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인호는 황연주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연습실에 방문했다.
“연습실이 상당히 좋네요.”
“회장님 덕분이죠. 청담동에 이 정도 규모의 연습실에, 최고의 장인이 만든 피아노까지 갖추려면 상당한 돈이 필요해요.”
“제가 듣기로 회장님께서는 본래 황연주 씨의 친구분을 후원하셨다죠?”
“맞아요. 친구가 부탁해서 절 후원하기 시작하셨어요.”
죽은 친구를 떠올린 것인지 황연주가 서글픈 미소를 짓는다.
“경쟁 관계였던 것 아니었나요?”
“맞아요. 하지만 우리 둘은 친한 친구 사이였어요.”
“회장님께 듣지 않았다면 두 분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을 겁니다. 참가하는 콩쿨마다 대상을 다투는 최고의 재능을 지닌 두 사람. 하지만 한 명은 몸이 굳어가는 병에 걸리고, 다른 한 명은 눈이 머는 병에 걸렸네요.”
인호는 황연주의 반응을 살피며 묻는다.
“이연희 씨가 죽은 시기가 연주 씨가 이식 수술받기 전입니까? 아니면 후입니까?”
“연희가 죽기 전에 수술받은 거예요.”
인호는 황연주에게 안구를 기부한 이가 이연희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차피 죽을 것이기에 친한 친구를 위해 자신의 눈을 준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이식 수술 후에 죽었다면 인호의 예상이 틀렸던 것 같다.
“이식 수술 후 이연희 씨를 만난 적 있습니까?”
“네. 연희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제가 다시 피아노를 칠 수 있음을 알리고 싶었어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자던 약속을 지킬 가능성이 생긴 거니까요. 하지만 그때 연희는 상태가 더 악화돼서 면회가 불가능했어요. 고작 전화를 통해 목소리를 듣는 것이 전부였어요. 성대와 얼굴 근육에도 문제가 오는 바람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었죠.”
황연주의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픈 기억 꺼내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도 처음에는 연희가 제게 눈을 준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어요.”
인호는 이연희와의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우는 황연주를 뒤로한 채 몸을 일으킨다.
* * *
신성 전자 전무실.
“안녕하십니까. 정인호라고 합니다.”
“이대수요.”
이대수는 신성 전자의 전무이자 죽은 이연희의 아버지다.
“우리 연희 때문에 오셨다죠? 회장님께 연락받았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네, 물어보세요.”
“연희 씨와 황연주 씨가 친한 사이였던 것 아시죠?”
“물론입니다. 연주는 우리 집에도 자주 놀러 왔었습니다. 여유가 있는 우리 집과는 달리 연주의 집은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 피아노 연습도 자주 했죠. 연희는 연주가 자기와 친자매 같은 사이라며 제게 딸 한 명 더 생긴 거라고 이야기를 했었죠. 연희가 세상을 떠나기 전 회장님께 연주의 후원을 부탁한 이유도 그거죠.”
이연희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이대수를 바라본다. 이연희의 이야기를 할 때는 애잔함이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황연주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반응이 조금 다르다.
죽은 딸과 가장 친했던 친구이자 딸과 같은 꿈을 꾸었던 황연주이지 않던가.
“전무님. 혹시 말입니다. 황연주 씨를 미워하십니까?”
“…… 왜 그런 질문을 하시죠?”
“그냥요.”
“제가 연주를 미워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인호가 고개를 흔든다.
“회장님께 들으니 전무님은 바쁘다는 이유로 황연주 씨의 연주회에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정말 바빠서 가지 않으신 겁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겁니까?”
“정말 왜 이런 것을 묻는지 모르겠군요. 회장님 말씀 때문에 만나고 있긴 하지만 제가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실 거면 이만 돌아가시죠.”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이대수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하지만 그는 곧 걸음을 떼지 못하고 멈춰 섰다. 인호의 말 때문이었다.
“연희 씨가 연주 씨에게 안구를 기증했기 때문입니까?”
“…….”
이대수의 몸이 가늘게 떨고 있다.
“연희 씨가 죽은 시기가 연주 씨 안구 이식 수술받은 후라고 해서 아닌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자신을 대신해 꿈을 이어갈 친구를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해서 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오히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보고 싶지 않았을까요? 어차피 친구는 자신이 많이 아프고 추하게 변한 것을 아니까 말입니다.”
이대수가 천천히 몸을 돌린다. 그의 눈은 빨갛게 변해있고 눈물이 그렁하다.
“기증 센터의 담당자에게 물어도 기증자가 절대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을 했다고만 대답하더군요. 보통 그렇다고 하지만 연주 씨의 경우는 조금 다르지 않습니까? 연주 씨를 꼭 집어 기증을 한 거니까요. 연주 씨를 알던 사람이란 말이죠.”
“그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이대수가 다시 자리에 앉는다.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연주에게 안구를 기증한 것은 우리 연희입니다. 그것도 살아 있을 때 말이죠. 저도 연희가 곧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빠의 마음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결국 죽을 것을 알면서도 고통스럽게 안구를 빼내는 것을 찬성할 아빠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반대했죠. 하지만 연희는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절 설득했죠. 연주도 내 딸이라고 그러니 허락해 달라고. 자기 마지막 소원이라고.”
결국 눈물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흘러내린다.
“마지막 소원이라는데 뭘 더 어떻게 반대하겠습니까? 연주는 연희의 안구를 이식했죠. 처음에는 ‘그래. 연주도 내 딸이다. 이제 연희 눈까지 가졌으니 정말 내 딸이다’라고 생각하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안 되더군요. 우리 연희는 죽었는데 연희의 눈을 가진 연주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이 되어 반짝반짝 빛이 났으니까요.”
이대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자식을 낳아 키워 본 적은 없지만, 인호 자신도 그런 상황이라면 똑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연주의 연주회에는 참석하지 않은 겁니다. 연주를 볼 때마다 연희가 떠올라 많이 힘들었습니다.”
“이해합니다.”
“후우-. 오랫동안 가슴속에 담아두기만 했는데 이렇게 이야기하니 속이 시원합니다.”
이대수가 웃는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울고 있다.
“솔직히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
인호가 소파의 팔걸이를 톡톡 두드린다.
“고민이라도 있어?”
“응? 아니야.”
인호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사기꾼, 영감, 뚱보에게 이연희, 황연주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흐음-, 눈을 주었지만 그 눈으로 잘 나가는 걸 보니 배가 아팠나?”
“세상 사람들이 모두 너 같지는 않다.”
“아니.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 원래는 자기가 누렸을 영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인호가 사기꾼을 보며 고개를 흔든다.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런 이유라면 벌써 무슨 짓을 해도 했겠지.”
“친구를 위해 눈을 주고, 죽어서는 그 곁을 맴돌고 있다? 혹시 친구를 지켜주고 있는 것 아닐까?”
“지켜줘요?”
영감의 말에 인호가 의아한 듯 되묻는다.
“자기 눈을 줄 정도로 아꼈던 친구잖아. 죽어서 그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라면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친구가 잘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 그리고 알 수 없는 위험에서 친구를 보호하려는 것.”
“일단 확인을 좀 해야겠네요.”
인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나선다.
* * *
“네? 연희와 추억이 담긴 물건이요?”
“네. 그런 물건이나 연희 씨가 죽기 전에 사용했던 물건이요. 혹시 가지고 계신 게 있습니까?”
“많죠. 너무 많아서 몇 개라고 말을 못 하겠네요.”
“지금 몸에 지니고 계신 것도 있습니까?”
황연주가 왼손을 내민다. 그곳에는 얇은 은팔찌가 있었다.
“연희와 함께 산 팔찌에요. 그리고 이 머리핀은 연희가 사준 거고, 이 동전 지갑도 연희가 선물해 준 거예요.”
“혹시 연주회를 할 때마다 가지고 다니는 특별한 물건 같은 것 있지 않습니까?”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게 뭡니까?”
“연희가 유럽 여행을 갔다 사다 준 선물이 있어요. 작은 목각인형인데 연희는 그 인형이 날 지켜줄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연주회가 있을 때마다 그 인형을 가지고 가 피아노 위에 올려둬요.”
“그 인형 지금 어디 있습니까?”
“잃어버릴 수도 있어서 평소에는 집에 두고 연주회 때만 가지고 다녀요.”
인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연주 씨.”
“네?”
“저를 집으로 초대해 주시겠습니까?”
“설마 제 주위에 있다는 망령이 연희라고 의심하시는 거예요?”
“의심이 아니라 확신입니다.”
황연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그게 무슨 말이죠?”
“연주 씨 만나러 오기 전 연희 씨 아버님을 뵈었습니다. 연주 씨에게 안구 기증한 사람이 바로 연희 씨였습니다.”
“그 말…… 사실인가요?”
“아버님께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연주 씨가 수술하신 후 면회를 하지 못하신 겁니다. 자기가 안구를 기증한 것을 감추려 했던 것이죠.”
황연주는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다.
“집에 가 보면 알게 될 겁니다.”
* * *
“좋은 곳에 사시네요.”
한남동에 위치한 부자들이 모여 사는 동네였다.
“회장님께서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주차장에 차를 넣고 계단을 통해 정원으로 올라간다. 정원도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혼자 지내기에 너무 큰 집이기도 하죠.”
“부모님과 함께 사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같이 살자고 몇 번 말씀드렸는데 싫다고 하시더라고요.”
정원을 가로지를 때였다.
“어디 가세요?”
집을 향해 달려가는 인호를 보며 황연주가 외친다. 현관문 앞에 선 인호가 황연주에게 말한다.
“문 좀 열어주세요.”
“왜 그러시는데요?”
“일단 문 열어주시고 멀리 떨어지세요.”
집 안에서 강한 영적 기운이 느껴진다.
‘악령.’
악령의 기운이다.
황연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인호의 말대로 문을 열어주고 뒤로 물러난다.
집 안으로 들어간 인호가 거실로 빠르게 이동한다. 강력한 기운들이 충돌하고 있다. 인호의 눈에 마주 선 채 죽일 듯 바라보는 두 망령, 아니 한 망령과 악령이 보인다.
푸린 빛의 망령은 인호가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 눈이 없는 망령, 이연희였다.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에 선 악령.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지 너무나도 새빨갛다.
“멈춰!”
인호가 큰소리로 외치자 이연희와 악령이 약속이나 한 듯 고개를 돌린다.
- 꺼져!
악령이 큰소리로 외친다. 강력한 기운이 담긴 외침이다. 악령과 인호 사이에 있는 물건들이 하늘로 날아올라 벽과 바닥에 부딪혀 깨진다.
하지만 인호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도망쳐요.”
이연희가 다급히 외친다.
“이연희 씨. 할 말이 많은데 잠시 후에 하도록 하죠.”
인호가 악령에게 다가선다.
“선행을 쌓아도 극락에 가기 힘든데 너무 짙은 악에 물들었구나.”
“날 방해하지 마. 다 죽여버릴 거야.”
악령이 인호를 향해 손을 뻗는다. 인호의 눈에 푸른 기운이 일렁인다.
“네가 쌓은 악행만큼 더 고통받으리라. 그것이 하늘이 정한 법이니. 이제 심판을 받으러 가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