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 흥신소-186화 (186/190)

제186화

뱀파이어 로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여섯 제물들 중 다섯이 죽었다. 이제 남은 제물은 하나뿐이다. 검은 머리에 황색 피부를 가진 제물. 이 제물을 데리고 온 이가 누군지 떠올려 본다.

“윌리엄.”

자신이 직접 뱀파이어 귀족으로 만든 아이.

인간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윌리엄 고든을 처음 보는 순간 뱀파이어 로드는 느낄 수 있었다. 이 아이야말로 진정한 뱀파이어로 거듭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때마침 뱀파이어 귀족 하나가 헌터들에게 목숨을 잃었다. 비어 있는 자리에 어떤 뱀파이어를 앉힐까 고민하던 차에 윌리엄 고든을 만나서 그 고민이 사라져 버렸다.

“한국이었지?”

한 번도 가본 적 없지만 잘 아는 국가였다. 작고, 인구도 많지 않지만. 굉장히 저력을 가진 국가라고 알고 있다.

“하필 이런 때에.”

누군가 이곳에 침입했다. 그렇기에 피의 축제를 즐기고 있는 뱀파이어들을 불렀다. 침입자는 굉장히 강했다. 뱀파이어 귀족들과 연결된 끈이 하나 둘 끊어지고 있었다. 뱀파이어 일족의 숙적이라 할 수 있는 구마 사제단도 이 정도로 강하진 않았다.

남은 뱀파이어 귀족들도 침입자를 상대하기 위해 보냈다. 직접 나서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마지막 남은 제물 때문이었다. 이 마지막 제물은 다른 제물들에 비해 오래 견뎌내고 있다. 그 말은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여왕이시여.”

뱀파이어 로드는 석관 안에 잠들어 있는 여왕을 지켜본다. 여전히 아무런 변화는 없다. 제물들의 피가 더해져 여왕은 완전히 피에 잠겨 있었다.

중요한 순간이다. 마지막 제물이 의식의 마지막 순간까지 견뎌낸다면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일족의 염원이 풀리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자리를 비울 수 없다. 변수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뱀파이어 로드의 사념이 석실을 넘어 뱀파이어들에게 전해진다.

“견뎌내라. 모조리 소멸해도 상관없다. 마지막 하나까지 침입자들을 죽여라.”

어느 순간 침입자의 수가 늘어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이 구마 사제단이라는 것도.

어쩌면 오늘 뱀파이어들이 모두 소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뱀파이어 로드는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여왕님을 위하여.”

* * *

구마 사제단이 합류하자 전투의 균형은 다시 팽팽하게 바뀌었다. 수습 사제들은 제각기 안전한 곳을 찾아 몸을 숨긴 후 기도문을 읊조리고 있다. 박주완을 선두로 구마 사제들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든다.

인호는 멀찍이 떨어져 있는 로사를 바라본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도 로사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의 표정이 사르륵 풀려 버린다.

“…… 위하여.”

너무 작은 소리라 제대로 듣지 못했다. 로사가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일족들을 차례로 바라본다. 로사와 눈이 마주친 뱀파이어들의 눈에서 비장함이 흐른다.

“여기서 모두 죽는 거야.”

뱀파이어들이 무서운 기운을 토해낸다. 로사의 몸이 흐릿해진다.

“여왕님을 위하여.”

“여왕님을 위하여.”

로사의 선창에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함성을 토해내며 인호와 구마 사제단을 향해 밀려든다.

인간과 뱀파이어, 선과 악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중화가 로사의 손톱을 쳐내고 뒤이어 다가오는 뱀파이의 몸을 둘로 나눈다. 사중화의 검신에 응집되어있는 죽음의 기운은 뱀파이어의 몸을 종이짝처럼 갈라버린다. 또다시 뱀파이어 하나의 머리가 잘려 허공으로 솟구친다.

로사가 인호에게 다가선다. 자신이 아니면 인호의 발을 묶어두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인호는 그런 로사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착실히 뱀파이어와 저그들의 수를 줄여나가고 있다.

박주완과 구마 사제단 역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다. 박주완은 쉼 없이 기도문을 외우며 십자가로 그릇된 존재들을 지워나가고 있다. 성수를 뿌려 뱀파이어들을 물러나게 한 후 위험에 처한 동료를 구한다.

뒤쪽에서 달려들던 저그의 머리를 부순 것이 박주완인 것을 알아챈 요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매번 도움을 받는군요.”

“주님이 도우신 겁니다.”

“그렇겠지요.”

요셉이 곧바로 자신의 검을 들고 뱀파이어들 사이로 파고든다. 요셉이 사용하는 직검 역시 루피치노 신부가 만든 것이다. 직검의 모양은 아래쪽을 길게 늘린 십자가의 형상이었다.

요셉의 전투력은 대단했다. 그와 박주완이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 시작하자 다른 구마 사제들에게 여유가 생겼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을 괴롭히던 뱀파이어 둘이 두 사람에게로 향하니 희미하게 웃는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거라.”

거대하다고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전투 망치가 뱀파이어 귀족의 머리를 노린다. 뱀파이어 귀족은 프란치스코의 망치를 피하며 인상을 찌푸린다. 혼자 프란치스코를 상대하기 버거운 것이다. 뱀파이어 둘과 합공할 때의 여유는 더 이상 없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수는 여전히 일족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압도적인 수에도 불구하고 일족은 연신 밀리고 있다.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신의 창녀야.”

* * *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진다.

인호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본래 인호는 근접 전투를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악령들을 상대할 때는 피치 못할 상황이 아니라면 근접전을 최대한 피했다.

사중화를 떨쳐 낼 때마다 뱀파이어와 저그들이 검은 재가 된다. 로사는 끈질기게 따라붙고 있다. 로사의 손톱이 등을 노린다. 인호는 지면을 박차며 가속한다.

어느 순간부터 감각이 확장된 기분이다. 자신의 주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다.

황동호에게 배운 도술 때문이리라. 죽음의 기운의 활용도가 극대화된 것이다. 인호는 로사를 뒤에 달고 뱀파이어와 저그들을 베어 넘기면서도 주변을 살필 여력이 있었다. 구마 사제들이 위험에 처하면 인호가 그들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뱀파이어들의 수가 줄어들며 전세가 역전되었다. 구마 사제들이 기도문을 외우며 뱀파이어와 저그들을 압박한다.

촤아악-

뱀파이어 하나의 머리가 둥실 떠오른다. 인호가 몸을 돌리며 사중화를 길게 내뻗는다. 인호를 따라오던 로사가 황급히 멈춰 선다. 그녀의 목 앞에 사중화의 검 끝이 놓여있다.

“뭘 노리고 있는 거지?”

뱀파이어들이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조금 전 ‘여왕님을 위하여’라고 외친 후부터였다.

“로드가 어떤 지시라도 내린 건가?”

로사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인호는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깨닫고는 다시 묻는다.

“여왕을 깨우기 위함인가?”

“함부로 그분을 입에 담지 말라.”

“어떤 방식이지? 제물들을 바치는 것인가? 어린아이의 피가 여왕의 잠을 깨우나?”

만약 그렇다면 주유선은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궁금하면 직접 가보도록 해. 물론 어디인지는 안 가르쳐 줄 거야.”

“네 음성에 조급함이 느껴져. 두려운 거야.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 것 같으니까. 그렇지?”

“헛소리.”

로사가 으르렁거린다. 인호는 이번에도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인호가 사중화를 크게 휘둘러 검신에 묻은 진득한 뱀파이어의 피를 떨쳐낸다.

인호가 손가락을 까딱인다.

“들어와.”

이를 까득 깨문 로사가 인호를 향해 달려들려 할 때였다. 로사가 얼음이라도 된 양 멈춰 섰다. 그러더니 그녀의 고개가 위로 들린다. 로사 뿐만 아니라 다른 뱀파이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인호 또한 그들의 시선을 쫓아 위쪽을 바라보았다.

둥근 달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공중에 둥둥 떠 있다. 냉막한 인상의 남자가 서서히 아래쪽으로 내려온다.

“신부님.”

인호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박주완을 부른다. 박주완이 인호를 힐끔 바라본다. 남자가 등장하는 순간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한곳에 모여 계세요.”

박주완 역시 등장한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기에 곧바로 구마 사제들을 한곳에 모은다. 남자가 지면에 내려서자 로사를 비롯한 살아남은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고개 숙인다.

“로드.”

로사가 고개를 숙인 채 말한다. 인호는 등장한 사내가 뱀파이어들의 로드인 것을 알게 되었다. 여왕이 잠에 빠져 있는 지금, 실질적으로 뱀파이어 일족을 이끌고 있는 존재.

“넌- 누구지?”

뱀파이어 로드가 인호에게 묻는다.

“너희 같은 것들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

“그렇군. 그러니 신의 창녀들과 함께 이곳에 왔겠지.”

“네가 로드군.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

뱀파이어 로드는 말 없이 인호를 바라만 볼 뿐이다.

“이곳에 주유선이라는 아이가 있나?”

“처음 듣는 이름이군.”

“아주 작은 아이야. 한국에서 온 아이지.”

뱀파이어 로드가 한 소녀의 얼굴을 떠올린다. 의식의 마지막 순간까지 버텨낸 기특한 제물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게 해 준 존재이기도 했다.

“하나 더, 윌리엄 고든을 알아?”

“물론이지. 내가 직접 불멸의 길로 인도한 아이니까.”

“그 녀석은 지금 어디 있지?”

“그걸 너에게 말해 줄 이유가 없는데.”

윌리엄 고든은 자신이 내린 아주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윌리엄 고든이 그 임무를 성공적으로 해낸다면 자신은 이곳에서 소멸되어도 조금도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 녀석에게 볼일이 있거든.”

“그렇군. 윌리엄이 말하던 것이 너였군. 윌리엄이 초대했다지?”

“이걸 초대라고 불러야 할지 몰라도 그 녀석 때문에 온 건 맞아. 그러니 어디 있는지 말해줄 수 없어? 혹시 알아? 내가 살려줄지.”

뱀파이어 로드가 환하게 웃는다.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며 자신에게 저런 말을 한 존재가 있었던가.

“미안하지만 그 제안은 거절하도록 하지.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뱀파이어 로드는 인호의 반응도 살피지 않고 말을 잇는다.

“우리들의 여왕께서는 아주 오래전에 긴 잠에 빠져 드셨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어. 우리 일족은 오랜 시간 동안 여왕님을 깨우기 위해 노력했지. 피의 축제도 여왕님을 깨우기 위함이야.”

“눈가림이겠지.”

“머리가 좋군. 정확해. 여왕님께서 깨어나시게 되면 많은 것이 바뀌게 될 거다. 그간 우리 일족을 어둠 속으로 내몰았던 인간들이 죗값을 치르게 될 거야.”

“별로 관심 없는데?”

“관심을 가져야 할걸.”

뱀파이어 로드가 빙긋 웃고는 로사를 비롯한 뱀파이어들을 응시한다.

“로드는 의식이 진행되는 중에 절대 자리를 비워서는 안 돼.”

인호가 무엇인가 깨달은 듯 묻는다.

“의식이 끝났나?”

“말했잖아. 로드는 의식이 진행되는 중에는 절대 자리를 비울 수 없어.”

인호가 떨리는 음성으로 묻는다.

“여왕이 깨어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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