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 흥신소-183화 (183/190)

제183화

지하의 넓은 석실.

검은 정장과 검은 드레스.

피의 출제에 임하는 뱀파이어들의 드레스 코드는 모두 똑같았다.

규칙 없이 자리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들이 서 있는 위치는 석실 중앙의 거대한 석관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석관에는 한 소녀가 누워있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칼을 가진 소녀였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섞어 놓은 듯 완벽 그 자체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보는 이를 매혹할 정도인데 과연 이 소녀가 눈을 뜬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석관에서 가장 가까운 곳.

- 나와 함께 불멸의 길을 걷지 않을래?

그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전의 일이었다.

지금은 석관에 누워 깨지 않는 잠에 빠져 있는 소녀가 내미는 손을 잡았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끝이 없는 불멸의 길을 걸었다.

과거에는 이름이 있었지만, 지금은 ‘로드’라고 불리는 존재는 석관에 누워있는 자신의 여왕을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함께 걷자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당연히 대답은 없다.

“너무 외롭습니다.”

뱀파이어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로드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인간이 흘리는 뜨겁고 투명한 눈물이 아닌 차갑게 식어버린 붉은 피눈물이었다.

로드는 감정을 추스른 후 나지막하게 한 마디를 내뱉는다.

“축제를 시작하라.”

로드의 말이 끝나는 순간 석실에 있던 귀족들이 사념을 일으켰다. 그들의 사념은 그들이 이끄는 클랜원들에게 전해졌다. 이곳에 모인 뱀파이어들, 그리고 저그들이 차갑게 식은 심장을, 피를 데우기 위해 축제를 벌일 것이다.

이번에는 로드가 은밀하고도 강력한 사념을 방출했다.

- 의식을 시작하라.

그들이 성지로 삼고 있는 도시에서 광란의 피의 축제를 벌이는 이유는 어떤 ‘의식’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석실의 가장자리에 서 있던 뱀파이어 귀족들이 소리 없이 움직인다. 그들의 목적지는 벽에 속박해 놓은 인간들이었다.

단 한 번도 성관계를 갖지 않은 순결한 처녀들이 속박되어 있다. 그녀들에게 다가간 뱀파이어 귀족들은 약속이나 한 듯 날카롭게 돋아난 손톱으로 여자들의 목을 긋는다.

푸학-

일제히 솟구치는 피분수.

피를 보면 이성을 잃는 뱀파이어답지 않게 여자들의 목을 벤 뱀파이어 귀족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외려 경건한 눈빛으로 꾸역꾸역 흘러내리는 피를 응시하고 있다.

처녀들의 피가 석실 바닥을 적신다. 피는 바닥에 파 놓은 홈을 따라 흐른다. 홈은 일정한 형식에 의해 파여있다. 가장 외각에 거대한 원, 그리고 그 안에 조금 작은 원. 원과 원 사이에는 기이한 문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피로 채워진 홈이 은은한 붉은 빛을 흘려낸다. 홈을 가득 채운 피가 석실의 중앙으로 흘러간다. 여섯 방향에서 흘러든 피가 석관으로 모인다. 석관에도 파인 홈을 따라 피가 자연의 법칙을 무시한 채 위로 타고 오른다. 거대한 돌을 깎아 만든 석관이 붉게 물든다.

석관이 금방 피로 채워진다. 누워있는 여왕이 피에 잠긴다. 그러는 동안 로드는 여왕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창백했던 안색이 조금은 화사해졌다고 느낀 것은 로드만의 착각일까.

- 제물을 준비하라.

여섯 방향의 문이 열리며 저그들이 커다란 의자를 안고 들어온다.

여섯 개의 의자, 그리고 여섯 명의 소녀들.

피부가 하얀 소녀도 있고 검은 소녀도 있다. 로드의 등 뒤쪽에서 열린 문에서 들어 온 의자에 앉아 의식을 잃고 있는 소녀는 검은 머리에 황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저그가 들고 온 의자는 석관을 중심으로 여섯 방향에 자리 잡는다. 의자 아래에는 작은 원이 있다. 피로 그려진 원 안에는 괴이한 문양이 가득하다.

“용서하소서.”

로드가 피에 잠겨있는 여왕의 팔을 들어 올린다. 손목으로 천천히 입을 가져간다. 망설임 없이 날카롭게 돋아난 송곳니를 여왕의 손목에 박아넣는다.

뱀파이어 귀족들이 긴장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본다.

여왕의 몸에 상처를 내는 것은 감히 용서받지 못할 불경이다. 하지만 누구도 로드에게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로드의 행위는 잠에 빠진 여왕을 깨우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인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드가 손짓하자 뱀파이어 귀족 한 명이 다가온다. 그의 손에는 황금 쟁반이 들려 있다. 그 위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작은 잔 여섯 개가 놓여있다.

로드는 잔에 여왕의 손목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조금씩 담는다. 여섯 개의 잔이 채워지자 뱀파이어 귀족이 뒤로 물러선다. 여섯 뱀파이어 귀족이 다가와 잔 하나씩을 들고 의자로 다가간다.

정신을 잃은 소녀들의 입을 벌리고 여왕의 피를 흘려보낸다. 한 방울도 밖으로 흘러내리지 않게 조심스럽기만 하다. 피를 모두 먹인 뱀파이어 귀족들이 뒤로 물러선다. 의자를 들고 온 저그들은 재빨리 석실을 빠져나간다.

“로사.”

“여기 있습니다. 로드.”

“여섯 밤, 여섯 낮이 반복될 때까지 누구도 이곳에 들어와서는 안 된다.”

“그 누구도 이곳에 발을 들이지 못할 겁니다.”

“믿겠다.”

로드의 말이 끝나자 뱀파이어 귀족들이 열려 있는 여섯 문으로 사라진다. 돌로 만들어진 문이 닫히며 석실은 바깥쪽과 격리되었다.

로드는 석관 안의 여왕을 잠시 본 후 시선을 옮긴다. 의자에 묶인 소녀들에게서 이상 반응이 나타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아아악-.”

“꺄아악-!”

소녀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일제히 깨어난 소녀들. 소녀들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다. 고통스러운지 비명을 내지르며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 보려 한다. 하지만 소녀들의 목과 손, 다리는 의자에 단단히 결박되어 있다.

로드가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시린 음성으로 말한다.

“너희들은 선택받았다. 영광 속에서 죽어가거라.”

* * *

“축제가 시작되었다.”

박주완의 말에 인호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박주완의 말 때문인지 몰라도 평화롭게만 보이던 도시에 곳곳에서 기이한 열기와 광기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혼자 움직일 거야?”

“아무래도 그게 편하지 않겠습니까?”

박주완은 구마 사제단과 함께 행동해야 했다. 구마 사제단은 피의 축제 기간을 대비한 행동 지침이 미리 세워져 있다.

박주완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입고 있던 평상복을 벗고 사제복을 입는다.

무릎을 꿇고 작은 십자가를 손에 쥔 채 기도한다. 악에게서 자신을 지켜달라고, 악을 지울 수 있게 힘을 달라고. 기도를 마친 박주완이 거대한 십자기를 챙긴다. 커다란 십자가가 사제복 안에 감쪽같이 감춰진다.

“위험하다 싶으면 도망쳐라.”

“그러겠습니다. 신부님도 몸조심하십시오.”

박주완이 피식 웃고는 인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주님이 함께 하시길’이라고 중얼거린 후 밖으로 나간다. 홀로 남게 된 인호가 사중화를 챙긴다. 곧 벌어질 일을 예견이라도 한 것인지 사중화에게서 작은 떨림이 전해진다.

“피에 대한 갈구가 너무 크다.”

루피치노 신부가 제작 과정에서 성수에 오랫동안 담가 놓지 않았다면 피만 쫓는 검이 되었을 것이다. 인호가 창밖을 한 번 바라본 후 밖으로 나간다.

거리는 변함없이 평화로웠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의 눈에 어떠한 긴장감, 공포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 도시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곳에 살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느릿하던 걸음이 조금씩 빨라진다. 거리를 누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기운을 감지하면 곧바로 달려 나갔다.

관광객의 가방을 빼앗으려던 양아치들이 인호의 주먹에 쓰러지기도 하고, 도망치던 소매치기가 분수에 처박히기도 했다.

인호는 점점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도시의 외곽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 * *

한 남자의 목에 이빨을 꽂아 넣으려던 뱀파이어가 뒤에서 느껴지는 불쾌함에 몸을 돌린다.

“구마 사제단.”

여성체 뱀파이어가 눈을 가늘게 뜬다. 사제복을 입은 두 명의 구마 사제가 골목 안으로 들어서고 있다.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추악한 존재여.”

“흥. 신의 발이나 핥는 창녀들이로군.”

구마 사제 박주완이 자신의 사제복을 들춘다. 거대한 백은 십자가가 그의 손에 들린다. 십자가를 본 뱀파이어가 싸늘하게 웃는다.

“너로구나. 많은 형제들을 죽인 원수. 신의 창부. 바티칸의 개. 스테파노.”

뱀파이어의 눈이 붉게 변하고 송곳니가 돋아난다. 빨간 손톱을 길게 늘어트린 채 혀로 입술을 핥는다. 그 모습을 본 박주완과 함께 온 수습 구마 사제가 가볍게 몸을 떤다.

“사악한 존재여. 그분의 이름 앞에 무릎 꿇어라.”

박주완이 성호를 그으며 앞으로 나선다.

“주님. 나와 함께 하소서. 함성으로 성을 무너트린 것처럼 적을 무너트릴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십자가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온다. 인호가 신성력이라 부르는 홀리 라이트였다. 수습 구마 사제가 홀린 듯 황홀한 눈으로 그 빛을 응시한다.

뱀파이어는 자신을 향해 다가서는 박주완을 보며 진한 미소를 머금는다.

“아이들아. 식사 시간이다.”

주변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존재들. 뱀파이어들과 저그들이 포위망을 좁혀 온다. 매년 반복되는 일이기에 박주완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피의 축제 기간에 빈번히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살아 있는 인간들의 피로 축제를 벌이려는 뱀파이어들, 그리고 그들을 막기 위한 이들 간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알렉시오.”

“네, 여기 있습니다.”

박주완의 부름에 수습 구마 사제가 화들짝 놀란다.

“네가 가진 성수는 사악한 존재를 위한 것이 아니다.”

“네?”

“널 지켜가며 싸울 자신이 없구나. 성수로 스스로를 지켜라.”

알렉시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변을 살핀다.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기 전 선배 구마 사제들에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수습 구마 사제는 절대 선배 구마 사제의 발목을 잡으면 안 된다고.

알렉시오가 건물과 건물 사이의 좁은 틈으로 몸을 집어넣는다. 이곳이라면 정면과 위만 대비하면 될 것이다. 알렉시오가 자신의 안전을 챙기는 것을 확인한 박주완이 씨익 웃는다.

“대천사 미카엘이시여.”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었다.

* * *

인호가 앞이 막힌 공간에 도착해 걸음을 멈춘다. 과거 군사 도시 목적으로 만들어진 도시답게 제법 높은 돌담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이제 그만 나와도 되지 않을까? 오래 걸으니 발이 아파서 말이야.”

언젠가부터 자신의 뒤를 쫓는 존재가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으로 온 것이다.

자욱한 안개가 피어오르고 그 안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존재는 검은 머리칼을 가진 뱀파이어였다.

굉장히 강력한 기운이 느껴진다. 하루 전 상대했던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가진 뱀파이어와 비슷, 아니 오히려 강한 기운이었다.

“뱀파이어 귀족이 직접 찾아와 주고. 영광이라고 해야 할까?”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나?”

“만난 지 하루 만에 잊어버릴 정도로 매정하진 않지.”

“그곳에 남아있던 기운이 네 기운과 비슷해서 따라와 봤더니 역시 그랬군.”

“원하는 게 있는 거 같은데. 혹시…….”

인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씨익 웃는다.

“복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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