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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 흥신소-184화 (184/190)
  • 제184화

    로사가 인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씨익 웃는다.

    “복수? 우리 일족에 대해 잘 모르나 보네? 헌터가 맞긴 한 거야? 내가 가브리엘과 조금 가까운 사이이긴 해. 하지만 그렇다고 복수 같은 인간적인 감정을 가질 리는 없지만.”

    “그래? 그거참, 아쉽군.”

    “나는 로사야. 로드께 직접 이끌림을 받았지.”

    “그런 게 너희들에게는 큰 명예인가?”

    인호의 물음에 로사가 당연하다는 듯 말한다.

    “일족 중 누구도 로드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해. 그 이유는 여왕께서 로드를 직접 불멸의 길로 인도하셨기 때문이지.”

    “귀족들은 피의 축제 기간에 나서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박주완과 아드리아나를 통해 피의 축제에 대해 자세히 들었다. 피의 축제 기간에는 뱀파이어 귀족들은 외부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로사는 딱 봐도 귀족이 분명했다.

    “궁금했거든.”

    “내가?”

    “가브리엘은 강해. 바티칸의 구마 사제단도 가브리엘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지. 축제가 시작되기 전 가브리엘이 인연이 있던 인간 헌터와 재미있는 놀이를 한다고 했어. 아담 말이야. 나 역시 아담을 잘 알고 있어. 헌터들 중 제법 괜찮은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가브리엘을 사로잡을 정도는 아니었지.”

    확실히 아담의 실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했는데도 불구하고 가브리엘의 강함은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만약 인호가 합류하지 않았다면 아담과 그의 팀원들은 가브리엘과 그의 클랜원들의 일용할 양식이 되었을 것이다.

    “조사를 해보니 거기 네가 있었더군.”

    “그래서? 나와 싸우기 위해 온 것인가?”

    로사가 고개를 흔든다.

    “그냥 얼굴이나 보려고 온 거야. 네 말대로 축제 기간에는 우리 귀족들이 수행해야 할 임무가 따로 있거든. 오늘의 만남은 여기까지만 하지. 머지않아 내가 찾아갈게.”

    인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그 미소는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싸늘한 얼굴이 된다. 인호가 로사를 시린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한다.

    “누가 보내준대?”

    * * *

    제물이 되는 여섯 소녀의 얼굴에는 거미줄과 같은 선들이 보인다. 붉게 물든 눈은 당장이라도 피를 뚝뚝 흘릴 것만 같다.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는 얼굴과 바들바들 떨리는 몸.

    로드는 석관을 수호하듯 곁에 서서 소녀들의 반응을 살핀다. 정면의 의자에는 새하얀 피부에 금발이 잘 어울리는 소녀가 앉아있었다.

    소녀가 울컥 피를 토한다. 로드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소녀에게로 다가간다. 로드는 소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준다.

    “네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마.”

    로드의 검지에서 손톱이 길게 돋아난다. 손톱이 소녀의 목을 파고든다. 베인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온다. 피는 아래로 흐르지 않고 안개가 되어 석관을 향해 천천히 흘러간다.

    곧 흐릿한 붉은 안개가 석관 주위를 맴돌았다.

    목이 베인 소녀의 피부가 쭈글쭈글하게 변한다. 윤기 넘치던 금발은 푸석해지고 얼굴은 미이라처럼 변해버렸다.

    로드는 소녀의 머리를 의자에 잘 기대어 주고는 석관으로 돌아와 여왕을 살폈다.

    소녀의 피로 만들어진 안개가 석관 안으로도 흘러들고 있었다. 여왕의 들숨과 날숨에 피안개가 섞인다.

    여왕을 살피던 로드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린다. 이번에는 피부가 검은 소녀다.

    맑았던 큰 눈동자는 이지를 상실한 채 멍하게 변해 있다. 붉게 변한 눈동자를 깜빡거리는 소녀는 너무나도 애처로워 보였다.

    소녀에게 다가간 로드는 조금 전 했던 것처럼 소녀의 목을 손톱으로 벤다. 피안개가 조금 더 짙어진다.

    또 한 명, 그리고 또 한 명. 살아 있는 소녀들의 수가 하나둘 줄어갔다.

    * * *

    로사가 사나운 기세를 뿜어낸다.

    “그 선택 후회하지 않겠어?”

    “내 인생은 후회의 연속이야. 한 번 더 후회한다고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그렇다면 이번이 마지막 후회가 되겠군.”

    로사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인호의 코앞에 나타난다. 무언가 붉은빛이 인호의 얼굴 앞을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시 본래의 자리에 돌아온 로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인호를 바라본다.

    그녀는 보았다. 인호의 눈은 단 한 번도 그녀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의 손톱이 인호의 얼굴 앞을 지날 때 인호의 눈은 그것을 쫓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라 아주 짧은 순간 드러난 그녀의 빈틈을 확인하기까지 했다.

    로사가 망설인다. 가브리엘이 당한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자신이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내가 오만했던 것 같군. 나 혼자로는 안 되겠어.”

    말이 끝날 때 즈음에는 로사는 보이지 않았다. 옅은 안개가 되어 흩어지는 로사를 보며 인호가 중얼거린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인호가 지면을 박차며 내달리기 시작한다. 근처 건물의 벽을 박차고 2층 건물 위로 훌쩍 올라선다. 로사의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을 가늠하던 인호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사의 기운은 정확히 뱀파이어들의 본거지라던 고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인호가 난간을 밟고 뛰어오르더니 옆 건물로 건너가 빠른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로사의 기운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안개화로 모습은 감출 수 있었지만, 속도는 어쩌지 못하는 것 같다. 차라리 조금 전 인호에게 빠르게 접근할 때의 속도가 몇 배는 더 빨랐다.

    마지막 건물의 난간을 박차고 뛰어오른다. 지면에 착지한 후 한 바퀴 몸을 굴린 후 다시 달린다. 고성과의 사이는 낮은 언덕이 있을 뿐이다. 인호가 고성에 도착했다. 철을 덧대어 만든 거대한 성문 앞에 선 인호가 천천히 몸을 돌린다.

    “내가 더 빨랐군.”

    밀려오는 안개. 그 속에서 로사의 음성이 들려온다.

    - 불나방이 따로 없군. 네 선택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조금 전에 마지막 후회로 만들어준다고 하지 않았나?”

    안개가 지면으로 스며들더니 로사의 기운이 성문 안쪽에서 느껴졌다.

    인호가 성벽의 높이를 가늠한다. 높이는 5미터 정도. 하지만 오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오래 전에 지어진 성답게 성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인호는 여기저기 패여 있는 곳에 의지해 성벽 위에 올라섰다.

    외성벽과 내성벽 사이의 공간은 50미터 정도였다. 그곳에서 많은 기운이 느껴진다. 하나같이 강렬한 기운들이었다. 인호가 내려서자 로사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거 알아? 이 성을 우리 일족이 차지한 후 살아 있는 인간은 제물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했어. 간혹 우리 일족을 없애 영웅이 되려던 머저리들이 오긴 했지만, 누구도 살아 돌아가지 못했지.”

    “역시 제물이었나?”

    광해원에서 주유선을 납치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인호가 박주완과 함께 이곳에 온 이유는 주유선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박주완은 위험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박주완과 함께 왔으면 좋았겠지만. 그도 결국은 바티칸의 규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구마 사제단 내에서 그의 위치가 확고하다 해도 결국 바티칸의 규율을 지켜야 한다. 그렇기에 박주완은 함께 할 수 없다.

    “시작하지.”

    결국 주유선을 구할 사람은 인호뿐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지?”

    로사가 궁금하다는 듯 묻는다.

    “내가 저지른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서.”

    사실 주유선이라는 아이를 잘 모른다. 광해원에 자주 왔기에 얼굴은 본 적 있으리라. 하지만 이름과 얼굴을 매치시킬 정도의 친분은 아니다.

    하지만 주유선이 납치된 이유는 인호가 윌리엄 고든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윌리엄 고든을 해치웠다면 주유선이 납치되는 일 따윈 없었을 것이다.

    스릉-

    사중화가 검집을 빠져나온다.

    “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검이군. 매우 익숙한 기운이야.”

    사중화에서 죽음의 기운을 느낀 것 같다. 로사가 중얼거릴 때 주변의 어둠 속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 이들이 있다.

    로사보다는 못하지만 매우 강렬한 기운을 흘리고 있다. 숫자는 일곱. 모두가 뱀파이어 귀족들이다. 인호는 등장한 뱀파이어 귀족들을 차례로 살핀다.

    “영국의 윌리엄 고든은 없나?”

    “윌리엄을 알아? 아-! 네가 그 인간이구나. 윌리엄이 초대했다던.”

    로사가 고개를 돌려 내성을 슬쩍 보며 말한다.

    “윌리엄은 로드께서 지시한 일을 수행 중이지.”

    “아쉽네. 나를 보면 많이 반가워했을 텐데.”

    “그럴지도 모르지.”

    인호가 사중화를 천천히 들어 올려 로사를 가리킨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할 것 같군.”

    인호의 선언과 함께 뱀파이어 귀족들이 일제히 달려든다. 붉은 기운이 휘몰아친다. 인호는 죽음의 기운을 갑옷처럼 몸에 두른다. 황동호에게 배운 술법으로 도사들이 사용하는 강체술법을 변형시킨 것이다.

    츠릿-

    사중화가 허공을 횡으로 길게 벤다. 앞쪽에서 느껴지던 몇몇 기운들이 황급히 흩어진다. 몸을 돌리며 왼손으로 크게 휘두른다. 손등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이 든다. 멀리 떨어져 있던 로사의 얼굴이 갑자기 확 커진다.

    목을 노리고 날아드는 붉은 손톱. 사중화로 손톱을 튕겨내고는 로사의 품속으로 파고든다. 그녀의 심장에 검을 꽂아 넣으려 했지만, 양옆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살기 때문에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몸을 굴려 일어서려 할 때 하체에 서늘함이 느껴진다. 인호가 이를 꽉 깨문다. 종아리에 아찔한 통증이 느껴진 것이다. 뱀파이어 귀족 하나가 강체술법을 뚫고 손톱으로 종아리를 벤 것이다.

    “사냥이 시작됐군.”

    로사가 비아냥거린다.

    “사냥의 기본은 사냥감의 기동력을 뺏는 거지.”

    다리에 상처를 입혔기에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리라.

    “간지러운데?”

    인호가 검을 떨쳐내 다가서는 뱀파이어 귀족들을 물러서게 만든다. 간지러울 정도의 상처는 아니지만 움직임에 제약을 줄 정도의 깊은 상처도 아니었다.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뱀파이어 귀족들.

    인호는 태연하게 그들의 눈빛을 받아넘기고 먼저 움직였다. 가장 가까운 뱀파이어 귀족과의 거리를 좁힌 후 사중화를 휘두른다.

    뱀파이어 귀족은 회피보다는 방어를 택했다. 자신이 검을 방어하는 사이 동료들이 사냥감의 몸에 상처를 만들 것이다.

    붉은 기운을 품은 손톱과 만나기 직전 사중화의 검신을 두리고 있던 죽음의 기운이 더욱 짙어진다. 뱀파이어 귀족의 손톱이 허무하게 잘려 나간다. 사중화는 손톱만 자른 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듯 뱀파이어 귀족의 팔과 함께 가슴까지 베어버렸다.

    “크윽-.”

    짧은 신음과 함께 뱀파이어 귀족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다. 잘린 팔 하나가 바닥에서 퍼덕였고 뱀파이어 귀족은 쩍 벌어진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워했다.

    한순간에 죽음의 기운을 ‘응집’시켜 사중화의 절삭력을 극대화한 것이다.

    인호는 로사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린다.

    “남은 것은- 일곱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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