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눈에 띄게 당황하는 사장을 보며 인호가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왜요? 따님이 벌써 식사를 마쳤나요?”
“제가 분명 딸은 병원에 있다고 말을 했는데요.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영문을 모르겠네요.”
“그런가요? 제가 듣기로 사장님께서 산장으로 오실 때 따님과 함께 오셨다던데요.”
“누가 그런 말을 합니까?”
인호가 사장을 똑바로 바라본다.
“만신께서 하셨습니다.”
“마, 만신이요?”
“네. 산장으로 들어오시기 전에 뵌 적 있으시죠? 만신께서는 사장님을 정확히 기억하시던데요.”
사장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곧 한숨을 내쉰다.
“딸이 이곳에 있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딸은 저 말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않습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따님에게 제 말을 전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인호는 사장이 대답도 하기 전에 먼저 말한다.
“절 만나지 않으면 만신께서 오신다고 전해 주십시오.”
“그분이 왜 여길 옵니까? 그리고 우리 딸을 만나려는 이유가 뭡니까?”
사장의 분위기가 변한다. 딸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사장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인호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 말만 전해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따님은 분명히 절 만나려고 할 테니까요.”
말을 한 후 인호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간다. 인호를 따라 나온 이민정이 묻는다.
“왜 그렇게 공격적으로 말을 하세요?”
“내가 공격적이었어?”
이민정이 고개를 끄덕인다.
“만신이 오신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만신이 모시는 신은 아주 강력한 존재야. 사장의 딸은 높은 확률로 신내림을 받았어. 딸이 섬기는 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지만 만신이 모시는 신에 비하면 한참 부족할 거야.”
“만신을 두려워 한다는 뜻인가요?”
“아마도? 만신에게 눌림굿을 받았으니 잘 알고 있을 거야. 만신을 만나기 싫어서라도 날 만나야 할걸.”
* * *
똑- 똑-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방에서 이민정과 대화를 나눌 때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린다. 문 앞에 한 여자가 서 있다. 열다섯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였는데 전체적으로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인호가 커튼을 잠시 바라본다. 조금 전까지 느껴지던 망령의 기운이 사라졌다.
망령이 저 여자아이, 사장의 딸을 두려워하는 것이 분명해졌다.
“안녕하세요. 나는 정인호라고 해요.”
여자아이는 대답을 하지 않고 방 안을 둘러본다. 그러다 침대에 앉아 있는 이민정을 보고는 고개를 비스듬히 눕힌다. 순간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문 닫고 안으로 들어와요.”
여자아이가 안으로 들어온다.
“이름이 강소정 맞지요?”
“맞아요. 아저씨가 나를 보자고 했나요?”
“그래요. 내가 보자고 했어요.”
“만신과는 잘 아는 사이에요?”
“만신께서는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잘 아는 사이라고 생각해요. 만신과 통화하면서 소정 씨 이야기를 했어요. 만신께서도 꼭 보고 싶어 하던데요.”
강소정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가 피어오른다. 웃는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화를 내는 것 같기도 하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실례인지 알면서도 보자고 한 거예요.”
“제게 묻고 싶은 게 뭐죠?”
인호가 고개를 흔든다.
“소정 씨에게 묻고 싶은 게 아니에요.”
강소정이 의아한 듯 인호를 바라본다.
“소정 씨가 모신 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강소정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인호를 바라본다.
“그게 무슨 뜻이죠?”
“소정 씨 신내림 받았잖아요.”
인호가 단정적으로 말을 하는 이유는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 눌림굿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신의 말에 따르면 신병에 걸린 이가 지속적으로 눌림굿을 받지 않으면 고통에 결국 목숨을 잃는다고 했다.
강소정이 이렇게 멀쩡한 모습으로 앞에 서 있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눌림굿을 받았거나 신내림을 받았어야 한다.
“어린아이의 뒤에 숨어 있기만 할 겁니까?”
인호의 말에 강소정이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한다. 강소정의 눈에서 눈동자가 사라진다. 온통 하얗게 변한 눈으로 인호를 바라보는 강소정의 입가에 잔뜩 뒤틀린 미소가 걸린다.
“숨는다? 재미있는 말을 하는구나.”
강소정의 음성과는 전혀 다른 음성이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기이한 음성이다.
“평범한 인간은 아니구나.”
“그쪽도 평범한 신은 아닌 듯 한데?”
인호가 커튼 쪽을 힐끔 바라본다.
“어째서 어린아이의 몸을 빌려 끔찍한 일을 저지른 겁니까?”
“제법이구나.”
강소정. 아니, 그녀의 몸을 차지한 신이 비릿하게 웃는다. 인호의 말이 사실임을 인정한 것이다.
“왜 그런 겁니까?”
“그러지 않으면 이 아이가 죽게 되니까.”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 그게 말이 됩니까? 그릇된 신의 뒤틀린 욕망 때문은 아니고요?”
“감히 인간이 신을 평가하려 하는가? 네가 가진 인간의 잣대가 과연 나를 측량할 수 있을 것 같더냐?”
인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세상의 모든 것은 동전의 두 면과 같으니 빛이 있으니 어둠이 있고, 선이 있으니 악이 있는 겁니다. 선한 신이 있으면 악한 신도 있겠지요.”
“내가 악한 신이다?”
“그렇지 않다면 선량한 다른 이의 목숨을 빼앗아 몸주의 명을 이어주려 하진 않았겠지요.”
강소정의 몸을 차지한 신이 화사하게 웃는다.
“저기 있는 아이가 네게 소중한 아이냐?”
“그렇습니다.”
“너는 저 아이를 위해서라면 다른 이와 싸울 수도 있겠지?”
인호가 대답을 하지 않자 강소정의 몸을 차지한 신이 말한다.
“나 또한 그러하다. 이 아이를 위함이다. 어미가 자식을 위해 하지 못할 일이 없음과 같은 이치이다.”
“존중받을 가치도 없는 쓰레기였군.”
인호가 무서운 눈빛으로 쏘아본다.
“그 아이를 위하는 척 위선 떨지 마라.”
인호에게서 강렬한 기운이 피어오른다.
“인간의 힘이 아니구나. 흐음-, 어디 보자. 명계의 힘이로구나. 거기에 도사 나부랭이들의 기운도 섞인 것 같고. 자-, 어디 한번 하고 싶은 것을 다 해 보거라.”
강소정의 몸을 차지한 신이 공격해보라는 듯이 두 팔을 축 늘어트린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네 힘이 이 아이를 어떻게 만드는지 지켜보기만 할 것이다.”
인호가 가볍게 혀를 찬다.
“쯧. 참 한결같아. 어떻게 너희 같은 존재들은 조금도 예상에서 빗나가지 않아.”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인호를 바라보는 신.
“입으로는 신입네 말을 하며 결국 아직 꽃도 피우지 못한 아이를 인질로 잡고 있잖아.”
“나로 인해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아이다. 이 정도는 감당해야 하느니라.”
“말은 바로 해야지. 너로 인해 목숨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네가 죽인 존재들의 기운 때문이지.”
인호의 말에 신이 즉각 반응을 보인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몰라서 물어? 네가 더 잘 알잖아. 고작해야 귀에 대고 유혹하듯 속삭이기만 하는 네가 과연 신이라 불릴 정도의 존재일까?”
강소정이 방에 들어서는 순간 인호는 의아함을 느꼈다. 분명 그녀에게서 신의 기운이 느껴졌다.
신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무속인들이 섬기는 신은 강력한 힘을 지닌 영적 존재다. 무속인들을 그 존재들을 신이라 칭한다.
그런 기준으로 보면 강소정에게 들러붙은 존재는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맞다. 다만 다른 무속인들이 섬기는 신들과는 달리 그 기운이 강하지 않았다.
‘도대체 저 정도로 미약한 기운을 지닌 존재가 어떻게 강소정의 신병을 치유할 수 있었을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은 커튼 뒤에 숨어 바들바들 떨고 있는 망령을 보는 순간 해소되었다.
망령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강소정의 몸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넌 신이 아니라 잡귀일 뿐이야.”
설화선녀 한선미.
악령들과 붙어먹어 선량한 사람들에게 사기 치던 무속인. 만신에게 내침을 받았던 한선미가 강소정과 비슷한 경우리라.
“네 뒤틀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린아이를 이용할 뿐인 거지. 그 아이의 병을 치료해 줄 힘도 없으면서 말이야.”
“헛소리 그만하고 어서 힘을 사용해 보거라. 네 힘에 이 아이의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을 보고 싶구나.”
사악하게 웃는 신을 보며 인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개선의 여지가 없구나. 넌 내가 힘을 사용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 악귀일 뿐이야. 그래서 한 분을 모셨지.”
“누굴? 감히 누가 신의 상대가 되겠는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신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라고. 그분이 오시면 꽤 기분 나빠하실 테니까.”
“설마 만신이 오는 것이냐?”
“빙고.”
인호는 사장에게 강소정을 만나고 싶다는 말을 하기 전에 이미 만신 이혜옥에게 이곳에 와 줄 것을 부탁했다. 아무래도 무속인들이 섬기는 신을 상대하는 데에 있어서는 자신보다 이혜옥이 더 나았다.
이혜옥은 흔쾌히 승낙했고 이미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하찮은 수를 쓰는구나.”
신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한다.
“그러지 않는 것을 추천하는데.”
“꺄아아악-!”
문고리를 잡은 신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토해내며 뒤로 물러선다.
“그것 봐. 그게 네가 신이 아니라는 증거야. 한낱 인간이 펼친 결계도 벗어나지 못하잖아.”
“이럴수록 이 아이가 힘들어 할 것을 모르느냐?”
“아쉽겠지만 내 결계는 인간의 육체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아.”
저승의 기운으로 펼친 결계는 영적인 존재들에게만 영향을 미친다.
턱- 턱- 턱-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발걸음 소리다. 그 발자국 소리가 강소정의 몸을 차지한 신의 귀에는 천둥소리처럼 들린다.
“인호야. 들어가도 되는 게냐?”
“당연하죠.”
문이 열리며 옥빛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혜옥의 모습이 보인다. 한 손에 양산을 들고 있는 모습만 보면 부잣집 할머니가 나들이를 나온 것 같다.
“우리 오랜만이지?”
이혜옥이 강소정을 보며 빙긋 웃는다.
신이 두려운 듯 부들부들 떨며 이혜옥과 눈도 마주치지 못한다. 그런 신을 바라보는 이혜옥이 한숨을 내쉰다.
“어찌 사셨기에 기운을 모두 잃고 허울만 남으신 겁니까?”
“나, 나는…….”
“몸주에게 하지 말아야 일을 강요하신 게로군요.”
인호가 궁금하다는 듯 바라보자 이혜옥이 설명을 잇는다.
“신내림을 받아 신을 모시는 것. 어찌 보면 계약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신께서는 우리들의 신병을 치유해 주시고 힘을 주시지. 우리들은 그런 신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야. 그렇기에 신과 몸주는 서로에게 지켜야 할 것들이 있어. 그것을 어기는 순간 관계는 끊어지는 것이야. 그런 일이 생기면 몸주는 백이면 백 모두 목숨을 잃지. 하지만 신은-.”
이혜옥이 신을 바라보며 말한다.
“저렇게 이름뿐인 신으로 남게 되는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