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 여보세요. 성환이냐?
쨍그랑-
입으로 향하던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서장님. 괜찮으십니까?”
업무적 미팅을 마친 후 간단하게 식사에 반주하던 중이다. 조한길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한 남자가 웃으며 전화를 받고 있었다.
“그래. 성환아. 그때 보자. 아니야, 성환아.”
“그- 마안!”
조한길이 버럭 소리친다.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조한길에게로 모인다. 조한길이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옆 테이블 남자를 쏘아보며 외친다.
“성환이. 성환이. 뭐 주위에 이렇게 성환이가 많아!”
오늘 하루만 성환이라는 이름을 열 번 넘게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나쁜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봐! 당신. 지금 전화하는 사람 이름이 성환이 맞아?”
“잠시만. 내가 조금 있다 다시 전화할게.”
전화를 끊은 남자가 인상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왜 시비 거세요?”
“시비? 시비는 내가 거는 게 아니잖아. 도대체 성환이가 누군데?”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성환이가 누군데요?”
“지금 통화하면서 그랬잖아. 성환이냐? 그때 보자, 성환아. 그랬잖아.”
“하아-.”
남자가 한숨을 토해낸다.
“아저씨, 미쳤어요? 내가 언제 성환이라고 했어요? 내 친구 이름은 진수거든요.”
남자는 자신의 통화목록을 보여준다. 그곳에는 ‘베프 진수’라고 적혀있다.
“방금 성환이라고 했잖아.”
“서, 서장님.”
함께 식사 중인 남자가 조한길을 조심스럽게 부른다.
“한 계장. 한 계장도 들었지? 방금 저 사람이 성환아, 성환아 했잖아.”
“저분은 분명히 진수라고 했습니다. 제가 들었습니다.”
한 계장의 말에 조한길이 멍해진다.
“아니야. 내가 분명히 들었어. 성환이라고 했다고.”
“아저씨. 왜 시비 거는지 모르겠고, 성환이가 누군지도 모르겠는데요. 가서 좀 쉬세요? 딱 봐도 당장 죽을 것 같은 꼴이잖아요.”
남자는 입맛이 떨어졌다는 듯 짐을 챙겨 떠난다.
“분명히 성환이라고 했어.”
조한길은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다.
* * *
택시에서 내려 아파트 내부를 걷는다.
“그래. 잠을 못 잤기 때문이겠지. 신경과민인 거야. 나는 괜찮아.”
택시를 타고 오면서도 잠들지 않기 위해 기사에게 라디오를 최고로 크게 틀어 달라고 했다. 자정이 넘어가는 시간의 아파트 내부는 고요했다.
가로등을 지나려 할 때였다.
“성환.”
“히익-.”
조한길이 경기하듯 몸을 떨며 소리 들려온 곳으로 몸을 돌린다. 가로등에 누군가 기대어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였다. 조한길은 또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겠거니 하고 남자를 지나치려 했다.
“윤성환.”
조한길이 몸을 획 돌린다.
“너 누구야?”
“왜 그러시는데요?”
“방금…….”
“방금 왜요?”
남자가 의아한 듯 말을 하자 조한길이 어색하게 웃는다.
“미안합니다. 내가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아 예민해진 것 같네요.”
남자의 반응을 본 조한길은 곧바로 사과하고 몸을 돌린다. 자신이 또 잘못 들은 것이리라. 그렇게 열 걸음 정도 떼었을 때.
“제대로 들은 것 맞아. 윤성환.”
조한길이 몸을 돌린다.
하지만 가로등 아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크아아아악-!”
모두가 잠든 시간 아파트 단지에 공포로 가득한 비명이 울려 퍼진다.
조한길이 비명을 토해내고 있을 때 인호는 가로등 뒤쪽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인호는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조한길을 지켜보고 있다.
“이래서 나쁜 짓 한 놈들은 두 발 뻗고 잠 못 자는 거다.”
* * *
조한길은 서장실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어젯밤 피곤을 견디다 못해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하지만 악몽은 꾸지 않았다. 이틀 동안 악몽을 꿀까 두려워 잠을 자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이틀 동안의 부족했던 수면을 보충하는 중이다.
똑- 똑-
누군가 노크했지만 조한길은 일어나지 못했다. 문이 열리며 몇몇 남자들이 서장실 안으로 들어온다.
“차- 암, 잘 하는 짓이네요.”
그 뒤로 따라 들어 온 소방서 관리자들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남자들 중 한 명이 조한길이 잠들어 있는 소파 옆으로 가서 말한다.
“조한길 씨.”
“…….”
대답은커녕 몸을 뒤척인 후 코까지 곤다.
“이 사람 안 되겠네. 지금 근무 시간 아닙니까?”
“마, 맞습니다.”
소방서 직원의 대답에 남자가 버럭 소리 지른다.
“국민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소방서에서, 그것도 가장 높은 직위에 있는 소방서장이 근무 시간에 이렇게 잠이나 자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남자의 목소리가 컸던 탓인지 조한길이 눈을 비비며 일어난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누구십니까?”
기지개를 켜며 일어서던 조한길은 한심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들을 보고는 의아한 듯 묻는다.
“서울중앙지검에서 나온 박재석 검사입니다.”
“거, 검사님이요? 검사님이 여긴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당연히 일하러 왔지요. 검사가 무슨 일 하는지 아시죠?”
“그거야…….”
“죄지은 사람 잡는 게 검사의 일입니다. 지금도 그 일 하러 왔고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시겠죠. 최 수사관.”
박재석 검사의 말에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선다.
“조한길 씨 당신을 업무상배임을 비롯한 다섯 가지 혐의로 긴급 체포합니다.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불리한 증언을 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수사관이 미란다 원칙을 읊을 때까지만 해도 조한길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었다.
박재석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한다.
“소방도구를 보관하는 곳을 보니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어떻게 10년도 더 된 방화복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겁니까? 구매내역 보니까 매년 새 물품들을 구매한 걸로 되어 있던데 말이죠. 지금까지 이곳 소방서의 소방관들은 매번 그런 쓰레기 장비를 착용하고 위험한 불 속에 뛰어들게 했던 겁니까!”
말을 하며 화가 난 것인지 박재석의 음성이 점점 커진다.
“저, 그게…….”
“이미 증거와 증인은 차고 넘칩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소리 할 생각 마세요. 그리고-.”
박재석의 눈빛이 차갑게 빛난다.
“작년 연말 화재 사건에서 순직한 윤성환 소방관님. 그분의 순직이 방화 장비의 노후나 그 밖의 이유와 연관이 있다면 당신은 정말 큰 벌을 받게 될 겁니다.”
박재석이 더 이상 보기도 싫다는 듯 몸을 돌린다.
“연행하세요.”
* * *
인호가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고 있다.
“당신 때문에 의인들이 죽어갔어. 억울해하지 말고 죗값 치르라고. 살아서 죗값을 치러도 결국 지옥행이겠지만.”
사람을 직접 죽이지 않았다 해도 조한길은 사람을 죽인 것과 같은 죄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분은 잘 떠나셨어요?”
“그래.”
윤성환은 저승사자와 함께 저승으로 떠났다.
“그런 분들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셔야 하는데.”
“누가 아니라니.”
“그래도 그분 덕분에 소방서 내의 비리들이 꼬리를 물고 밝혀지게 되었잖아요. 더 이상 피해를 보는 소방관님들이 없을 것 같아 다행이에요.”
인호가 혀를 찬다.
“민정아. 너는 아직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잘 모르는구나.”
“네? 무슨 말씀이세요?”
“이런 일이 있다 해도 결국 해 먹을 놈들은 다 해 먹는다는 말이야. 더 지능적인 방법으로, 악질적으로 해 먹을 거야.”
“에휴,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되는데 듣고 나니 기분이 더러워지네요.”
이민정이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 가방을 챙긴다.
“퇴근할게요.”
“그래. 오늘도 수고 많았다.”
“밥이나 같이 드실래요?”
“갑자기?”
“저 아니면 같이 밥 먹어 줄 사람도 없잖아요. 아-, 있구나.”
이민정이 소파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뚱보를 본다.
“나도 약속 있거든.”
“땡초 아저씨 만나러 가세요?”
“아니거든.”
“설마 여자?”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말 나온 김에 나도 나가야겠다.”
이민정이 차를 출발시키는 걸 확인하고 인호도 곧 차를 출발시킨다. 목적지는 청담동에 위치한 한정식 가게였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약속한 사람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약속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다.
“회장님도 계셨네요.”
오형민이 웃으며 어서 앉으라는 듯 손을 흔든다.
“철호한테 나도 끼워 달라고 졸랐네.”
이철호가 피식 웃는다.
“혼자 나오려고 했는데 어찌나 조르시던지. 괜찮지?”
“저야 당연히 괜찮죠. 그런데 요즘 회장님 바쁘신 것 아니었나요? 미국에 가신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요.”
오형민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랬지. 그런데 급하게 한국에 들어와야 할 일이 있어서.”
“정말 급한 일이셨나 봅니다.”
오형민이 미국에 간 이유는 미국 최고의 휴대폰 제작 업체와 반도체 수출 관련 계약을 맺기 위함이었다. 신성 그룹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계약이기에 오형민이 직접 미국까지 날아간 것이다.
“내가 손녀처럼 생각하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가 연주회를 연다네.”
“연주회요?”
“그래. 들어봤는지 모르겠네. 황연주라고.”
인호가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한다.
“유명하신 분인 것 같은데 저는 잘 모르겠네요.”
“아는 사람에게나 유명한 아이지.”
이철호가 오형민 대신 황연주라는 여자에 대해 설명해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피아니스트야. 나이도 이제 스물둘 밖에 되지 않았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이 인정하는 천재 중 천재지. 그 황연주 피아니스트를 오 회장님이 어렸을 때부터 후원해 주셨어.”
“그 아이를 후원하게 된 이유가 참 재미있네.”
인호가 궁금하다는 듯 바라보자 오형민이 입을 뗀다.
“원래 나는 다른 아이를 후원하고 있었어. 연주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아이였지. 우리 그룹 임원의 딸이었어.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둘 중 하나를 후원할 거면 그룹 임원의 딸을 후원해야 하지 않겠나.”
“황연주 씨로 후원을 바꾸게 된 동기가 있습니까?”
“이연희. 그 아이의 부탁 때문이었어.”
인호가 ‘이연희’라는 이름을 입안에 되뇌어 본다.
“연희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에 병에 걸렸어. 아주 유명하고, 또 악질적인 병이지. 루게릭병이라고 들어봤나?”
“네. 근육이 굳어가는 병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맞아. 손가락을 섬세하게 컨트롤해야 하는 피아니스트에게는 최악의 질병이라 할 수 있지. 연희는 결국 2년 만에 죽고 말았어. 연희가 죽기 전에 내게 부탁하더군. 자기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연주를 후원해 주면 안 되겠냐고.”
“선의의 라이벌 같은 것이었나 봅니다.”
“두 아이는 어린 시절부터 매번 부딪쳤어. 콩쿨에 나갈 때마다 항상 대상을 두고 다퉜지. 어느 때는 연희가, 또 어느 때는 연주가 대상을 차지했지. 피아노 콩쿨은 그 두 아이만을 위한 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정도야.”
인호가 대단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불행은 연희에게만 찾아오지 않았어.”
“네?”
“연주 그 아이도 아주 무서운 병에 걸려버렸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