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마르바스가 인호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린다.
“특이한 기운을 지닌 인간이구나.”
“칭찬 고마워. 너도 내가 아는 악마 중에 제일 특이해. 구질구질하게 말이 참 드럽게 많아. 사실대로 말해봐. 인간의 몸을 통해 멋지게 등장하긴 했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지?”
마르바스가 비릿하게 웃는다.
“잘 알고 있군. 아무리 나의 권능을 받았다지면 결국 인간의 육체일 뿐. 나의 힘을 온전히 감당할 수 없지.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어. 이곳에 모인 벌레들을 눌러 죽일 정도의 힘은 있으니.”
“그 몸이 제물이 되는 거로군.”
“인간치고 우리들에 대해 잘 알고 있군.”
“당연하지.”
평생을 그렇게 살았으니까.
악마를 상대해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아버지를 비롯한 선대들이 남긴 기록에 악마와 관련된 것들도 있다. 비록 박주완이 속한 구마사제단이 가진 정보에 비하면 보잘것 없을지라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모르는 것의 차이는 상당하다.
“제물에 대해 알고 있다면 잠시 후 네가 어떻게 될지도 알고 있겠구나.”
악마들이 지옥이 아닌 인간 세상에서 힘을 사용하기 위해선 그에 합당한 제물이 필요하다. 기록 속에 등장하는 악마 추종자들이 기이한 그림을 그리고 산 사람의 가슴을 갈라 심장을 꺼내는 등의 모습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그 제물을 바치기 위함이다.
제물로 인해 인간 세상에 간섭하게 된 악마는 제물을 받친 이가 원하는 바를 들어줘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악마와 인간의 계약이다. 그 대가로 악마는 인간의 영혼을 소유하게 된다.
“내가 어떻게 될지는 잘 모르겠고 네가 어떻게 될지는 알 것 같아.”
“그래? 궁금하군.”
“뻔하잖아. 본래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겠지. 지독한 유황 냄새나 맡으며 또 다른 미치놈이 널 부를 때까지 지루함을 견뎌야 겠지.”
“흥미롭군. 과연 네 말대로 될지 보자고.”
마르바스가 히죽 웃는다. 그의 주변에 검은 기운이 뭉클 피어오른다. 인호가 앞으로 내달린다. 때를 맞춰 박주완이 품속에서 유리병 하나를 꺼내 인호와 마르바스 사이에 던진다.
인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른다. 타격지점은 박주완이 던진 유리병이다. 유리병이 깨지며 내용물의 일부는 마르바스에게, 또 일부는 인호의 몸을 적신다.
마르바스가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 밝은 빛이 솟구친다. 박주완이 던진 성수가 만들어낸 빛이었다. 성수와 검은 기운이 만나고 잠시지만 검은 기운이 밀려난다.
그렇게 열린 좁은 길로 인호가 뛰어든다. 검은 기운이 인호를 옥죄려 한다. 하지만 인호가 뒤집어쓴 성수가 되려 검은 기운을 밀어낸다.
퍽- 퍽- 퍽-
인호의 주먹이 마르바스의 몸을 두드린다. 정확한 타격이었지만 인호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솜뭉치를 주먹으로 때리는 것 같다. 제대로 타격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시 주먹을 뻗으려 할 때 검은 기운이 인호의 몸을 감싼다.
인호의 몸에서, 정확히는 몸을 뒤덮고 있는 검은 문양들이 마르바스의 검은 기운에 대항한다.
“놀랍군. 품고 있는 기운만 본다면 오히려 네가 더 악마 같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온 거지?”
어둠으로 가려 보이지 않는 마르바스를 향해 인호가 콧방귀를 낀다.
“흥! 알면? 보상이라도 해 주게? 다 너 같은 씹새들 때문이잖아.”
인호가 주먹을 꽉 말아쥐고 음성이 들려오는 곳을 향해 주먹을 내뿜는다. 목표를 타격하기 전 인호의 눈이 푸르게 빛난다.
쩌정-
대기가 터져나가는 듯한 소리가 울려퍼지며 무언가 뒤로 날아간다. 벽에 부딪쳐 떨어져 내린 것은 마르바스다.
“이제야 알겠어. 명계의 힘이군.”
“이제라도 알아줘서 고마워.”
인호의 옆에 박주완이 선다.
“시간 끌어줘서 고맙다.”
“별 말씀을요.”
인호가 악마인 마르바스와 말을 섞은 이유가 박주완에게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다. 십자가를 움켜 쥔 박주완의 팔에 검은 얼룩같은 것이 보인다.
“오염되셨습니까?”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냐? 오염은 아니고. 저 악마는 병을 전하는 악마잖아. 기운에 닿아 신체가 반응한 것뿐이다.”
마르바스의 기운이 인호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는 이유는 인호의 몸에 새겨진 검은 문양 때문이다. 인호에게는 저주라 할 수 있는 검은 문양이 지옥의 힘을 사용하는 마르바스를 상대할 때는 큰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신부님. 조심하세요. 괜히 다치지 말고요.”
“쯧. 누가 할 소릴……. 귀신은 몰라도 악마 상대하는 건 내가 너보다 한 수 위거든.”
“그렇다고 해두죠.”
인호가 팔목을 빙빙 돌리며 가볍게 몸을 풀자 박주완이 십자가를 정면에 세운다.
“빨리 끝나자. 악마여. 내 아버지의 권능이 널 심판하리라.”
박주완이 병을 꺼내 성수를 십자가에 뿌린다.
“지옥의 유황불도 내 걸음을 막지 못하리니 주님 제게 힘을 주소서.”
박주완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온다.
박주완이 마르바스와의 거리를 좁히자 인호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의 주먹에 푸른 기운이 뭉쳐있다.
몸을 일으킨 마르바스의 목이 비스듬하게 꺾인다. 그의 눈은 피처럼 새빨갛다. 혀로 입술을 훑으며 괴기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인간들은 참 재미있어. 지옥에는 가 본 적도 없으면서 마치 지옥을 잘 아는 것처럼 떠들어. 그렇지 않아?”
마르바스의 눈에서 붉은 광채가 솟구친다.
“내가 친절하게 지옥 구경을 시켜주지. 어떻게? 내 손에 죽으면 자연스럽게 지옥에 가게 될 거야.”
마르바스가 손을 뻗는다. 박주완이 엄청난 속도로 마르바스에게 끌려간다. 어떻게든 버텨보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잡아끄는 듯 딸려가고 있다.
마르바스의 손이 박주완의 목을 틀어쥐기 전 인호가 마르바스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는다. 마르바스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다. 자신의 얼굴에 꽂혀 있는 주먹을 보며 히죽 웃고는 손을 들어 인호의 팔목을 잡는다.
“큭-.”
손목에 엄청난 압력이 전해진다.
인호가 손목을 잡힌 순간 박주완 역시 마르바스에게 목덜미를 잡혔다.
“잡았군. 쥐새끼들.”
마르바스가 사악하게 웃는다.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가지 않는다. 각기 손목과 목이 잡힌 두 사람의 표정이 너무나도 태연했기 때문이다.
무언가 이상함을 느낄 때였다.
“왜 네가 잡았다고 생각하지?”
박주완이 힘겹게 입을 뗀다. 박주완은 마르바스와 눈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그의 손은 품속에 들어갔다 나오고 있다. 손에 들린 것은 서늘함을 품고 있는 단검이다. 단검이 단숨에 마르바스의 배를 파고든다.
“네가 잡은 게 아니라 우리가 잡혀준 거야.”
이번에는 인호다. 인호는 손이 검게 물든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잡혀 있던 인호의 손이 되려 마르바스의 손목을 잡는다. 마르바스가 손을 빼내려 하지만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배에서 전해지는 극심한 통증에 박주완의 목을 놓고 뒤로 물러서려 한다. 하지만 박주완이 기다렸다는 듯 십자가를 수직으로 세운 후 아래로 힘껏 내려친다. 십자가를 피하려 했지만 인호가 그런 마르바스의 몸을 뒤에서 끌어안는다.
빠각-
십자가가 마르바스의 머리를 파고든다. 마르바스의 얼굴 절반이 떨어져 나간다. 상처 부위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하나 남은 눈으로 박주완을 쏘아보는 마르바스. 박주완은 품속에서 성수를 꺼내 마르바스에게 뿌린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마야!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지어다!”
성수를 흠뻑 뒤집어쓴 마르바스의 머리에 인호의 주먹이 틀어박힌다. 수박이 터지듯 머리가 박살 난다. 마르바스는 머리가 없는 시체가 되어 허물어져 내린다.
박주완은 곧바로 성호를 그으며 마르바스의 주위를 돌며 기도문을 읊는다. 시체 주변에 꼼꼼히 성수에 담가둔 소금을 뿌리고 성스러운 천으로 마르바스의 시체를 덮는다.
박주완이 마무리하는 사이 인호가 힘겹게 몸을 돌린다.
정재훈을 비롯한 모든 이들이 멍한 눈으로 인호를 바라보고 있다. 조금 전까지 보았던 모든 광경들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인지를 의심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특히 검찰총장 송재겸은 자신의 눈을 마구 비비고 있다.
“수고하셨습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정재훈이 인호에게 말한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유빈이라고 했지?”
겁먹은 듯 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송유빈에게 다가선다.
“네? 네-.”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대답하는 송유빈을 보며 인호가 말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야.”
송유빈이 죽은 마르바스, 아니 서병재의 시체를 보며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나 더. 부모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야. 네가 어떻게 느꼈을지 몰라도 부모의 사랑은 네 생각보다 몇 배는 크고 숭고하다. 집에 돌아가거든 곰곰이 생각해봐. 아버지가 네게 했던 말과 행동들이 정말 권위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 한 것인지.”
인호가 몸을 돌린다.
“그런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거든.”
* * *
“뭔 가방이 그렇게 많아?”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이민정에게 묻는다.
“해외여행 처음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미국이잖아요. 미국. 정말 가보고 싶었거든요.”
“우리가 지금 놀러 가는 거냐?”
“놀러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놀 시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인호가 고개를 흔든다.
이철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미국으로 떠날 것이다. 이철호는 대은 그룹의 전용기를 타고 가라고 했지만 인호가 거절했다. 이철호는 전용기 대신 퍼스트클래스를 끊어 주었다.
“그런데 우리 둘만 가면 되는 거예요? 도사 아저씨는 같이 안 가요?”
“이번에는 그 형님 없어도 돼. 요즘 형님이 바쁘기도 하고.”
황동호는 계룡산에 박갑수를 만나러 갔다 벼락 맞은 오동나무를 찾았다며 아주 신이 난 상태다. 벼락 맞은 나무가 상당히 컸기에 입이 귀에 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할리우드? 라스베이거스? 어디에요?”
미국에서 관광할 생각에 이민정은 행복한 미소가 한가득이었다.
“민정아. 미안한데. 우리가 가는 곳은 아주 외진 곳이야.”
“네?”
“만나야 할 사람들이 외진 곳에 살거든.”
“얼마나 외진데요?”
“허허벌판을 아주 오랫동안 달려야 해.”
이민정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진다.
“그런 곳에 왜 가요?”
“왜 가긴. 일하러 가지. 그리고 같이 가겠다고 한 건 너야. 지금이라도 가기 싫으면 말해.”
잠시 생각하던 이민정이 고개를 흔든다.
“갈 건데요. 하루, 이틀 정도는 관광할 수 있잖아요. 그렇죠? 제발 그렇다고 해요.”
“에효, 그래. 하자, 해. 관광이 뭐 어려운 거라고.”
목적지인 애리조나주는 조금 전 이민정이 언급한 라스베이거스가 있는 네바다주, 그리고 할리우드가 있는 캘리포니아주와 경계해 있다.
“그래서 우린 어디로 가는데요?”
인호가 만나야 할 사람들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는다.
“미국의 본래 주인들.”
“그게 누군데요?”
“인디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