭서를 꺼내 주었다.
(주인님 저희는 엘릭서가 필요 없습니다.)
(발타제 고통은 못 느껴도 부상은 치료해야 해.)
(저희의 부상은 이면 세계 복귀 후 자동으로 치료가 됩니다. 그러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믿기 힘든 말이었지만
발타제의 말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만 병력을 철수하도록 하겠습니다.)
발타제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땅이 꺼지듯 그림자 병사들이 모두 사라졌다.
돌아간 것이다.
자신들의 세계로.
새삼스레 마음이 든든했다.
땅에 떨어진 1악의 무기부터 챙겼다.
얼핏 봐도 최상급 유물 같았다.
마력 전도율 40% 이상이면 횡재나 다름없었다.
(주인 놈의 손에서도 마력이 느껴진다.)
폭룡의 말에 1악의 손을 확인했다.
장신구라고는 팔찌 하나뿐이었다.
팔찌를 빼자
- 망령의 팔찌를 획득하셨습니다.
!!
시스템 음성이 들려왔다.
‘대체 무슨 유물이길래 시스템이 직접 알려주는 걸까.’
팔찌를 착용했다.
망령의 팔찌에 대한 내용이 드러났다.
◎ 망령의 팔찌 : 리퍼를 소환한다.(2)
난생처음 보는 특수 물품이었다.
이런 게 있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리퍼라.’
리퍼를 떠올렸다.
거의 그랜드에 육박할 정도로 강력한 놈이었다.
그런 놈을 두 마리나 소환할 수 있다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횡재였다.
‘우선 아이들부터 찾아야 해.’
이제 남은 건 마귀와 아이들뿐이었다.
‘변환.’
반경 1km 이내의 모든 그림자가 통제하에 들어왔다.
한쪽 무릎을 꿇고 한쪽 손바닥을 땅에 대었다.
‘아.’
이곳에서는 변환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림자 주인이 된 순간 이곳은 이미 내 통제하에 들어온 상태였다.
마귀와 아이들을 찾자
100여 곳의 장소가 한 번에 떠올랐다.
‘맙소사….’
상상도 못 할 만큼 참혹한 현장이 눈에 들어왔다.
공작성 한편에 마련된 연구실이었다.
그곳으로 순간이동했다.
‘아.’
치가 떨린다는 게 이런 느낌일까
그토록 찾던 아이들이 모두 죽어있었다.
잔혹한 생체 실험을 당한 듯 성한 구석이 한 곳도 없었다.
갓난아이부터 시작해 12세 이하 어린아이들까지
무참히 살해된 현장이었다.
지독한 피 냄새에 머리가 아플 정도.
적어도 보름은 지난듯했다.
울컥~ 하고 흘린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와 악문 입술을 적셨다.
머릿속에서 한 사람이 떠올랐다.
‘마귀.’
반드시 놈을 찾아야 했다.
눈을 감았다.
그런 후 공작성 전체를 뒤졌다.
***
허공이 쩌억~ 하고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누군가 걸어 나왔다.
그는 1악의 시체를 말없이 내려다봤다.
‘병신 같은 놈.’
1악은 정말 어리석었다.
최소한 그가 보기에는 그랬다.
눈앞에 걸 못 보고 주구장창 그림자만 찾았다.
그러다 결국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이다.
진작에 자신의 말대로 혈석을 먹었다면
이미 그랜드를 넘어섰을 것이다.
단 한 걸음을 남겨두고 이렇게 된 것이다.
‘뭐 덕분에 연구는 맘껏 했으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키키키.’
1악을 내려다보던 마귀가 낄낄거리며 웃어젖혔다.
그가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시커먼 아우라가 번쩍이더니
검은 구슬이 튀어나왔다.
1악의 몸속에 있던 구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