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데니 우드의 주먹을 피해 뒤로 물러서려 할 때였다. 인호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숙인다. 데니 우드의 주먹이 머리칼을 스쳐 지나간다. 인호가 옆으로 몸을 굴린다. 몸을 일으키며 조금 전 서 있던 곳을 확인한다.
아스팔트의 한 부분이 돌출되어 있었다. 그것이 인호의 움직임을 방해한 것이다. 인호가 놀랍다는 듯 데니 우드를 바라본다.
“특이한 능력을 사용하네.”
“이 세상은 나의 세상이다. 이곳에서는 내가 곧 신이다.”
인호가 피식 웃는다.
“신이라는 말을 함부로 입에 담는 게 아니야. 신성모독이라고 알지? 저 위에 계신 분들이 아주 싫어하거든.”
“흥! 그런 것을 두려워할 것 같나.”
“두려워해야 할걸. 이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분의 뜻에서 벗어날 수 없거든.”
데니 우드가 손을 뻗는다. 인호의 발아래서 아스팔트가 솟구친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인호가 몸을 피하자 기다렸다는 듯 데니 우드의 공격이 시작된다.
빠각-
데니 우드가 얼굴을 감싸 쥐고 뒤로 물러난다. 이 영화 속 세상에서 절대적인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지만 격투 능력은 인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지면을 박찬 인호가 데니 우드를 압박한다. 그의 몸이 흐릿해지며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인호가 달려들자 주변에 주차되어 있는 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날아든다.
인호가 몸을 피할 때 주변의 자동차들의 시동이 걸린다. 라이트 불빛이 일제히 인호를 향한다. 자동차들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으르렁거리는 맹수와 같다.
“참 피곤한 능력이네.”
인호가 길가로 달려간다. 차들이 일제히 그 뒤를 쫓는다.
쾅- 콰쾅-
길가의 쓰레기통을 밟고 뛰어오르자 그 자리로 자동차가 달려와 벽에 충돌한다. 인호는 차 위에 내려선 후 재빨리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 골목과 벽을 이용해 계속해서 달려드는 차를 피한다.
“어이쿠.”
머리 위에서 커다란 화분이 떨어진다. 인호가 놀라 몸을 구른다. 몸을 일으키려는 인호의 얼굴로 데니 우드의 발이 날아든다.
인호가 그 발목을 잡고 재빨리 비튼다. 데니 우드가 비명과 함께 뒤로 물러선다. 그의 오른쪽 발목이 기이한 각도로 꺾여있다. 인상을 찌푸리며 발목을 비틀자 곧 정상으로 돌아온다.
“죽여버리겠다.”
“내가 악령들에게 가장 듣는 말이 뭔지 알아?”
“닥쳐라!”
“죽여버린다는 말이랑 닥치라는 말이야.”
인호가 옆에 떨어져 있는 자동차의 부서진 파편을 데니 우드에게 던진다. 그가 몸을 피하는 짧은 순간 인호가 그와의 거리를 좁힌다.
뻗어오는 주먹을 피하며 팔꿈치를 잡아 반대 방향으로 꺾는다. 몸을 빼내려는 데니 우드의 반대 팔을 잡아 마찬가지로 비틀어버린다.
데니 우드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며 어떻게든 인호에게서 떨어지려 한다.
빠각-
인호가 정강이로 데니 우드의 종아리를 강하게 찬다. 데니 우드의 몸이 붕 떠오른다. 인호의 몸이 회전한다. 하체에서 시작된 회전이 허리를 거쳐 상체를 통해 팔까지 전달된다.
인호의 모든 힘이 실린 주먹은 데니 우드의 얼굴의 반을 날려버렸다. 으스러진 얼굴, 깨어진 두개골 사이로 뇌수가 흘러나온다.
너덜너덜해진 입으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는 데니 우드. 인호는 가차 없이 남은 얼굴 반쪽으로 터트려버린다. 데니 우드의 몸이 얼음이 녹듯 녹아내려 지면에 스며든다.
인호가 피식 웃으며 말한다.
“숨을 생각하지 말고 나와라.”
이 정도로 처치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어딘가 몸을 숨긴 채 부상을 치료하고 있을 것이다.
“안 나와?”
인호가 어깨를 으쓱하며 몸을 돌린다.
“상관없어. 네가 올 곳은 정해져 있으니까.”
* * *
다음 날.
인호는 아침 일찍부터 병원에 와 있다.
“조금 시끄럽네요.”
병실 밖에 의사와 간호사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인호가 제니의 병실에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것이다. 면회 시간도 아니었고, 당연히 면회 신청도 하지 않았다.
“데니는 어떻게 됐어요?”
인호가 제니에게 어제 겪은 일을 설명해 준다.
“어차피 그는 이곳으로 오게 되어 있어요.”
제니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소년을 보며 환하게 웃는다.
“어제 잠을 자지 못했나 봐요.”
“잡아둔 여관 근처에서 누가 크게 싸웠다고 하더라고요.”
인호가 강렬한 적의에 창밖을 본다. 항상 앉던 벤치에 데니 우드가 앉아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그의 눈빛이 선명하게 보인다.
어제 입었던 부상은 이미 말끔히 치료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데니 우드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이 세계를 부숴야죠.”
제니가 잘 모르겠다는 듯 인호를 바라본다.
“간단합니다. 이 세계는 두 개의 힘에 의해 유지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데니 우드의 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저인가요?”
“네, 맞아요. 제니는 이 영화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죠?”
“그랬죠. 제가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모습이었으니까요.”
“전 한국에서 왔습니다. 한국에는 이런 말들을 합니다. 강한 원념이 깃든 물건은 영성을 띤다고 말이죠. 이 영화가 바로 그런 겁니다. 제니의 원념과 데니 로드의 원념이 만들어낸 거죠. 그러니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두 개의 기둥 중 하나가 무너지게 되면 남은 하나도 부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인정하시면 됩니다. 이 세계가 허구인 것을, 그리고 존재하면 안 되는 세계라는 것을요.”
“그것뿐인가요?”
인호가 고개를 흔든다.
“그것뿐이라면 이미 제니는 가야 할 곳에 갔겠죠. 인정하는 순간이 중요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는 제니의 힘보다 데니 우드의 힘이 더 강하게 작용합니다. 내가 데니 우드의 영향력을 무너트릴 겁니다. 잠시나마 제니의 힘이 데니 우드의 힘보다 우위에 있게 될 텐데. 그 순간이 중요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저 인정하기만 하면 되나요?”
“인정을 하게 되면 제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깨닫게 될 겁니다.”
* * *
“그런 것들을 어떻게 아는 거예요?”
“뭘 말하는 거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소년이 묻는다.
“이 세계를 두 개의 힘이 지탱하고 있고 저 나쁜 영혼의 힘이 약해져야 한다는 거요.”
“나도 너처럼 어렸을 때 신기한 힘을 접하게 되었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을 했지. 그래서 저절로 알게 된 거야.”
데니 우드를 전투 불능 상태로 만들었음에도 그의 존재감이 조금 희미해졌을 뿐이다. 그때 알게 되었다. 이 세계가 존재하는 한 데니 우드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한 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은 이 세계가 온전히 데니 우드의 힘에 의해 지탱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데니 우드가 심각한 부상을 입고 몸을 피했을 때 잠시지만 주변의 기운들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굳이 표현하자면 데니 우드의 기운에 다른 어떤 기운이 섞여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생각을 해 보니 이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존재가 데니 우드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잘 지켜보도록 해. 너도 경험하게 될 테니까.”
험한 싸움이 벌어질 곳에 소년을 데리고 가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주술사란 정신적 지주다. 족장이 그들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주는 존재라면 주술사는 그 외의 것들로부터 부족을 지킨다.
그렇기에 소년은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주술사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있고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지금 인호가 보여줄 것은 주술사가 소년에게 알려줄 수 없는 것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1층에 도착하고 소년을 잘 볼 수 있는 곳에 데려다 두고 후원으로 나갔다. 데니 우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인호를 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네가 무슨 권리로 제니 곁에 있는 거지?”
“권리가 없는 건 너도 마찬가지일 텐데?”
“나는 제니의 아버지야. 보호자란 말이야. 내가 지켜주지 않으면 제니는 죽어.”
“다시 말해줘? 제니도 죽었고, 너도 죽었어. 그러니 지금이라도 가야 할 곳으로 떠나지 그래? 좋은 곳으로 가지는 못하겠지만 말이야.”
데니 우드가 양손을 좌우로 펼친다. 후원 화단에 있는 식물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킨다.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평온을 주었을 아름다운 꽃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앞세워 인호를 물어뜯으려 한다.
“확실히 귀찮은 능력이야.”
인호가 소매를 걷는다. 검은 문양에 손가락을 찔러넣는다. 손가락이 검게 물든다. 정신을 집중하자 손가락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형상을 갖춘다.
손잡이부터 검신까지 온통 검은색은 검이다.
인호가 손을 가볍게 털어낸다. 입을 쩍 벌리고 다가서던 식물들의 줄기가 잘린다. 녹색의 피가 솟구친다. 인호는 식물들을 차례로 베어내며 데니 우드와의 거리를 좁혀 나갔다.
벤치가 날아오고 화단석이 대포처럼 날아왔지만, 인호의 걸음을 멈추지 못했다.
“죽어! 죽으란 말이야!”
“고작 이 정도에 죽었을 거면 이미 천 번도 넘게 죽었을 거야. 지금까지 내가 상대했던 악령들에 비하면 넌-.”
인호가 히죽 웃는다.
“그냥 조금 성가신 정도야.”
미국에 오기 직전 대악마라 할 수 있는 존재와도 싸웠다. 마르바스와 비교한다면 데니 우드는 언급한 것처럼 조금 성가신 존재일 뿐이다.
부수고, 부숴도 다시 살아나는 좀비 같은 존재.
결국 인호가 데니 우드 앞에 도착했다. 검이 허공을 가른다. 데니 우드의 몸이 흐릿해진다.
“크아악-!”
조금 떨어진 곳에 나타난 데니 우드의 왼쪽 팔이 팔꿈치 아래로 잘려 있었다. 데니 우드는 피가 철철 흐르는 팔을 붙잡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인호의 검이 데니 우드의 사지를 차례로 자른다.
“난 다시 돌아올 거야. 그때는 지금처럼 쉽지 않을 거야.”
“글쎄. 과연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츠릿-
검이 데니 우드의 목을 쳐낸다.
데굴데굴 굴러가다 멈춘 머리와 몸통, 사지가 물처럼 변해 지면에 스며든다. 인호가 검을 들고 눈을 감는다.
“도망을 치려면 확실히 쳤어야지.”
검이 지면을 꿰뚫는다.
- 크아아아아
데니 우드의 비명이 들려온다.
인호가 주변을 둘러본다. 어제저녁에 느꼈던 것과 같다. 주변의 기운이 조금 변했다. 제니의 기운이 데니 우드의 기운에 앞선 것이다.
인호가 말한 ‘순간’이 바로 지금이다.
제니의 영향력이 데니 우드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순간.
인호가 고개를 들어 병실 쪽을 바라본다. 창가에 서 있는 제니가 보인다. 제니에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준다. 제니 역시 웃고 있다. 무슨 말인가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독수리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소년이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킨다.
하늘 높은 곳에 하나의 점이 보인다. 점은 점점 커지고 있다. 거대한 독수리가 날아오고 있다.
인호가 창가에 선 제니를 보며 중얼거린다.
“잘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