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한 남자가 맞은편에 앉은 정광훈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다.
“2천억이 필요하다고?”
정광훈이 잠시 인상을 찌푸린다.
‘나이도 어린놈이 매번 반말이야.’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곧 인상을 풀며 환하게 웃는다.
“급매물이 나왔는데 돈이 부족해서.”
“급매물이라…… 도대체 얼마나 덩어리가 큰 매물이길래 정 사장이 2천억이나 빌려달라고 할까? 내가 알기로 서울 바닥에서 그 정도 덩어리 가진 매물은 나온 것이 없는데.”
정광훈은 대답하지 않고 앞에 낮은 남자, 조문현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요즘 지방에 자주 다니신다고?”
“이제 내 뒷조사도 하나?”
“뒷조사라니. 그렇게 말하면 내가 많이 서운하지. 우리가 보통 사이인가? 어려운 시기를 함께 해쳐 온 그런 사이잖아. 지금의 정 사장이 있기까지 내 노력도 상당하잖아.”
“흥-. 아무것도 없던 변두리 깡패가 서울에서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게 누구 덕인데?”
조문현이 웃는다. 하지만 그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는다.
“정 사장이 오랫동안 날 안 봐서 감이 많이 떨어진 모양인데. 잊었어? 나 조문현이야.”
“그래. 잊을 수가 있나? 그러는 조 사장도 예전 같지 않은가 봐. 조 사장 서울에 자리 잡을 때 기억 안 나? 내 도움이 없었다면 과연 변두리 깡패 출신이 서울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 것 같아?”
“어디 한번 계속해봐. 언제까지 선을 넘을지 지켜봐야 내가 어떻게 할지 결정할 수 있으니까.”
“조 사장 돕겠다고 동원했던 인맥. 그 인맥이 지금은 더 단단해지지 않았을까? 아, 그래. 조 사장도 서울에 오래 있으면서 인맥 쌓았겠지. 어디 한번 누구 인맥이 더 단단한지 비교해 볼까? 최 의원하고 자주 어울린다지? 내가 지금 전화 한 통 하지. 그러면 과연 최 의원이 조 사장 전화를 받기나 할까?”
조문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정광훈을 쏘아본다.
“하하하하.”
하지만 이내 크게 웃기 시작한다.
“그냥 오랜만에 보니 기분 좋아서 농담한 걸 가지고 왜 이렇게 까칠하게 반응하실까?”
꼬리를 마는 조문현을 보며 정광훈이 속으로 웃는다.
“정 사장.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 놈이거든. 요즘 정 사장이 뭐 하고 다니는지 나도 다 알고 있어. 도로가 뚫리는 땅을 사려고 한다지? 그래서 돈 필요한 거고?”
어디서 정보를 얻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 신성, 대은 그룹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듯했다.
“알면 길게 이야기할 필요 없겠네. 돈 빌려줄 수 있어?”
“돈? 당연히 빌려줄 수 있지. 우리가 어디 보통 사인가. 그런데 말이야. 2천억 빌려주고 이자만 받아먹기에는 덩어리가 조금 크잖아.”
“그래서? 한발 걸치기라도 하시겠다고?”
“뭘 또 그렇게 야박한 표현을 쓰시나. 그냥 반반 하자는 뜻이지.”
“반반?”
“그래. 천억은 빌려주고 천억은 내가 넣는 걸로. 어때? 이 정도면 합리적이잖아.”
“흐음-.”
정광훈이 가벼운 한숨을 토해낸다.
“신성 그룹. 대은 그룹.”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감당할 수 있겠냐고.”
“신성하고 대은이 나하고 무슨 연관이 있다고?”
조문현이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정광훈을 바라본다.
“내가 사려는 땅 신성하고 대은이 산 땅이야.”
조문현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정광훈의 이야기가 지속될수록 조문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진다.
“사기 맞을 일은 없다는 뜻이잖아.”
무려 신성 그룹과 대은 그룹이 엮여 있다.
“사기? 기가 차네. 내가 누군데? 감히 누가 나한테 사기를 쳐?”
“하하, 그렇지. 정 사장이 왕년에 날렸던 사기…… 아니, 그냥 그렇다고. 그래서 내 제안은?”
“좋아. 혼자 먹기에는 덩어리가 너무 컸거든.”
조문현의 제안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돈을 빌려 달라는 말을 듣기 전부터 따로 조사하고 있을 정도였다.
“하하. 역시 정 사장이 화통하고 좋아. 그런데 총 투자금이 얼마나 되는 거야?”
“4천억.”
조문현이 입을 쩍 벌린다.
“예상 수익률은?”
“최소 두 배.”
“이미 그쪽 땅값이 많이 올랐다던데?”
정광훈이 한심하다는 듯 조문현을 바라본다.
“신성하고 대은이야. 그쪽 땅값이 많이 올랐다고? 크크크. 이미 금싸라기가 될 곳은 신성하고 대은이 다 잡아먹은 상태라는 거지.”
“아-, 그렇겠네. 신성하고 대은이 나섰으면 당연히 그랬겠지. 최소 두 배면 그 이상도 가능하다는 말이잖아.”
정광훈이 고개를 흔든다.
“너무 욕심부리면 안 돼. 신성하고 대은이 왜 기껏 사 모은 땅을 팔려고 할까? 핑계는 급하게 현금이 필요하다는 건데. 생각해봐. 과연 신성하고 대은이 그깟 4천억이 없어서 땅을 팔까? 아니거든. 자기들이 해 먹고 빠지려고 했는데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뜨거워지는 걸 거야. 그러니 아 뜨거 하겠지. 뉴스에 나오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신성하고 대은이 엮인 것 정도야 금방 드러날 테니까.”
“맞네. 그래서 팔려고 하는 거구나. 우리도 너무 크게 먹으려다가 잘못하면 우리가 된서리 맞을 수도 있겠네.”
“이제 말이 좀 통하네. 딱 두 배. 거기에 플러스 알파 정도. 딱 그 정도만 먹고 빠지는 거야. 오케이?”
“오케이. 좋아. 천억을 넣으면 2천억이 되는 거구만. 크크, 마법의 상자가 따로 없네.”
“그러니 입조심 하고 다녀. 알겠어?”
조문현이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일주일 안에 2천억 세탁 가능하지?”
“세탁까지 해야 해?”
“조건이 그거니까. 세탁된 깨끗한 현금이어야 해. 나도 지금 세탁기 돌리는 중이니까 조 사장도 서둘러.”
“일주일이면 충분하지. 수수료가 조금 나가긴 하겠지만 벌 돈 생각하면 껌값이지.”
조문현이 정광훈에게 손을 내민다.
“우리 오랜만에 합 맞추는 건데 잘해보자고.”
* * *
“하하, 공 치러 오셨어요?”
골프 연습장 락커룸에서 인호를 본 정광훈이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네. 외근 나왔다 시간이 좀 남아서요.”
“아하, 그러시구나. 요즘 대은 그룹 많이 바쁘죠?”
“뭐, 그렇죠.”
“회장님은 잘 계시고요?”
인호가 의아한 듯 정광훈을 바라본다.
“우리 회장님과 아시는 사이십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요. 조만간 대은하고 거래를 할 예정이라서요.”
인호가 물끄러미 정광훈을 바라본다.
“투자 회사 하신다고 했죠? 우리 대은 계열사와 대화 나누시는 게 있으신가 봅니다.”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먼저 갑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정광훈이 나가자 락커룸에 혼자 남은 인호가 피식 웃는다.
“좋단다.”
“좋지. 이제 수천억이 들어올 텐데.”
“한평생 남 등쳐가면서 모은 돈 한 방에 날아가면 어떤 기분일까?”
“더럽겠지.”
사기꾼은 정광훈이 나간 쪽을 바라본다.
“광훈이 저놈 가장 큰 장점과 단점이 뭔지 알아?”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
“장점은 의심이 많다는 거야. 일 하나를 해도 몇 번이나 의심하고 확인해.”
“좋은 거네.”
“그런데 가끔 그런 장점이 최악의 단점이 되긴 해. 의심이 풀리면 앞뒤 재지 않고 무조건 달린다는 거야.”
“지금처럼?”
사기꾼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누가 와서 광훈이한테 너 지금 사기당하고 있는 거야. 라고 말을 해줘도 안 믿을걸?”
“작업 끝났다는 말로 들린다.”
“그렇지. 조문현이 그 깡패 새끼야 대가리에 든 게 없어서 광훈이가 하자는 대로 할 테니까.”
“이제 마무리만 남았네. 기대되네. 사기당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저것들이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
“나도 그래.”
* * *
넓지 않은 실내.
서울에서 몇 곳 없는 요정의 별실이다. 그곳에는 다섯 명의 남자가 앉아 있다.
정광훈이 웃으며 맞은 편 남자들의 잔에 술을 채워준다.
“한잔하시고 대화 나누시죠?”
김은철이 잔을 옆으로 밀어둔다.
“일 마치기 전에는 술 안 마십니다.”
“아하! 그러셔야죠. 두 분도 그러실 거죠?”
김은철의 좌우에 앉은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오늘 기분이 참 좋습니다. 이렇게 귀한 분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어서요. 신성의 박 실장님, 그리고 대은의 양 실장님. 하하하.”
“일단 일 먼저 마무리하시죠.”
김은철이 잠금장치가 된 금속 재질의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린다. 그 안에는 땅문서와 토지 대장 등이 담겨 있었다.
“확인해 보시죠.”
“하하, 그럴까요?”
정광훈이 서류들을 꼼꼼히 살핀다. 자신도 과거에 땅문서 위조를 많이 해보았기에 문서의 진위 여부 정도는 금방 확인할 수 있다.
“맞네요. 바로 거래 하시죠.”
정광훈이 옆에 앉은 조문현을 바라본다. 조문현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그래. 나다. 넘겨 드리면 된다.”
4천억 원이나 되는 엄청난 돈이다. 사과박스 하나에 현금 10억이 들어간다고 계산했을 때 사과박스만 4백 개가 된다. 약속된 장소에서 현금 4천억 원이 실린 차를 보관하던 조문현의 부하가 전화를 받고 김은철의 하수인에게 인계한다.
“그래. 수고했다.”
조문현이 전화를 끊고는 환하게 웃는다. 김은철이 메시지를 확인한 후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인계받았습니다.”
“이제 거래도 끝났으니 한잔하시죠.”
“좋습니다.”
그때부터 술판이 벌어졌다.
큰 거래를 무사히 마쳤다는 생각 때문인지 술을 마시는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하하,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정광훈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술을 마시는 곳에도 화장실이 있었지만, 밖에 나가 담배라도 한 대 태울 생각이었다. 화장실에 가서 볼일을 마친 후 밖으로 나와 담배를 입에 문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깊게 빨아들이던 정광훈이 한 사람을 보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하하, 과장님 아니세요.”
“안녕하세요. 요즘 자주 뵙네요.”
인사를 받는 사람은 인호였다.
“양 실장님 따라오신 겁니까?”
인호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전에도 그랬지만 저희 대은과 어떤 관계십니까? 양 실장님 이곳에 계신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하, 오늘 양 실장님 이곳에 오신 이유가 바로 저와의 거래 때문이거든요. 양 실장님은 지금 안에서 한잔하고 계십니다. 담배 태우고 함께 들어가시죠. 저와 안면 있다고 하면 될 겁니다.”
인호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정광훈을 바라본다. 그때 누군가 인호에게 다가온다.
“정 과장. 아는 분이신가?”
“실장님, 나오셨습니까. 저분이 실장님과 술을 마시고 있다고 말을 해서 말입니다.”
“나하고?”
인호 옆에 선 남자가 정광훈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날 아신다고요? 죄송한데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정광훈이 떨떠름한 눈빛으로 남자를 바라본다.
“대은 그룹 기획조정실 양 실장님?”
“네, 맞습니다.”
조금 전까지 자신과 술을 마시던 사람이 대은 그룹 기획조정실장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인호의 옆에 선 남자와 생김새가 비슷한 것 같은데 조금 달랐다. 무엇보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대은 그룹 양 실장님 맞으십니까?”
“정 과장.”
“네, 실장님.”
“저 사람 뭐 하는 사람이야?”
“공 치다 몇 번 얼굴 마주친 사이입니다. 며칠 전에는 저희 그룹과 일을 준비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대은 그룹의 기획조정실장 양우민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런 말 들은 적 없는데?”
“저도 그래서 좀 의아했습니다.”
“이만 가지. 대리는 불렀나?”
“네, 실장님. 모시겠습니다.”
인호가 양우민과 함께 밖으로 나간다. 멍하니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정광훈이 담배를 던지고 안쪽으로 달려 들어간다.
탕-
요란하게 문을 열고 들어간다.
“어, 어디 갔어?”
룸 안에는 한 사람밖에 없다.
“조 사장. 정신 차려 조 사장.”
조문현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채 잠들어 있다. 분명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김은철을 비롯한 세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광훈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자신이 앉아 있던 곳에 놓인 가방을 연다.
“으아아아악!”
가방 안에는 종이 한 장이 들어있을 뿐이다.
-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하고, 혀로 흥한 자 결국 혀 때문에 망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