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 흥신소-113화 (113/190)
  • 제113화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으음-.”

    한 남자가 작두에 손을 올리고 왼쪽 새끼손가락 끝마디를 자른다. 고통에 인상이 와락 구겨졌지만, 비명을 내지르지는 않는다.

    기다리고 있던 남자들 중 한 명이 작두 앞으로 간다.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큭-.”

    남자 역시 새끼손가락 한 마디를 자른다. 남은 세 남자도 차례로 손가락을 자른다.

    처음 손가락을 자른 남자가 잘린 손가락들을 모아 헝겊으로 감싼다.

    “동지들. 우리들은 이 자리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목숨을 내놓을 결심을 하였네. 우리의 의지를 이곳에 적었으니 수결하시게.”

    남자는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를 손바닥 전체에 바른 후 넓게 펼쳐진 종이 위에 도장을 찍듯 찍는다.

    다른 이들도 차례로 자신의 이름이 적힌 곳에 피를 인주 삼아 수결한다.

    “곧 우리들의 의지를 저 간악한 왜놈들에게 알릴 때가 올 것이네.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 * *

    “좀 웃으세요.”

    사진사의 말에 다섯 남자는 억지로 웃어 보이려 한다. 하지만 웃는다기보다 인상을 찌푸리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적 기록이 될지도 모르는 사진입니다. 어렵더라도 좀 웃어 보세요.”

    다섯 남자가 다시 웃으려 시도해 보지만 결과는 마찬가지다.

    “에휴-. 안 되겠습니다. 웃는 건 포기하죠. 대신 비장한 표정을 지어보죠. 오-, 좋은데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눈앞에 쪽바리 새끼들이 몰려온다고 생각하고.”

    까득-

    누군가 이를 으스러져라 깨문다.

    소총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다섯 남자는 당장이라도 누군가를 씹어먹을 듯 비장한 표정을 짓는다.

    펑-

    카메라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사진사가 환하게 웃는다.

    “최고입니다.”

    * * *

    호롱불의 불빛이 바람에 흔들거린다.

    “흐음-. 양 동지.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소?”

    “그렇습니다. 한 대장 동지. 그날 일본군 만주군부 사령관이 행사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폭약은 어떻게 되었소?”

    “일본군에 심어 둔 첩자에게 구해두었습니다.”

    한 대장이라 불린 남자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책상 위에 펼쳐진 종이는 동지들이 결행의 의지를 담아 손가락을 자른 후 피로 수결한 문서였다.

    문서의 내용은 단순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이름을 적고 수결한 이들은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건 내일 상해 임시정부로 보낼 거요. 우리들은 그날 모두 죽겠지만 후대는 우리를 기억해야 하지 않겠소.”

    “아닙니다. 죽는 것은 저와 동지들의 몫입니다. 한 대장 동지는 살아남으셔야죠. 아직 하셔야 할 일이 많습니다.”

    “하하, 형제 같은 동지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나 혼자 살아남으라고요? 안 됩니다. 지금까지 그랬듯 선봉은 제 몫입니다. 대장이 되고 싶으십니까?”

    “절대 아닙니다.”

    “하하, 그러니 절대 양보 못 합니다.”

    양형우는 바보처럼 선하게 웃는 한 대장을 바라보다가는 저도 모르게 그와 닮은 웃음을 짓는다.

    “다시 한번 계획을 점검해 봅시다. 앞으로…….”

    작전의 날짜와 침투 계획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타탁-

    한 대장이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젖힌다.

    “누구냐?”

    하지만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 대장 동지.”

    “기척이 느껴졌는데 말입니다.”

    주위를 살핀 한 대장이 창문을 닫는다.

    “기분 탓인 모양이오. 요즘 내가 많이 긴장했는지 민감해진 것 같아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오늘은 이만 쉬십시오.”

    양형우가 한 대장에게 인사를 한 후 밖으로 나온다. 숙소로 가려던 양형우는 조금 전 한 대장이 열었던 창문가로 간다.

    “이건-.”

    하얀 헝겊을 들어 올린다.

    - 고향에 있는 정혼자가 날 지켜 줄 거라며 준 거다.

    나이가 같아 친구로 지내는 이의 손수건이었다.

    * * *

    탕-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고개.

    “한 대장 동지!”

    양형우는 벽에 기댄 채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는 한 대장을 보며 울부짖는다.

    “대-, 쿨럭-.”

    한 대장의 입에서 피가 울컥 넘어온다.

    “대한- 독립…….”

    어떻게든 남은 힘을 쥐어짜 손을 들어 올리려 한다. 하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만다.

    양형우는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일본 군인들을 죽일 듯 쏘아본다.

    어차피 자신은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한 대장이 마지막까지 하고 싶어 했던 말. 그 말을 대신해 줘야 한다.

    “대한 독립-!”

    탕- 탕- 탕-

    연이어 울려 퍼지는 총소리.

    양형우가 두 손을 번쩍 치켜든다.

    “만-, 쿨럭-. 만세.”

    양형우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쓰러진다. 어떻게든 한 대장 곁으로 가기 위해 바닥을 기어본다. 하지만 그럴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눈동자를 돌린다. 일본 군인들 뒤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인다. 며칠 전 한 대장과 대화를 나눌 때 창밖에 손수건을 떨어트리고 간 남자다.

    마지막 숨을 토해내며 양형우가 눈을 감을 때 본 것은 환하게 웃는 남자의 얼굴이었다.

    * * *

    “그 더러운 배신자를 입에 담지 말라!”

    버럭 호통치는 양형우.

    그에게 들은 감춰진 이야기에 인호가 답답한 듯 깊은 한숨을 토해낸다.

    “일본군에 동지들을 팔아먹은 이가 바로 이세진입니까?”

    “그렇다. 그 작전을 알고 있는 것은 나와 한 대장 동지뿐이었다. 그날 이세진은 창밖에서 우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인호가 주변을 살핀다. 곳곳에 CCTV가 보인다.

    “일단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양형우가 고개를 끄덕인다.

    사진 앞에서 너무 오래 있으면 미술관 측에서 오해할 수도 있었다.

    양형우와 함께 밖으로 나간다. 입구에는 미술관의 큐레이터 정소희가 기다리고 있다.

    “관람은 잘하셨나요?”

    “네. 덕분에 즐거운 시간 보냈습니다.”

    인호는 그 자리에서 한얼 미술관 계좌로 10억 원을 이체했다.

    “기부 확인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곳에 쓰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좋은 일을 한 것 같아 기분이 좋네요. 좋은 밤 되세요.”

    정소희에게 인사한 후 주차해 둔 차에 올라탄다. 조수석에는 양형우가 앉아 있었다.

    “일단 제가 지내고 있는 곳으로 가시죠.”

    차를 출발시킨다.

    “그 뒤로는 어떻게 됐습니까?”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동료를 일본군에 넘긴 배신자, 조국을 팔아먹은 매국노는 독립투사가 되었고 그 자손들은 주위의 칭송을 받았지. 하지만 나는 배신자, 매국노가 되었고 내 후손들은 매국노의 후손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았다.”

    미술관 직원이 비하인드 스토리라며 말해주었던 배신자.

    정확히는 이세진이 배신자라는 누명을 씌운 이가 양형우였던 것이다.

    “그 가증스러운 배신자는 우리들이 모두 죽자 상해 임시정부로 갔다. 그곳에서 영웅 행세를 했지. 임시정부에 머물며 그곳에서도 정보를 팔아먹는 매국 행위를 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하자 배신자는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물려받았다.”

    적산 불하.

    이세진은 일본이 국내에 설립한 기업이나 부동산 등을 차지했다. 상해 임시정부의 보증이 있었던 탓인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배신자는 재산을 조금씩 불릴 때마다 사진을 꺼냈지.”

    손가락을 자르고 동지들이 다 함께 찍은 사진.

    “가증스럽게도 사진을 보며 이렇게 말했어.”

    - 이 모든 것이 너희들 덕이다.

    다른 동지들은 모두 저승으로 떠났지만 홀로 남아있었던 양형우는 사진 속에서 이세진이 행한 모든 일을 보고, 그가 한 모든 말들을 들었다.

    인호가 묻는다.

    “바로잡을 방법이 없겠습니까?”

    * * *

    - 또냐?

    - 네.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한숨을 섞어 대답하던 아들을 떠올리니 서러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양 씨. 무슨 술을 그렇게 마셔?”

    양호성은 집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안주라도 먹어가면서 마시던가. 그러다 속 버려.”

    “괜찮아요.”

    양호성이 쓰게 웃는다.

    아들이 공무원 시험을 봤다. 공부 머리가 있어 이론은 합격했다. 하지만 면접에서 떨어졌다.

    벌써 두 번째였다. 아니, 대기업 입사 면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얼굴도 모르는 조상님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자신이야 배움이 길지 않아 손에 기름때를 묻히고 살아왔지만, 아들은 공부를 참 잘했다.

    좋은 학원에 보내주지도 못했는데 스스로 노력해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 대학에 진학했다.

    그런 아들이 취직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있었다.

    서류나 필기는 수월하게 통과했지만, 면접을 보기만 하면 번번이 떨어졌다.

    아들은 대기업 취업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을 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시험 점수는 항상 합격선이었지만 면접에서 떨어지는 것이다.

    이유야 뻔했다.

    아들이 얼굴도 보지 못한 증조할아버지의 매국 행위 때문이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양호성이 소주를 비운다.

    “다른 친일파 후손들은 떵떵거리고 잘만 산다는데 전 이게 뭡니까? 착한 놈이 아비 원망도 할 만한데 지 혼자 힘들어합니다. 정말 미쳐버릴 것 같습니다.”

    양호성이 다시 잔을 채우고 단숨에 비운다.

    “양 씨. 평소답지 않게 오늘 왜 이래? 정말 걱정돼서 그러는 거니까 오늘은 그만 마셔.”

    “아닙니다.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거든요. 사장님.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든 겁니까?”

    “양 씨만 힘들겠어? 다 힘들지. 나도 힘들고.”

    “아들 녀석한테 못난 아빠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되네요.”

    “양 씨가 아들한테 잘하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알지. 민찬이가 뭐라고 해?”

    양호성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아니에요. 차라리 절 원망했으면 좋겠어요.”

    * * *

    “소장님. 어디 가는 거예요?”

    “돈 쓰러.”

    “우리 지금 백화점 가는 거예요?”

    인호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이민정을 바라본다.

    “그러면 차 사러 가요?”

    “내가 차를 왜 사?”

    “그러니까 우리 어디 가냐고요.”

    “가보면 알아. 아참, 넌 못 들어가겠다.”

    인호가 피식 웃는다.

    “미술관에 더 기부하려는 거 아니었어요?”

    “그랬는데 안 하려고. 아니, 이미 했구나. 10억 아까워 죽겠네.”

    “좋은 곳에 쓴 거잖아요.”

    “좋지 않은 곳이더라고.”

    이민정이 놀란 듯 묻는다.

    “혼자 가서 무슨 일 있었나 보네요.”

    “궁금해도 좀 참아. 곧 다 알게 될 거다.”

    그렇게 한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안산이었다.

    - 목적지에 도착하였습니다. 안내를 종료합니다.

    네비게이션이 안내한 곳은 지은 지 오래된 빌라였다.

    “여기 아는 분이 사세요?”

    “이제부터 알아가야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인호가 차에서 내려 빌라 안으로 들어간다.

    딩동-

    303호 앞에 선 인호가 초인종을 누른다.

    -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대은 그룹 기획조정실 소속 정인호 과장이라고 합니다. 양민찬 씨 댁 맞습니까?”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보인다.

    50대로 보이는 남자가 의아한 듯 인호에게 묻는다.

    “대은 그룹이요?”

    “네. 여기.”

    인호가 대은 그룹 명함을 꺼내 건넨다.

    “대은 그룹에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혹시 양민찬 씨 댁에 계신가요?”

    “네. 있기는 한데.”

    인호가 환하게 웃는다.

    “2년 전에 대은 그룹에 입사 원서 넣으셨죠?”

    “그랬나요? 대기업 여기저기에 넣은 것으로 알고 있기는 합니다.”

    “맞습니다. 2년 전에 지원하셨습니다. 그때 인사과 직원이 큰 실수를 했네요.”

    “실수요?”

    양호성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인호를 바라본다.

    인호가 환하게 웃으며 말한다.

    “아드님이 합격하셨는데 직원의 실수로 불합격으로 통보되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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