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술 냄새가 났다고요?”
“네. 제가 찾아가서 물으니까 급한 일이 있다며 저를 피하더라고요. 남편이 왜 죽었는지 알려달라고 했을 뿐인데. 병원에서는 그저 안타까운 일이라고 같은 말만 반복하고요.”
“혹시 남편분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알 수 있을까요?”
“급성 맹장염이었어요.”
인호가 의아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본다.
“급성 맹장염이요? 맹장염이 죽을 정도로 위험한 병인가요?”
“아니요. 남편이 고통을 호소하고 곧바로 병원으로 갔어요.”
시간을 오래 끈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인호는 혹시 잘못 알고 있나 싶어서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다. 제때 치료를 하지 않으면 복막염으로 진행이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위험한 수술은 아니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알아볼 테니 연락처 남겨 주시고 오늘은 이만 돌아가세요.”
여자가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나간다.
“소장님. 이번 일은 그냥 정 검사님에게 부탁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요?”
“당연히 그래야지.”
이민정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정재훈이 처리를 하려고 해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신성 종합 병원은 이름 그대로 재계 서열 1위인 신성 그룹에 속해 있으니 말이다.
차라리 오형민 회장과 친분이 있는 자신이 나서는 편이 나을 것이다.
* * *
다음 날.
인호는 정재훈을 만나기 위해 서울중앙지검에 방문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런데 의료 사고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사망자의 아내 분이 의사에게서 술 냄새가 났다고 주장을 해도, 수술실에서 사용하는 소독용 알콜이라고 둘러댈 게 뻔하거든요.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오해했을 수도 있고요. 수술실에 들어간 사람들이 모두 병원 관계자인 것이 문제입니다. 누구도 병원 측에 피해가 가는 증언을 해 주지 않을 테니까요.”
볼을 긁적인 인호가 유 형사에게 말한다.
“남편이 사망한 날 집도했던 의사의 동선을 체크할 수 있을까?”
“그거야 제 전문이죠. 그 의사 이름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신성 종합 병원 소속 의사라면 이름만 알아도 그의 차량 번호나 휴대폰 번호를 어렵지 않게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재훈이 조심스럽게 말한다.
“의사가 술을 마신 후 음주 집도를 했다고 해도 조금 껄끄럽지 않겠습니까?”
“신성이기 때문에요?”
“네, 아무래도 그렇죠. 아실지 모르겠지만, 검찰에 신성 장학생들이 상당합니다. 그들은 검찰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고 있죠. 신성 그룹이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는 검찰에 출두조차 하지 않는 것도 모두 신성 장학생들이 힘을 쓰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현 총장님께서도 신성 장학생 출신이세요.”
인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글로벌 기업인 신성 그룹이지 않은가?
“일단 그분의 죽음이 병원 측 잘못이라는 증거를 확보하도록 하죠. 신성과 딜을 하는 것은 제가 하겠습니다.”
“신성 그룹과도 인연이 있는 겁니까?”
“네. 어쩌다 보니.”
정재훈이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인호를 바라본다.
“요즘 어떠세요?”
“자잘한 사건들 뿐입니다. 검사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인호 씨와 함께 굵직한 사건을 해결하던 때가 그립네요.”
“큰 사건이 없는 게 좋은 거죠.”
“그게 맞죠. 그렇지 않아도 주위에서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아요.”
“무슨 말씀이세요?”
인호가 의아한 듯 묻자 정재훈이 쓰게 웃는다.
“인호 씨 덕분에 제가 로열로드를 걷고 있지 않습니까? 최연소 차장 검사에 지검장 되는 거 아니냐고 수군대는 사람들 많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빨리 진급하는 걸 가지고 뭐라고 한다고요? 그런 사람들 눈치 볼 필요 있나요?”
“저도 인호 씨처럼 개인사업자라면 상관없겠지만 조직에 속해 있으니까요. 튀어나온 돌이 정 맞는 법 아니겠습니까.”
인호가 피식 웃는다.
“정 검사님은 그런 눈치 안 보실 것 같은데 의외네요.”
“저도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상사, 동료들 눈치 당연히 신경 쓰입니다.”
“하하, 검사가 평범한 직업이라고요? 농담이 많이 느셨네요. 아무튼 이번 일 좀 잘 부탁드릴게요. 어렵게 살고 있는데 남편마저 억울하게 죽었다면 밝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죠.”
* * *
“장택수 씨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온 것이 19시 43분입니다. 여기 보이시죠?”
유 형사가 CCTV 화면을 조정하며 말한다. 구급차가 응급 센터로 들어오고 있다.
“바로 수술실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여길 보세요.”
유형사가 노트북을 조작하자 다른 화면이 송출된다. 인호에게도 낯익은 장소, 신성 종합 병원의 지하 주차장이었다.
“하얀 외제 승용차 보이시죠?”
화면에 주차되는 차는 고가의 외제 승용차였다.
“이게 장택수 씨를 집도한 최명현의 차량입니다. 이때 시간이 19시 52분입니다. 최명현은 차에서 내려 곧장 수술실로 갔습니다.”
유 형사가 CCTV 화면을 조작한다.
화면이 계속 바뀌며 장택수를 집도한 의사 최명현이 보인다. 마지막 화면은 최명현이 수술실로 들어가는 화면이었다.
“최명현의 차를 역추적해 봤습니다. 차량으로 이동했을 때 20분 거리 안에 있는 CCTV들을 위주로 살폈죠.”
장택수가 구급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병원에 연락이 갔을 것이다.
병원에서는 전화를 받자마자 그날 당직 근무를 서는 최명현에게 전화를 했을 테고.
그 말인즉, 최명현은 병원에서 차량으로 20분 안에 이동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는 의미다.
유 형사가 조작할 때마다 노트북 화면이 바뀐다. 그 화면에는 어김없이 최명현의 하얀색 외제 승용차가 있다.
“이 근처에서 출발한 것 같습니다. 정확히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술집들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라 찾으려면 발품 좀 팔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때 듣고 있던 정재훈이 말한다.
“가장 간단한 방법이 있긴 합니다.”
“그게 뭐죠?”
인호의 물음에 정재훈이 노트북 화면에 보이는 최명현의 승용차를 가리킨다.
“저 차의 블랙박스 메모리를 확보하면 게임 끝이죠.”
“아-!”
“하지만 이미 최명현이 영상을 모두 지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블랙박스 영상을 요구하려면 정식 영장이 있어야 하고요.”
“신성 병원이 관련되어 있다면 영장이 나오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제가 걱정하는 게 바로 그겁니다.”
인호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렇다면 이건 제가 알아보도록 하죠.”
* * *
하얀 승용차가 한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 뒤를 따라 검은 승용차가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저 의사 돈 많은가 보네.”
“여기 비싼 곳이에요?”
“이 건물 왔으면 당연히 아네모네 왔을 건데 거기가 아주 많이 비싼 곳이거든.”
“아버지가 신성 그룹 계열사 사장이라고 합디다.”
“금수저 물고 태어난 의사 선생이셨고만.”
땡초와 함께 차에서 내린다.
“혹시 아네모네라는 곳에 아는 사람 있어요?”
“이쪽 관리하는 애가 흑기사라는 놈인데 안면이 있기는 해. 그런데 뭔가 부탁하고 할 정도의 친분은 아니야. 너도 알겠지만 사채 쪽하고 주먹 쪽이 썩 친한 관계가 아니거든.”
“일단 올라가 봅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간다.
“이게 누구십니까? 땡초 형님 아니세요.”
로비에 있던 다부진 체격의 남자가 땡초를 보며 아는 체한다.
“흑기사 오랜만이다.”
“그러게요. 한 5년 됐지요? 그때는 신세 많이 졌습니다.”
“하하, 아직 기억하고 있는 거야?”
“그 망신을 당하고 잊으면 씁니까? 덕분에 아주 좋은 경험했습니다.”
나누는 대화로 미루어 두 사람이 썩 유쾌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술 한잔하시러 오셨습니까? 아니지. 형님 요즘 손 씻고 가게 몇 개 운영한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형님 가게 두고 여기 오신 겁니까?”
“내 가게에서 마시면 술맛이 잘 안 나지.”
“그건 또 그렇습니다. 룸으로 가시죠. 손님들이 몰릴 시간이 아니라 애들이 많습니다.”
흑기사가 웨이터를 불러 뭔가 말하니 웨이터가 인호와 땡초를 룸으로 안내해 준다.
테이블 위에 술과 안주가 세팅되고 곧 아가씨들이 우르르 룸 안으로 들어온다.
“이야. 여기 물 좋네. 여기 에이스가 누구냐?”
땡초의 물음에 웨이터가 가운데 있는 여자를 쳐다본다. 땡초가 그 여자를 인호의 옆에 앉히고 자기도 여자 한 명을 고른다.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땡초가 웨이터에게 팁으로 10만 원을 주며 묻는다.
“우리보다 먼저 온 손님 있지?”
“네?”
“신성 병원 다니는 의사 양반.”
“아, 그분이요?”
“혼자 왔어?”
“아니요. 친구분들이 먼저 오셨습니다.”
“그 친구 여기 자주 오나?”
웨이터가 땡초를 힐끔 쳐다본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이다.
“내가 그 친구 아버지하고 좀 친하거든. 그 친구 아버지가 신성 화학 사장님이시잖아.”
“아-, 그러세요?”
“그 친구 아버지가 요즘 걱정이 많아.”
“자주는 아니고 한 달에 두세 번 정도 오세요.”
“그렇구나.”
인호가 웨이터에게 묻는다.
“혹시 2주 전에도 왔었습니까?”
“2주 전이요?”
인호가 지갑에서 오만 원권 네 장을 꺼내 웨이터에게 건넨다.
“잘 생각해 봐요. 2주 전 금요일이었어요.”
“잠시만요.”
웨이터가 인호가 준 돈을 챙기며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다 미안하다는 듯 인호를 보며 말한다.
“그날 제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쉬는 날이었습니다.”
“아, 그래요?”
인호가 아쉽다는 듯 말을 할 때였다.
“그날 그 오빠 왔었어요.”
의외의 곳에서 대답이 나왔다. 인호의 옆에 앉은 여자였다. 그녀는 인호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말을 이었다.
“그날 나도 그 오빠 있는 방에 있었거든요.”
“그래요? 혹시 그날 술 마시다 급하게 나갔어요?”
“그랬나? 아-, 맞아요. 전화 받더니 급하게 갔어요. 병원에서 전화가 온 것 같던데요.”
인호가 술을 마시자 여자가 입에 사과를 넣어준다. 인호가 은근한 투로 묻는다.
“그날 그 친구 술 많이 마셨어요?”
“그 오빠 술 엄청 마셔요. 자기 말로는 사람들 배 가르고 하면 스트레스 많이 받는다고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 거라고 하던데요.”
“그렇구나.”
땡초가 씨익 웃었다.
“그날 이후에 다시 왔을 때도 그 친구 방에 들어간 적 있어요?”
“왜 그러는데요? 그 오빠 뭐 잘못했어요? 얘기 들어보니까 실장님 아시는 분들이라던데. 경찰은 아니시죠?”
“네. 경찰 아니에요.”
“한 번 들어간 적 있어요. 그 오빠 친구 중 한 명이 꼭 절 지명하거든요.”
“그때 별말 없었어요?”
“무슨 말이요?”
인호가 술을 마신 후 별것 아니라는 듯 말한다.
“병원 이야기요.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거나 하는 이야기.”
“그런 건 없었는데……. 아, 조금 이상하긴 했어요. 다른 때하고 다르게 말도 없이 술만 엄청 마셨거든요.”
“잠시만요.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인호가 화장실로 가서 손을 닦은 후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검사님. 차량 블랙박스 확인할 필요 없을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