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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 흥신소-153화 (153/190)
  • 제153화

    이른 아침에 일어난 인호는 기지개를 켜며 천막을 나섰다.

    “일어나셨어요?”

    인호가 의외라는 듯 옆 천막을 나서려는 이민정을 바라본다.

    “일찍 일어났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봐요. 계속 뒤척이고 몇 번이나 깼어요.”

    “그런 애치고는 비행하는 동안, 그리고 이곳까지 오는 동안 너무 잘 자던데?”

    “그냥 그렇다고 이해해 주시면 안 돼요?”

    “그래. 그렇다고 하자.”

    “그러는 소장님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인호가 피식 웃는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보지.”

    부족원들이 인호와 이민정에게 인사를 건넨다. 부족원들의 표정은 밝았다. 꾸며낸 밝음이 아닌 행복함을 기반에 둔 밝음이다. 그렇기에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민정을 뒤로한 채 주술사의 천막으로 향한다.

    “왔으면 들어오지 왜 밖에 서 있는 건가?”

    “주인의 허락 정도는 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실지 모르지만 제가 속한 나라가 예절을 무척이나 따지거든요.”

    천막 안으로 들어간다. 주술사는 언제나처럼 모닥불 앞에 앉아 있다. 인호의 눈이 주술사의 하얀 눈과 마주친다. 볼 때마다 신비함을 느낀다. 분명 앞을 보지 못할 텐데 자신의 내면까지 훑고 있는 것 같다.

    주술사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소년이 앉아 있다.

    “한잔할 텐가?”

    “술은 마다하는 게 아니지요.”

    주술사의 맞은편에 앉는다.

    “오늘 밤에 축제를 벌이도록 하지.”

    축제를 벌인다는 뜻은 인호가 온 목적을 이루게 해 주겠다는 것이다. 주술사가 건네는 술을 받아 마신다. 주술사는 손을 들어 소년에게 손짓한다. 소년이 다가와 옆에 앉자 주술사가 머리를 쓰다듬는다.

    “대신 조건이 있네.”

    “말씀하십시오.”

    “이 아이와 함께 다녀오게.”

    인호가 주술사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위험하다고 말씀하신 분은 주술사님이십니다.”

    위험한 곳에 자신의 후계자를 보내려고 하는 것이다.

    “한번은 경험해야 할 일일세. 그럴 바엔 자네와 함께 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지. 부디 이 아이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게. 비록 방식이 다르긴 하지만 자네와 나, 우리 모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 아닌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 괜찮은 표현이네요.”

    인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인호가 소년을 보며 묻는다.

    “나와 함께 갈래?”

    “네, 그럴게요.”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

    소년이 고개를 흔든다.

    “아니요. 가고 싶어요.”

    주술수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오해는 하지 말게. 스스로 원해 내 후계자가 된 아이이니. 조금의 강요도 없었어.”

    “믿습니다.”

    주술사가 손을 내민다.

    “줘야 할 게 있지 않나?”

    혹시나 해서 가져온 필름을 주술사에게 건넨다. 주술사는 필름을 쓰다듬는다. 그의 표정이 묘하다.

    “특이한 물건이군. 영혼이 갇혀 있어.”

    “그렇습니까?”

    예상이 맞았다. 하지만 이어지는 주술사의 말에 인호가 깜짝 놀란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이나 되는군.”

    “영혼이 둘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래. 두 사람의 영혼이 이 안에 있군. 그중 하나는 여자의 영혼 같고.”

    “맞습니다.”

    주술사가 필름을 무릎 위에 올려둔다.

    “일단 내가 보관하고 있겠네. 축제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니 저녁에 다시 보도록 하지.”

    * * *

    하늘 부족의 중앙 광장에 거대한 모닥불이 피워졌다. 악사들이 나무를 두드리며 흥을 돋우자 부족원들이 모닥불 주위를 빙빙 돌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땅을 박차고 하늘 높이 뛰어오르기도 하고 손으로 입을 두드리며 이상한 소리를 내기도 한다. 이민정은 진즉에 부족원들의 손에 이끌려 모닥불 주위를 돌고 있다.

    인호는 옆에 앉아 있는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준다.

    “무섭지 않아?”

    “괜찮아요.”

    축제가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부족원 여자 한 명이 잔 두 개를 들고 다가온다. 인호와 소년이 잔을 받아든다. 이 술을 마시게 되면 전에 이곳에 와서 경험했던 신비로운 일을 다시 경험하게 되리라.

    인호가 술을 마시자 소년 역시 냉큼 술을 마신다.

    ‘삐’하는 이명이 들리는 것 같다. 세상이 묘하게 뒤틀린다. 모닥불 주위를 돌며 춤추는 부족원들의 모습이 흐릿해진다. 그럴수록 모닥불 너머 주술사의 천막이 선명하게 보인다. 천막 안에 앉아 있는 주술사의 시선이 느껴진다.

    “갈까?”

    인호가 일어나 손을 내미니 소년이 잡는다. 두 사람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뗀다.

    “소장님!”

    인호와 소년이 모닥불 속으로 들어가자 뾰족한 비명이 들려온다. 이민정이 경악한 눈으로 인호를 보며 빽 소리를 지르고 있다.

    하지만 인호와 소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모닥불을 뚫고 주술사의 천막 안으로 들어간다. 주술사는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보고는 손을 허공에 뿌린다.

    그가 뿌린 하얀 가루가 모닥불 위로 떨어진다. 모닥불이 천막의 천정까지 치솟는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인호는 주술사를, 정확히는 그의 뒤를 바라본다. 거대한 독수리가 두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

    “조심히 다녀오게.”

    주술사의 음성이 점점 멀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이내 곧 정신을 잃고 만다.

    * * *

    “이곳은-.”

    인호가 주변을 둘러본다. 크지 않은 집들이 보인다. 낯선 공간에서 의식을 차린 인호가 옆을 바라본다. 소년이 여전히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확인한 인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된 거군.”

    인호는 눈을 뜬 곳이 어디인지 깨닫게 되었다.

    “여긴 어딘가요?”

    “영화 속. 아니, 필름 속이라고 해야 하나?”

    주변의 집들은 이철호와 함께 보았던 영화 속에 등장하는 것들이었다. 기억을 더듬으니 점점 선명해진다. 이 거리 역시 기억이 났다. 아버지가 아픈 딸과 함께 거닐던 거리였다.

    “이봐! 길 한가운데 그렇게 서 있으면 어떻게 하나?”

    고개를 돌려보니 한 백인 남자가 운전석 창문을 열고 말하고 있다.

    “죄송합니다.”

    인호가 소년과 함께 길가로 이동한다. 백인 남자가 차를 몰아 떠나간다.

    “저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인가요?”

    “아마도? 현실에 아직 살아 있겠지.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그가 이곳에 남긴 흔적, 잔재 정도라고 해야 할까?”

    백인 남자에게서는 망령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두 명이라고 했지?”

    한 명이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실제로 불치병에 걸려 영화를 촬영한 여주인공이다. 그리고 다른 망령은 높은 확률로 그녀의 아버지 연기를 했던 배우일 것이다. 이철호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를 연기한 남자 배우가 여배우의 무덤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고 했다.

    “일단 만나봐야겠지?”

    인호가 몸을 돌린다. 처음 의식을 차린 곳에서 주인공 부녀가 사는 집이 멀지 않다. 1분 정도 걸어 도착한 주인공의 집 앞에 서서 인호가 망설이고 있다. 하지만 이내 결심한 듯 문을 두드린다.

    “계십니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안쪽에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집에 아무도 없어요.”

    소년이 창을 통해 집 안을 확인한다.

    “그렇구나. 어딜 갔을까?”

    영화에서는 여주인공, 제니가 아파 집 밖에 거의 나가지 않는다. 가끔 외출할 때가 있는데 목적지는 열에 아홉 병원이었다.

    “그래. 병원으로 가보자.”

    인호가 소년과 함께 걸음을 옮긴다. 큰길로 나가니 빈 택시가 다가온다. 인호가 손을 흔들자 택시가 그 앞에 멈춘다.

    “어디로 모실까요?”

    “이 근처에서 가장 큰 병원이 어디죠?”

    “그거야 당연히 루카스 종합병원이죠.”

    “그곳으로 갑시다.”

    택시 기사가 룸미러로 인호 일행을 힐끔거린다.

    “이곳 사람 아니시죠?”

    “네. 여행자입니다.”

    “하하, 이 작은 동네에 뭘 보겠다고 여행을 왔는지 모르겠군요. 누가 아픈 겁니까?”

    “아니요. 누굴 찾고 있습니다.”

    “제가 이 동네 토박이입니다. 누굴 찾는지 말만 해요.”

    인호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뗀다.

    “제니를 찾고 있습니다.”

    “제니요? 제니 볼튼?”

    “맞습니다. 브라이언의 딸 제니 볼튼을 찾고 있습니다.”

    “흐음-. 제니와 잘 아는 사이입니까?”

    “예전에 잠시 인연이 있습니다. 꼭 한 번 찾아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제니가 어떤 상황인지는 아시죠?”

    인호가 고개를 끄덕인다.

    “악화된 겁니까?”

    “맞아요. 4일 전인가 구급차에 실려 갔어요. 브라이언 그 친구가 상심이 커요.”

    “제니가 입원한 병원이 루카스 종합병원입니까?”

    “당연하죠. 이 인근에서 제니를 치료할 수 있는 병원은 그곳뿐이니. 그런데 가더라도 면회는 힘들 겁니다. 어제 브라이언이 제니의 짐을 가지러 왔는데 자기도 하루에 아주 잠깐 밖에 면회가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인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제니의 병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는 것은 영화의 종반부다. 제니는 결국 병원에서 퇴원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하필이면 이 시점이라니.”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요. 혼잣말입니다.”

    * * *

    루카스 종합병원.

    영화에서 봤던 그 병원이 맞다.

    “혹시라도 제니와 면회가 된다면 존 아저씨가 꼭 완쾌되길 바란다고 했다고 전해주십시오.”

    “그렇게 하죠. 수고 많으셨습니다.”

    영화 속이지만 택시비는 인호가 가지고 있던 진짜 돈으로 지불했다. 병원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인호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저……. 실례하겠습니다.”

    흑인 간호사를 불러 세운다.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혹시 제니 볼튼 환자가 어디에 입원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제니요? 제니를 어떻게 아시는 분이시죠?”

    “오래전에 인연이 있었습니다.”

    간호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인호를 바라본다.

    “오래전에 인연이 있었다고요? 제니하고요?”

    아파서 집 밖을 나가지 못하는 사람인 걸 알고 있는 눈치다.

    “정말 오래전 일입니다. 제니가 워싱턴에 잠시 있을 때 만난 사이죠.”

    “아-, 그래요?”

    제니는 영화 속에서 과거를 회상했는데 그 회상을 통해 그녀가 워싱턴에 잠시 머물렀음을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제니가 자기 병을 알기 전이잖아요. 저한테도 가끔 워싱턴에서 지낼 때 이야기를 하곤 해요. 제니는 8층 병동에 입원해 있어요. 중환자 병동이죠. 참고로 면회는 하루에 5분밖에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제니와 면회하고 싶으면 브라이언에 먼저 허락을 구해야 할 거예요. 제니의 면회 시간은 브라이언에게 허락된 짧은 축복이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혹시 브라이언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간호사가 잠시 생각하다 말한다.

    “후원 산책로에서 보긴 했는데 아직 거기 있는지 모르겠어요. 하루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내니 거기 있을 확률이 높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병원 로비를 지나 들어온 입구의 반대편으로 가니 후원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벤치에 앉아 햇빛을 즐기는 환자들, 휠체어를 미는 사람들이 보인다.

    인호가 산책로를 따라 걷는다. 걷던 인호가 갑자기 멈춰서자 소년이 의아한 듯 인호를 바라본다. 인호가 한 남자를 보고 있다. 50대 초반 정도의 초췌한 인상의 남자다.

    “예상대로네.”

    벤치에 앉은 남자는 제니의 아버지 브라이언이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는 망령의 기운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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