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 흥신소-129화 (129/190)

제129화

- 제16회 서울시장배 콩쿠르.

무대 위에는 한 여학생이 피아노를 치고 있었다.

관객들은 그 피아노 선율에 빠져 있는 듯 보였다.

“이번에도 연 자매 싸움이겠지?”

“그렇지.”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하지. 연 자매 아니면 누가 대상을 받아? 지금도 봐. 저 어려운 곡을 연주하면서 실수 한번 하지 않잖아.”

“실수? 눈 감고 피아노 치는 거 안 보이냐? 그냥 우리하고는 클래스가 달라.”

“아-, 인정은 하지만 얄밉기는 하네. 연 자매 때문에 매번 입상도 하지 못하고 이게 뭐야.”

이와 같은 대화는 심사위원석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연희 실력이 또 늘었네요. 지난번 콩쿨에서는 조금 부족한 부분이 보였는데 이제 그런 부분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어요.”

“조금 전 연주했던 연주도 대단했어요. 그런데 학생들 사이에서 연희하고 연주를 연 자매라고 부른다면서요?”

“매번 대상을 번갈아 차지하니 그런 별명이 생긴 것 같더라고요.”

무대 위 연주가 끝나고 피아니스트가 일어나 심사위원과 관객들을 향해 다소곳이 인사한다.

요란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온다.

무대 뒤로 걸어가는 피아니스트는 누군가 서 있는 걸 보고는 씨익 웃는다.

“나 오늘 어땠어?”

기다리고 있던 이가 엄지를 세운다.

“연희 너야 항상 최고지.”

“치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네. 연주 너야말로 최고지.”

사람들이 연 자매라 부르는 콩쿠르 대상 후보인 두 학생이었다.

“저번에는 네가 대상 받았으니 이번에는 내 차례야.”

“난 상관없는데 그게 어디 우리 마음대로 되니?”

황연주의 말에 이연희가 그녀의 어깨를 찰싹 때린다.

“말로라도 그러라고 해야지. 이따 오떡순 콜?”

“당연하지. 돈은 오늘 대상 받는 사람이 내기.”

“콜!”

* * *

오형민이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인호에게 보여준다.

“왼쪽이 연희, 오른쪽이 연주라네.”

“예쁘게 생긴 학생들이네요.”

“이제는 학생이 아니지. 자네 피아노 연주 좋아하나?”

“하, 하하. 음악은 뽕짝도 잘 듣지 않습니다.”

“그럴 것 같았네. 그래도 기회가 되면 취미를 붙여 보도록 해. 생각보다 괜찮거든. 마음이 복잡할 때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 차분해지지.”

“노력해 보겠습니다.”

오형민이 고개를 흔든다.

“말만 그렇게 하는 거 같은데. 그러면 이렇게 하지. 이틀 후에 연주 피아노 독주회가 있네. 거기 나와 함께 가자고.”

“제가요?”

“취미를 붙여 보라니까. 내가 연주도 소개해 주지. 보통 사람들은 만나고 싶어도 만나기 힘든 아이야. 한국에서 독주회 끝나면 협업 때문에 곧 미국으로 나가기도 하고.”

“말씀은 감사한데 괜찮습니다.”

“그냥 내 말대로 한 번 가 보게. 혹시 아나. 의외로 자네와 잘 맞을지.”

오형민이 계속해서 권하자 인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오신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니겠죠?”

“이유? 꼭 그런 것이 있어야 자넬 볼 수 있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요. 워낙 바쁘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지난번 일이 고맙기도 해서 밥 한 끼 대접하고 싶었네.”

“지난번 일이라면…….”

“병원 일 말이야.”

인호가 어색하게 웃는다.

음주 집도, 테이블 데스, 병원의 불명예.

따지고 보면 인호 때문에 신성 종합 병원의 명성이 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상처를 방치하면 결국 곪게 되어 있네. 그래도 두었다 더 큰 사고가 날 수 있어. 그 피해자가 내가 되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겠나?”

설마 신성 종합 병원에서 오형민을 상대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짓을 할 리 없다. 하지만 오형민의 말에 조금도 틀린 부분이 없었다.

“자네 덕분에 곪은 곳을 일찍 도려낼 수 있었어. 그 못난 놈 때문에 일 잘하던 그 애비가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어. 생각할수록 아주 괘씸한 녀석이야.”

“오늘 먹는 밥이 제대로 소화나 될까 모르겠습니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오형민이 먼저 자리를 떴다.

- 이틀 후 약속 잊지 말게.

오형민 회장은 가기 전에 인호에게 한 번 더 다짐을 받았다.

“요즘 좋은 일 많이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주위에서 회장님에 대한 칭찬이 많이 들리던데요.”

“하하, 모두 네 덕분이지.”

이철호가 개인 자산을 헐어 만든 ‘맑은 정기 되찾기 재단’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힘들게 살고 있는 독립유공자 가정을 돕고, 친일 행위를 하고도 뻔뻔하게 잘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해 조사도 한다. 이미 꽤 많은 성과를 내어 뉴스에서도 몇 번 보도가 되었다.

“이 기회에 장학 재단도 하나 만들 생각이야.”

“지출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전에 말하지 않았나? 나 정도 되는 사람은 재산 측정을 할 수 없어. 대화를 나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재산은 늘어가고 있거든. 강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낸다고 해서 표가 나겠어?”

“저도 조금 보탤까요?”

“하하, 벼룩 간을 내먹지. 아직 돈 쓸 곳을 찾지 못했나 보네. 그런 거야?”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고 돈도 써 본 사람이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좀처럼 돈 쓸 곳이 보이지 않네요.”

이철호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전에 말한 것처럼 좋은 집을 사는 것도 괜찮고, 지금 가지고 있는 건물 주변의 건물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 꼭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세를 싸게 내놓아도 좋은 일 하는 것 아니냐.”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나저나 이 양반은 왜 나만 쏙 빼놓고 너만 연주회에 초대한 거지? 크흠, 나도 피아노 연주회 좋아하는데 말이야.”

* * *

“소장님이 피아노 연주회에 가신다고요? 우와, 정말 너무 안 어울려요.”

“나도 잘 알거든.”

마음 같아선 지금이라도 약속을 취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최근 신성 종합 병원 일로 오형민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어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런데 황연주라니 대단해요.”

“왜 부럽냐?”

“전혀요. 소장님만큼은 아니더라도 저도 그런 쪽하고 거리가 멀거든요.”

“자랑이다. 그런데 뭐가 부러워?”

“황연주 피아니스트 엄청 유명하잖아요. 뉴스에도 자주 나오고 가끔 예능에도 출연하잖아요. 얼굴도 예쁘지, 돈도 엄청 잘 벌걸요. 전에 언젠가 미튜브 보는데 세계에서 유명한 부자가 황연주 피아니스트에게 공개 구혼을 하기도 했어요.”

“같이 갈래? 회장님께서 한 명 정도는 더 데리고 와도 된다고 하셨거든.”

이민정이 웃으며 몸을 돌린다.

“감사하지만 정중히 사양할게요. 그럴 시간 있으면 노래방 가서 맥주 마시면서 노래나 실컷 부를래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으며 사무실을 나선 인호가 건물을 벗어난다.

빵-

크락션 소리가 들리는 곳을 바라본다.

검은 세단 한 대가 서 있다. 뒷좌석 창문이 열리며 오형민이 손을 흔든다.

“기왕 가는 거 함께 가지.”

“제가 따로 가도 되는데 왜 오셨어요.”

“어차피 가는 길이지 않은가. 어서 타지.”

차 뒷자리에 오른다. 앞자리 조수석에는 오형민 회장의 비서실장이 타고 있었다. 눈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주변에 오형민을 경호하는 이들이 탄 차량이 몇 대 더 있을 것이다.

“자네 차 좋아하나?”

차가 출발하자 오형민이 묻는다.

“차요? 타는 차 말씀이시죠?”

“그렇지.”

“차 좋죠.”

남자치고 차에 관심 없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물으세요? 하하, 한 대 선물해 주시게요?”

“당연히 그러려고 물었지.”

인호가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든다.

“괜찮습니다. 농담이었습니다, 회장님.”

“나는 농담으로 물은 것이 아니야. 그리고 새 차를 사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혹시 내 취미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나?”

잠시 생각하던 인호가 ‘아’하며 탄성을 토해낸다.

오형민은 많은 나이에 맞지 않게 차를 모으는 취미를 갖고 있다. 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자신의 사유지에 경주 트랙을 만들기까지 했다.

오형민의 차 사랑은 상당히 유명했기에 인호도 들었을 정도다.

“내가 가지고 있는 차가 좀 많네. 이런 이야기하면 돈지랄한다고 욕먹을지도 모르지만, 그 차들 중 몇 년 동안 시동을 걸지 않은 차들도 있지. 물론 고용인들이 관리는 하고 있지만 말이야. 그냥 주차장을 채우고 있는 것보다는 누군가 사용하는 게 좋지 않겠나? 그래서 물어본 거야. 어떤 종류를 좋아하나? 스포츠카?”

인호가 고개를 흔든다.

“전 스포츠카는 영 그렇더라고요. 회장님이 보시기에도 저하고 스포츠카가 잘 안 울릴 것 같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어울리는 사람이 누가 있겠나. 뭐 스포츠카가 타고 다니기 불편하긴 하지. 그러면 내가 아무거나 골라 보내주도록 하겠네. 괜히 다시 돌려보낸다고 연락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미리 감사합니다.”

오형민이 선물로 줄 정도의 차면 굉장히 고가일 것이다. 하지만 부담이 된다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오형민에게 그 차량은 그저 수많은 수집품 중 하나일 뿐이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연주회가 열리는 세종문화회관에 도착했다.

“이 실장이 자리를 안내해 줄 걸세. 나는 연주회 시작 전에 연주를 잠시 만나보고 와야겠어. 자네는 연주회 끝난 후 소개해 주도록 하지.”

“하하,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피아노 연주회에 오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텐데요.”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

오형민이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 채 경호원들과 함께 멀어진다.

“이리로 가면 됩니다.”

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아 안으로 들어간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좌석 대부분을 채우고 있었다. 인호가 안내된 곳은 VIP석이었다.

“황연주 양 독주회 같은 경우 VIP석은 돈이 있어도 표를 구할 수 없습니다.”

“아-, 그래요?”

“외국에서도 황연주 양의 피아노 연주를 듣기 위해 많이 찾아오죠.”

몇 번이나 들었지만 황연주의 유명함을 새삼 느끼게 된다. 자리에 앉아 프로그램을 살피고 있을 때 오형민이 인호의 옆에 앉는다.

“어떤가? 자리 좋지?”

“네. 좋네요.”

“연주회가 시작되면 더 좋을 거야.”

오형민이 오늘 연주회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준다. 설명을 들어도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몰랐지만 일단 집중해 본다.

무대의 조명이 어두워지고 핀포인트 조명이 무대를 비춘다. 무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있던 그랜드 피아노 앞에 한 여자가 서 있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가슴에 손을 얹고 관객들을 향해 정중히 인사한다.

“어때? 내 말대로 예쁘지?”

“네. 아름다운 분이네요.”

황연주는 정말 아름다운 여자였다.

“피아노 연주 솜씨는 더 일품이지.”

곧 연주가 시작된다.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이 흐른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오형민이 인호를 힐끔 바라본다. 그의 미소가 더욱 짙어진다. 인호가 눈을 부릅뜨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황연주의 피아노 연주가 대단했던 것이리라.

오형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인호가 조용히 묻는다.

“회장님. 황연주 씨가 걸렸던 병이 뭐라고 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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