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꼭 그래야만 합니까?”
“복수의 대상이 한자리에 있는 것이 지키기 편합니다.”
인호의 말에 최정한이 잠시 생각을 하다 휴대폰을 든다.
“어, 나야. 민영이 데리고 집으로 와. 아니, 괜찮은 건 아니고. 그냥 일단 와.”
“잘하셨어요.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든 제가 지켜드릴 테니까요.”
최정한을 안심시킨 후 인호가 집 주변을 돌며 곳곳에 부적을 붙인다. 황동호에게 급하게 구해 온 부적들이다.
“그걸 붙이면 그 사악한 것이 집에 들어오지 못합니까?”
인호가 최정한을 바라본다.
“사악한 것이요? 선생님 집에 오는 존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신령한 존재죠.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산신령 아시죠?”
“네. 알죠.”
“그 산신령하고 비슷한 존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 존재라면 어째서 절 이렇게 못 살게 구는 겁니까?”
“그거야…….”
말을 하던 인호가 입을 닫는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결국 모든 일의 원인 제공은 최정한이 한 것이다. 오래된 한옥을 허물고 현대식 건물로 개조한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과정에서 건드려서는 안 될 존재를 건드리고 말았다.
“선생님도 따님에게 해코지하는 사람을 보면 화가 나시겠죠?”
“당연하죠.”
“똑같은 겁니다. 이 집터에 살고 있던 구렁이도 어떤 존재에게는 소중한 자식인 겁니다.”
인호가 조금 전에 붙여둔 부적을 보며 말한다.
“이 부적은 그 존재를 막지 못합니다.”
“그러면 붙여 봐야 별 효과가 없는 것 아닌가요?”
최정한이 불안한 듯 묻는다.
“그 존재에게는 소용없지만 다른 존재들에게는 효과가 있을 겁니다.”
“이제 제가 뭘 해야 합니까?”
인호가 어둑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한다.
“기다리면 됩니다.”
* * *
“여보. 저 사람 정말 믿어도 돼?”
“만신께서 추천해 준 사람이라니까.”
“정말?”
“그래. 만신께서 나한테 직접 전화를 주셨어. 실력 좋은 사람을 보낼 테니 말 잘 들으라고.”
최정한의 아내가 놀란 눈으로 정원에 앉아 있는 인호를 힐끔거린다.
“아빠. 나 친구 만나고 오면 안 돼? 오랜만에 집에 왔다고 친구들이 보자고 하는데.”
“안 돼!”
최정한이 딸에게 버럭 소리 지른다.
“왜 애한테 소리를 지르고 그래?”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절대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돼.”
인호에게 이무기의 복수 대상이 자신에게서 딸에게로 옮겨 갔다는 말을 들었다.
“그동안 학교도 못 가고 친구도 못 만났잖아.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안 된데도. 어젯밤에 커다란 구렁이가 집을 칭칭 감는 꿈을 꿨단 말이야. 절대 못 나가. 그냥 방에 들어가서 휴대폰 보고 있어.”
딸이 짜증을 부리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친구는 만나도 되지 않아?”
“안 된데도!”
최정한이 버럭 소리 지르며 몸을 돌린다. 얼마나 위험한 상황인지 모르는 아내와 딸이 답답할 뿐이다. 최정한이 정원에 앉아 있는 인호를 보며 기도를 하듯 눈을 감고 중얼거린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 * *
인호가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밤하늘을 바라본다.
꽉 찬 보름달이 하늘 중간에 걸려 있다.
“만월이로구나. 힘든 하루가 되겠어.”
이무기는 미호가 말한 것처럼 최정한의 딸, 최민영의 몸에 기운을 심어 두었다. 그 기운을 노린 악령들이 이곳으로 몰려들 것이다.
보름달이 뜬 날은 악한 것들의 기운이 가장 강해지기 마련이었다.
“첫 손님인가?”
인호가 활짝 열어 둔 문을 응시한다.
불길함을 가득 담고 있는 붉은 기운을 풀풀 풍기는 악령이 인호를 노려보고 있다. 얼굴 반쪽이 화상을 입은 듯 일그러진 악령이었다.
“썩 꺼져라.”
“설마 대사 연습이라도 하는 거야? 아니면 말을 맞춘 거야? 매번 이렇게 멘트가 똑같아.”
“미친놈이로구나.”
“내가 정상은 아니지. 긴말할 것 없이 빨리 들어와라.”
인호가 손을 까딱거리자 악령이 날카로운 괴성을 토해내며 날아든다. 인호가 주먹을 말아 쥐고는 악령의 손을 피한 후 얼굴에 꽂아 넣는다.
“꺄아악-!”
악령의 머리가 터져나간다. 붉은 기운이 흩어진다. 숨을 크게 들이쉰 인호가 고개를 살짝 비틀며 말한다.
“바쁘니까 순서 지킬 필요 없어. 빨리들 와.”
문밖에 수많은 악령들이 붉게 번들거리는 눈으로 인호를 보며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 * *
황동호에게 구해 온 부적 덕분에 악령들이 집으로 들어오는 길을 문 하나로 한정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몰려드는 악령들을 인호 혼자서 막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주먹으로 악령의 몸을 터트린 인호가 허리춤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길이가 70센티미터 정도 되는 목검이었다. 목검의 검면에는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도 황동호가 준 것이다.
- 벼락 맞은 오동나무로 만든 검이다. 벼락의 기운은 모든 삿된 것들과 상극이다.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것이나 부숴 먹거나 하면 정말 인연 끊는 줄 알아라.
인호의 눈에 푸른빛이 어리며 목검 역시 푸른빛을 흘려낸다. 좌우에서 한 번에 들이치는 악령들을 목검으로 벤다.
“크아악-!”
베인 악령들이 소멸한다. 빈자리를 다른 악령이 채운다. 소멸시킨 악령의 수가 벌써 열을 넘어갔다.
“무슨 악령이 이렇게 많아.”
한 지역에 이렇게 많은 악령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어쩌면 이무기가 먼 곳의 악령들까지 이곳으로 몰아넣었을 수도 있다.
“비켜라!”
대기가 파르르 떨릴 정도의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인호를 공격하던 악령들이 뒤로 물러선다. 길을 열어주듯 좌우로 벌려서는 악령들.
그리고 그 사이로 걸어오는 악령.
행색이 매우 특이하다. 커다란 투구에는 초승달 모양의 금속이 달려있고 나무를 덧대어 만든 듯한 갑옷을 입고 있다. 허리에는 두 자루의 검을 매고 있는데 딱 봐도 과거 일본 무장의 행색이었다.
“하다 하다 이제 사무라이냐?”
투구 안쪽에서 붉은 광채가 솟구친다.
“비켜라. 그렇지 않으면 벨 것이다.”
인호가 검으로 허공을 벤다.
“나도 그럴 생각이야.”
악령이 앞으로 내달린다. 어느샌가 악령의 손에 검이 들려 있다. 검이 인호의 목을 노린다.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의 속도다. 인호가 머리를 뒤로 젖히자 검이 허공을 베고 지나간다.
인호가 든 목검이 악령의 가슴을 찔러간다. 악령은 검을 회수해 인호의 목검을 쳐 낸다. 목검에서 푸른빛이 일렁이며 악령의 검 중간을 잘라낸다.
“으랏!”
악령이 반 토막 난 검을 인호를 향해 던진다. 인호가 목검으로 검을 쳐 낼 때 악령은 또 다른 검으로 인호의 가슴을 찔러온다.
인호의 가슴에 황금빛이 솟구치며 몸이 뒤로 튕겨 나간다.
“형님한테 밥 한 번 근사하게 사야겠네.”
악령의 칼에 찔린 곳에는 황동호에게 받은 호신부가 붙어있었다. 인호가 목검을 두 손으로 쥐고 앞으로 내달린다. 악령 역시 인호를 향해 검을 세우며 달려든다.
인호와 악령이 비켜 지나간다.
인호의 볼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광대 아래쪽을 살짝 베인 것이다.
“제법이네.”
인호가 몸을 돌린다.
사무라이 악령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점점 소멸되어 가는 자신의 몸을 내려본다.
악령이 소멸되자 인호가 뒤쪽으로 물러나 있는 악령들을 보며 말한다.
“들어와.”
* * *
열린 문 안으로 검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들어온다.
“악령으로 안 될 것 같으니 직접 오신 겁니까?”
이무기였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냐?”
“사람이 사람을 돕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고작 측은지심 때문에 제 목숨을 내놓는다? 과거에도 그렇지만 꼭 그런 이들이 존재했지. 마지막 경고다. 가거라. 잡지 않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생겨 먹길 이렇게 생겨 먹어서 말입니다. 이대로 물러나면 죽은 우리 아부지가 눈을 뜨고 일어나서 호통치실 겁니다.”
이무기가 고개를 흔든다.
“어쩔 수 없구나. 지금까지 쌓은 도력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너와 이 집에 사는 모든 인간들을 죽일 것이다.”
이무기의 몸에서 흉흉한 기운이 쏟아진다.
인호는 숨도 쉬지 못할 정도의 압력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목검을 꽉 움켜쥔다. 사악한 것들에 상극이라는 황동호의 말이 거짓은 아닌지 혼미한 정신이 조금은 맑아진다.
“죽어라.”
이무기가 인호를 향해 손을 뻗는다.
아니, 뻗으려 했다.
이무기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 한 여자가 서 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여자였다.
“팔미호.”
이무기가 씹어 삼키듯 중얼거린다.
“내가 말했지? 다시는 지리산 근처에 오지 말라고.”
미호가 싸늘한 음성을 내뱉는다.
“너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을 터.”
“알지. 네가 이러는 것 충분히 이해해.”
“이해한다면 상관하지 말아라.”
“나도 그러려고 했지.”
미호가 힘겹게 비틀거리는 인호를 힐끔 바라본다.
“미안한데 내가 약속한 게 있어서 말이야.”
“저 인간과 말이냐? 언제부터 네가 인간과의 약속을 지켰다고 그러는 것이냐?”
“참, 어이가 없네. 신수씩이나 돼서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야. 그게 인간과의 약속일지라도. 그리고 너도 약속했었잖아. 지리산 근처로 오지 않겠다고.”
이무기가 이를 꽉 깨문다.
“그래서 나를 막겠다? 내 새끼를 죽인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미안한데 틀렸어. 나도 네 새끼를 죽인 인간들은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해. 네가 그 인간들에게 뭘 해도 관심 없어. 하지만-.”
미호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인호를 바라본다.
“저 아이는 아니거든. 나는 저 아이를 지킬 거고…… 저 아이는 네 새끼를 죽인 인간들을 지킬 거야. 그러니까-.”
미호의 몸이 흐릿해진다. 그녀가 나타난 곳은 인호와 이무기 사이다.
“네 새끼의 복수를 하려거든 나 먼저 치워야 할 거다.”
“신수가 인간사에 관여하려는 것인가!”
이무기가 버럭 소리친다.
“그러는 너도 마찬가지잖아.”
“예전의 내가 아니다.”
이무기의 주변에 검은 안개가 피어오른다. 검은 안개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몸을 일으킨다. 곧게 세운 머리의 길이만 해도 5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대한 뱀이었다.
이마에는 두 개의 뿔이 돋아나 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 전에는 조금 싱거웠거든.”
미호의 주변에 붉은 안개가 피어오른다. 인간의 모습이 사라지며 꼬리가 여덟 개인 여우로 변한다. 미호의 주변에는 이글거리는 불덩이들이 빙빙 맴돌고 있다.
파충류 특유의 서늘한 소리를 내며 이무기가 검은 독 안개를 뿜어낸다. 이무기의 긴 몸이 미호의 몸을 감싼다. 이무기의 거대한 몸이 옥죄지만 미호는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평온한 음성으로 말하고 있다.
“한라산 사슴이 죽었다고 들었어. 온몸의 뼈란 뼈는 모조리 으스러지고 지독한 독에 당했다던데?”
미호의 음성이 서늘하게 변한다. 미호의 주변을 떠도는 불덩이가 빠른 속도로 이무기를 향해 날아든다.
“다른 이를 죽였다면 너도 죽을 수 있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