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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 흥신소-167화 (167/190)
  • 제167화

    “이의 있습니다.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증거입니다.”

    상대 변호사가 반발했지만 최준환 판사는 손을 한 번 드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최준환 판사가 손짓하자 이길석이 다가가 통장을 건넨다.

    최준환 판사가 통장 하나를 집어 펼친다.

    “흐음-.”

    통장을 살피는 최준환 판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페이지를 넘기며 딱딱했던 표정이 점점 풀어진다. 피식 웃기도 하고 먹먹한지 고개를 돌리고 싶은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전영석 씨.”

    “네.”

    최준환 판사의 부름에 전영석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한다. 옆에 앉은 이길석이 ‘괜찮아요. 당당하게 대답하세요’라고 속삭인다.

    “전영석 씨 직업이 뭡니까?”

    “…… 제가 하는 일은-.”

    전영석이 말끝을 흐린다. 맞은 편에 앉아 있는 형들이 그런 전영석을 한심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비릿하게 웃는다.

    “직업에 귀천은 없습니다. 어떤 직업이 귀하고 어떤 직업이 천합니까? 여기 있는 재판관도 부모 잘 만나서 어려운 것 모르고 공부만 해서 법복 입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말고 대답해 보세요.”

    “노, 노가다 일 하고 있습니다.”

    “건설역군이셨군요. 전영석 씨가 흘린 땀방울이 튼튼한 교각이 되고 우리들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 아니겠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달에 어느 정도 수입을 올리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전영석은 최준환 판사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영문을 몰랐지만 바로 대답했다.

    “굳은 날이 많거나 제 몸이 아프면 일할 수 있는 날이 줄어 2백만 원도 채 벌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월 3백 정도 벌 수 있죠.”

    “아-, 그렇군요.”

    최준환이 서기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한다. 서기가 다가오자 통장을 보여주며 손가락으로 무언갈 짚어가며 설명해준다. 서기는 고개를 끄덕인 후 통장을 들고 정면을 바라보며 선다.

    “제가 서기에게 부탁했습니다. 혼자 알고 있기에는 너무 감동적인 이야기라서요. 서기, 부탁합니다.”

    “네, 판사님.”

    서기가 통장을 펼친 채 입을 뗀다.

    “20XX년 XX월 XX일. 150만 원 입금. 이체 메시지는-. 누님. 요즘 날이 많이 추워요. 두꺼운 옷 사 입으세요. 20XX년 XX월 XX일. 100만 원 입금. 누님. 이번 달은 눈이 많이 내려 일을 많이 못했어요. 죄송해요. 20XX년 XX월 XX일. 170만 원 입금. 누님. 몸은 좀 어떠세요. 평소보다 조금 더 넣었어요. 약이라도 한 재 해 드세요.”

    서기가 통장에 기록된 메시지를 읽는다. 서기의 말이 계속되자 전영석이 고개를 푹 숙인다. 이길석이 그런 전영석을 안타깝다는 듯 바라본다.

    “누님. 기운 차리셔야죠. 부모님 산소에 같이 가기로 했잖아요.”

    “거기까지만 합시다.”

    최준환 판사의 말에 서기가 통장을 돌려준 후 자신의 자리에 가 앉는다.

    “이 메시지가 어떤 메시지인지 알겠어요?”

    최준환 판사의 시선이 전영우와 전영호에게 향해있다. 두 사람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최준환 판사의 시선을 외면한다.

    “두 분 좋은 대학 나오셔서 한 분은 공무원, 다른 한 분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기업 임원으로 정년 퇴임하셨죠?”

    “…….”

    “두 분 받는 연봉이 얼마쯤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통장에 보면 전영석 씨가 고 전영임 씨에게 보낸 메시지만 있는 게 아니에요. 그 메시지 옆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어요.”

    최준환 판사의 시선이 전영석에게로 향한다.

    “우리 착한 영석이. 지 먹고 살기도 힘들 텐데. 더 잘해줬어야 하는데. 우리 가여운 영석이. 형들처럼 배움이 길지 않아 고생만 하고. 내가 빨리 몸이 나아서 일을 해야 영석이 신세 지지 않을 텐데. 하아-.”

    최준환 판사가 답답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토해낸다. 최준환의 눈매가 가늘어진다. 그는 전영우와 전영호를 바라보며 말한다.

    “고 전영임 씨가 들었던 보험. 그 보험금을 어떻게 냈을 것 같습니까?”

    “그건 제가…….”

    대답을 하려는 전영호의 옆구리를 전영우가 툭툭 친다.

    “전영석 씨가 매달 보내준 돈으로 낸 거예요. 보험 가입은 고 전영임 씨가 했지만 실질적으로 보험금을 납입한 사람은 전영석 씨란 말입니다.”

    “재판관님. 사실이 그렇다 해도 법적인…….”

    두 사람의 변호사가 항의하려 하자 최준환이 인상을 찌푸린다.

    “변호인.”

    “네, 재판관님.”

    “난 지금 법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면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 그걸 말하려는 거예요. 법을 집행하는 판사가 감정에 휩싸여 그릇된 판단을 하면 안 되죠. 나도 잘 알아요. 하지만 법이 뭡니까? 사람이 지켜야 할 최소한을 규정지어 놓은 겁니다. 제 말이 틀렸으면 틀렸다고 말해보세요.”

    변호사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 앉는다.

    “변호인. 과연 이 통장에 서기가 읽은 메시지와 내가 읽은 고 전영임 씨의 글밖에 없었을까요?”

    최준환 판사가 통장을 들춘다.

    “전영우 씨.”

    “네.”

    “세 달 전에 고 전영임 씨가 전영우 씨에게 5백만 원을 보냈네요. 맞죠?”

    “그, 그건…… 전에 제가 누님께 돈을 빌려 드려서 그걸 갚은 겁니다.”

    누가 들어도 급하게 생각해낸 핑계일 뿐이다.

    “그래요? 누님이 돈을 빌리셨구나. 그럼 묻겠습니다. 전영우 씨는 지금까지 살아오며 고 전영임 씨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졌습니까?”

    “제가 언제 빚을 졌다고 그러십니까?”

    “조실부모하여 어린 시절부터 고 전영임 씨가 세 분 동생들 뒷바라지를 했지요? 봉재 공장에서 먼지 마셔가며, 손에 기름때 묻혀가며 말이죠. 그간 받은 것들은 빚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으신 겁니까? 그럼 묻겠습니다. 얼마를 빌려주셨습니까?”

    “오, 오천만 원 빌려줬습니다.”

    “그래요? 언제요?”

    전영우는 계속해서 버벅대고 있다. 결국 빌려준 시기를 말했지만 누구도 믿는 사람이 없었다.

    “현금으로 드렸나요?”

    “…… 네.”

    “현금으로 드렸어도 전영우 씨의 통장이나 아내분 통장에는 출금 내역이 남았겠죠? 설마 현금 5천만 원을 집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요?”

    결국 전영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최준환 판사는 전영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영호 씨도 누님께 돈을 빌려 드렸나요?”

    “아닙니다. 누님이 우리 애들 용돈 주라고 보내준 겁니다.”

    나름 전영우에 비해 타당한 핑계를 대었다. 하지만 최준환 판사는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하다.

    “자제분들 용돈 평소에 얼마나 주세요? 석 달 사이에 천만 원을 보내드렸는데 정말 자제분들 용돈이었던 겁니까?”

    그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전영석이 딱딱한 음성으로 말한다.

    “형들은 매번 누님에게 손을 벌렸습니다.”

    “야, 임마! 누가 손을 벌려!”

    “이상한 소리 할래?”

    전영우와 전영호가 전영석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반박하자 최준환이 두 사람을 쏘아본다.

    “전영석 씨는 계속 말하세요. 그리고 두 분은 전영석 씨 이야기 끝난 후 말하세요.”

    “3년 전에도 큰형은 큰조카 결혼하는데 집을 해줄 돈이 부족하다고 누님에게 돈을 달라고 했습니다. 통장을 찾아보면 기록이 있을 겁니다.”

    최준환 판사가 통장들을 확인한 후 3년 전 통장을 찾는다.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 웃는다.

    “3천만 원을 받으셨네요. 20억이 넘는 집에 사시는 분이 두 평 남짓한 고시원에 사는 누님에게 3천만 원을 달라고 하셨어요.”

    “…….”

    “둘째 형도 비슷합니다.”

    돈이 오고 간 증거가 최준환 판사의 손에 있기에 두 형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이만 갈고 있다.

    “두 분. 단 한 번이라도 고 전영임 씨가 살던 고시원에 가본 적 있습니까?”

    대답하지 못하는 두 사람을 보며 최준환 판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전영석 씨.”

    “네, 판사님.”

    “돈을 드리지 말고 그냥 누님과 함께 사는 편이 낫지 않았나요?”

    전영석이 쓰게 웃는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저도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누님이 번번이 싫다고 하셨어요. 당신 때문에 제가 일하지 못하게 될까 봐 걱정하신 거죠. 그리고 형들 눈치를 보기도 했고요.”

    “왜 형들 눈치를 봤을까요?”

    “누님이 제게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제가 드리는 돈 대부분을 형들에게 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와 같이 살면 그게 들통날까 걱정하셨을 거예요.”

    최준환 판사가 고개를 주억이며 통장을 만지작거린다.

    “본 판사는 법을 집행하는 이이기에 앞서 자상하신 부모님의 아들이고 한 여인의 남편, 두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최준환 판사는 판결에 앞서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판결합니다. 고 전영임 씨의 보험금은 그녀의 형제들에게 균등하게 상속됨이 마땅하다.”

    전영우와 전영호의 얼굴이 환해진다.

    “허나. 고인의 부양의무와 그에 따른 기여분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고 전영임 명의의 보험이기는 하나 실제로 보험금을 납입한 사람은 동생 전영석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에 본 판사는 이와 같이 판결한다. 고 전영임의 첫째 동생 전영우에게 보험금의 1할, 둘째 동생 전영호에게 보험금의 1할, 나머지 8할은 보험의 실제 납입자인 전영석에게 지급한다.”

    탕- 탕- 탕-

    “이의 있습니다.”

    두 형제의 변호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변호인.”

    “네. 재판관님.”

    “이미 판결은 내려졌습니다. 이의가 있으면 항소하세요.”

    “법에는…….”

    최준환 판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법 좋지요. 변호인이나 나나 법으로 먹고사는 사람들 아닙니까? 변호인에게 묻고 싶습니다. 법이 항상 옳습니까?”

    “…….”

    “전 법을 집행하는 사람으로 가끔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과연 내가 내린 판결이 옳은 것일까? 법대로 하자면 판결이 맞겠죠. 하지만 그 법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며 법복을 벗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한 적이 아주 많습니다. 이번 경우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최준환 판사가 통장을 들어 잠시 바라본다. 자리에서 일어선 최준환 판사가 전영석을 향해 천천히 허리를 숙인다. 전영석이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러워할 때였다.

    “동생들을 위해 한평생 희생하신 고 전영임 씨의 헌신에 진심으로 존경을 표합니다. 더불어 그런 누님에게 받은 사랑과 은혜를 평생 갚은 전영석 씨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허리를 편 최준환 판사가 재판을 참관하는 이들을 향해 몸을 돌린다.

    “책, 드라마, 영화, 옛날 동화 속에 참 감동적인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전 오늘 그것들보다 더 큰 감동을 느꼈습니다. 고 전영임 씨와 전영석 씨의 이야기는 제 손자, 손녀들에게 들려줄 겁니다. 아가, 이런 분들도 있단다. 너희들도 나중에 커서 이 두 분처럼 우애 있게 살 거라.”

    최준환 판사가 자리에 앉자 전영석이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한다. 전영우와 전영호는 그런 전영석을 보며 인상을 구기더니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간다.

    재판을 지켜보던 인호가 전영석에게 다가간다.

    “수고하셨습니다.”

    “누님. 으엉. 누님, 보고 싶어요.”

    인호가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킨 후 전영석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준다.

    “영석 씨는 누님도 떠나보내고, 형들과의 인연도 끝난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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