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너희들은 노예다. 따라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 감히 토 달거나 반항하는 놈은 가차 없이 파묻어 버릴 테니까 그리 알아라. 알겠냐, 이 쥐새끼들아!”
“팔이 잘렸나? 다리가 잘렸어? 어디서 엄살이야! 당장 나가! 나가서 사냥하란 말야!”
“너 이 새끼, 그 눈깔은 뭐야! 지금 반항하는 거야? 니네 집에 사람 보내줄까? 피바다로 한번 만들어줘?”
“다들 똑똑히 들어. 가족들 생각해라. 니들이 탈출하는 순간 그 즉시 니네 집에 사람들이 찾아갈 거다. 명심해라.”
“나는 노예다. 나는 노예다. 하루에 천 번씩 외친다. 실시!”
‘크윽.’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자, 불같은 분노가 솟구쳐 올랐다.
놈들의 수법도 이랬다.
뉴비 환영.
계열 상관없음.
일당 두 배.
당일 지급.
이제 갓 아카데미를 졸업한 뉴비들에게는 천금 같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놈들은 이런 미끼를 던진 후, 만만해 보이는 뉴비들만 잡아서 노예로 부렸다.
나도 여기에 속았다.
강원도 산척 오지로 끌려가, 미등록된 게이트에서 목숨 걸고 사냥했다.
마감청에 신고하거나 도망치다 잡히면, 살해하겠다고 협박을 했다.
심지어 가족들까지 인질로 삼았다.
아주 악질적이고 잔인한 놈들이었다.
그나마 나는 운이 좋았다.
잡혀 온 지 보름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놈들 중 누군가가 마감청 감찰부장의 자제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마감청 요원과 가디언들의 수사가 시작됐고, 그들이 강원도 오지로 내려와 우리들을 풀어주었다.
그 후, 나는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부모님과 여동생의 돈을 탈탈 털어야 했다.
가족들에게 죄송하고, 내 삶이 더욱 위축되는 순간이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곽동수 패거리들은 실제로 뉴비들을 살해한 자들이었다.
정확한 숫자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수가 최소 열 명은 넘을 거라고 짐작됐다.
어쩌면, 이 글이 곽동수 패거리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단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여자 목소리다.
- 광고 보고 전화 드렸습니다. 일하고 싶어서요.
- 네에.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 스물셋입니다.
- 스물셋이라…. 스물셋이면 나이가 좀 많아요. 뉴비분을 구하는 중이라서요.
- 저, 뉴비 맞는데요. 게이트 경험이 없거든요.
- 아, 그래요?
- 네…. 제가 3년이나 유급하는 바람에.
- 아~ 그러시구나. 그럼, 오후 1시까지 사무실로 좀 오시겠어요?
- 어디로 가면 되죠?
- 압구정역 2번 출구. 제니스 성형외과 건물 5층요. 거기서 다시 전화 주세요.
- 네,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뭔가 모르게 살짝 긴가민가했다.
일부러 좀 멍청하게 통화하긴 했지만, 그렇게 썩 달가워하는 목소리는 아닌듯했다.
‘몰라. 나중에 확인해 보면 알겠지.’
마음을 굳힌 난 바이크를 타고 일단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해 간단히 샤워부터 했다.
게이트 사냥이 끝나면 알게 모르게 피 냄새가 밴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씻어줘야 한다.
샤워를 끝내고 나와보니 벌써 오전 11시.
아침부터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 버렸다.
부엌, 찬장에서 라면 두 개를 꺼냈다.
냄비에 적당히 물을 붓고 끓였다.
냉장고에서 파와 양파 그리고 청양고추 2개를 꺼내, 깨끗이 씻은 후 먹기 좋게 썰었다.
물이 끓자 라면수프를 넣었다.
그러고 나서 고추와 양파를 넣고, 다시 물을 끓였다.
금방 다시 물이 팔팔 끓었다.
라면 사리 2개를 투척했다.
그런 후, 계란도 하나 톡~ 깨서 냄비 속으로 퐁당 빠뜨렸다.
매콤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했다.
맛있는 냄새다.
마지막으로 파와 고춧가루를 넣고, 젓가락으로 휘휘~ 저었다.
완벽한 라면이다.
식탁 위에 냄비를 올린 후, 냉장고에서 갓김치랑 파김치 그리고 김장 김치를 꺼냈다.
라면은 어떤 김치랑 먹느냐에 따라서 맛의 색깔이 달라진다.
“후우~”
뜨거운 라면을 식힌 후, 한입 호로록~ 먹었다.
“캬~ 혼내준다. 혼내줘.”
내가 끓였지만, 정말 맛이 끝내줬다.
라면을 먹고 라면 국물에 밥까지 말아 먹었다.
든든하니 잠이 솔솔 쏟아진다.
낮잠이라도 자고 싶지만, 그럴 여유는 없다.
어쩌면 오늘 피를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맨투맨 대신 후드티로 갈아입었다.
허리에 백호 슈트를 착용하고 밖으로 나갔다.
시간을 보니 오전 11시 48분.
출발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다.
그래서 바이크 대신 지하철을 타기로 했다.
지하철역은 점심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미어터졌다.
괜히 바이크를 두고 온 것 같아 살짝 후회됐다.
지하철은 여전히 번잡스러웠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30년 후 미래에도….
꾸벅꾸벅 조는 사람들.
크게 전화하는 사람들.
친구들이랑 떠들며 가는 사람들.
남에게 피해가 될까, 이리저리 눈치 보는 사람들.
불법으로 물건을 파는 사람들.
누가 봐도 불륜 커플로 보이는 사람들.
다정해 보이는 연인들.
모두가 지하철을 타고 목적지로 가고 있다.
이런 게 사람 사는 세상이고 이건 게 사람 냄새인데, 난 왜 재각성에만 목을 매며 살았을까.
조금만 고개를 돌렸어도 그렇게 빡빡하게 살진 않았을 텐데 말이다.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압구정역에 도착해 버렸다.
지하철에서 내려 2번 출구로 향했다.
2번 출구로 나오니 삐까뻔쩍한 건물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이 건물도, 저 건물도 온통 성형외과 천지다.
과연, 여성들이 건물주보다 높게 본다는, 의느님들의 터전다웠다.
제니스 성형외과가 들어선 건물로 들어갔다.
신축 건물답게 건물 내부가 광이 날 정도로 깨끗했다.
승강기를 타고 5층에 올라가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아까 통화했던 사람인데요. 1시까지 오라고 하셨던…. 지금, 5층에 도착했거든요.
- 아, 그래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건물 복도에서 잠시 기다리니, 20대 초반의 여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이쪽으로 오세요.”
여자가 손짓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이태민이라고 합니다.”
“이태민 씨….”
여자를 따라 들어간 곳은 꽤 고급스러워 보이는 사무실이었다.
“잠시만 앉아서 기다리시겠어요?”
“네에.”
여자의 그림자에 그림자 병사를 보낸 후, 여자가 가리킨 소파에 앉았다.
여자가 사장실로 들어갔다.
그림자를 발동시켰다.
사장실 모습이 심상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사장실에는 40대 초반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
40대 사내는 곽동수가 틀림없었다.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가물가물했지만, 놈의 우측 볼에 새겨진 검상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 큭, 생긴 대로 논다더니. 진짜 얼빵하게 생겼네. ]
[ 어머! 얼빵해요? 저는 귀엽기만 하던데요. ]
[ 귀엽기는 뭐가 귀여워? 딱 봐도 바보같이 생겼구만. ]
[ 남자가 저 정도면 잘생긴 건데. ]
여자가 입술을 핥았다.
‘요것 봐라.’
그들은 사무실에 설치된 CCTV로, 사장실에서 날 지켜보고 있었다.
[ 이게 또 발정 나서는. ]
[ 헤헤. 마음먹고 한번 꼬셔 볼까요? ]
[ 쓸데없는 소리 말고, 저놈 라이센스나 복사해놔. ]
[ 네? 저 사람으로 벌써 정하신 거예요? ]
[ 그래. 딱 봐도 착해빠졌잖아. 한 3일 정도 굴리다가 강원도로 보내지 뭐. ]
‘……씹어먹어 주마.’
곽동수가 확인된 이상, 더 이상 이곳에 머물 필요가 없어졌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승강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갈 때쯤, 전화가 걸려 왔다.
- 태민 씨, 지금 어디세요?
- 이거 어쩌죠. 급한 일이 생겨서요. 제가 당분간 일을 못 할 것 같아요.
- …뭐라구요?
- 죄송합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은 후, 근처 편의점에서 대기했다.
곽동수가 움직인 것은 저녁 7시가 넘어서였다.
놈이 움직이는 동선에 맞춰 따라 움직였다.
승강기가 지하 2층으로 내려가자, 순간 이동을 사용했다.
CCTV와 차량용 블랙박스가 없는 사각지대로 이동.
주차장에서 잠시 기다리니, 승강기가 도착했다.
승강기에서 곽동수가 걸어 나왔다.
놈이 지하 주차장 쪽으로 걸어올 때, 나는 승강기 쪽으로 마주 걸어갔다.
놈과의 거리가 지척에 달했을 때, 놈의 그림자에 그림자 병사를 흘려보냈다.
순간, 놈이 뭔가를 느꼈는지 등 뒤에서 마력을 쏘아 보냈다.
확실히 엘리트다운 날카로운 감각이었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 도발에 넘어갈 내가 아니었다.
나는 태연히 승강기를 타고, 1층으로 올라갔다.
***
“벌써 7시네. 김양아~”
“네~ 사장님.”
“들어갈 테니까, 너도 문 닫고 퇴근해라.”
“오늘 저희 집에 안 가시고요?”
김양이 입술을 핥으며 치마를 걷어 올렸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곽동수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미친개가 왔단 말이야.”
“힝~ 나 외로운데.”
“대신 내일은 꼭 홍콩 보내줄 테니까.”
“홍콩 보내주세요~ 홍콩~”
“하, 고년 참.”
곽동수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사무실을 나섰다.
승강기를 타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승강기 문이 열리자 차가 주차된 곳으로 걸어갔다.
맞은편에 후드를 눌러쓴 젊은 친구가 걸어오고 있었다.
눈에 익은 모습이지만, 별다른 관심 없이 그냥 스쳐 지나갔다.
그런데 그때, 뭔가 모를 섬찟한 기운에 소름이 돋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후드를 눌러쓴 젊은 친구에게 마력을 쏘아 보냈다.
‘내가 예민한 건가.’
젊은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게 승강기 쪽으로 계속 걸어갔다.
곽동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더 청년에게 마력을 쏘아 보냈다.
청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상당히 태연해 보였다.
‘큭, 내가 예민했나 보군.’
곽동수가 고개를 저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
곽동수가 차를 타고 간 곳은, 강남역 근처에 위치한 백합 빌딩 지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줄리라는 바를 운영하며, 숙소 겸 아지트로 사용하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형님.”
줄리에 들어서자 자신의 수족인 득구가 인사를 했다.
“미친개 어딨어?”
“지하 3층에 있습니다.”
“그 씹새. 대체 왜 왔다디?”
“잘은 모르겠습니다마는…. 아! 그것보다 형님.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무슨 문제?”
“미친개가 약을 빨더니, 갑자기 피가 보고 싶다고….”
“씨발! 그래서 누가 당했어?”
“주성이가 당했습니다.”
“이런 개새끼가 진짜! 죽여버릴 테다! 죽여버릴 테야!”
딥빡친 곽동수가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다.
“형님. 안 됩니다. 참으십시오.”
“놔, 이 새끼야!”
김주성은 조직의 막내로 뉴비들을 꼬실 때 쓸모가 많았던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을 미친개가 죽인 것이다.
“형님!”
김득구가 온몸으로 곽동수를 막았다.
지금 미친개를 건드린다면 뒷감당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블루문 소속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