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락 흥신소-111화 (111/190)
  • 제111화

    남자가 순간 움찔한다. 하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음을 옮긴다. 인호가 씨익 웃는다. 분명히 남자가 반응을 보였다.

    인호가 걸음을 옮긴다. 뒤쪽에서 전해지는 기척에 남자의 걸음이 빨라진다.

    “그리 가 봐야 도망 못 칠 텐데.”

    휴대폰을 꺼내 이민정에게 전화한다.

    “물고기 가신다 그물 잘 치고 있어라.”

    - 라져!

    “악! 당신 누구야!”

    남자의 외침이 들려온다.

    골목 입구에 가 보니 남자가 바닥에서 버둥거리고 있다. 그런 남자의 한쪽 팔이 이민정의 다리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으악. 아파-!”

    인호와 눈이 마주친 이민정이 입모양으로 ‘암바’라고 한다.

    “잘하네. 이제 놔줘도 돼.”

    이민정이 팔을 풀어주자 남자가 몸을 일으켜 도망치려 한다. 하지만 이미 인호가 그의 손목을 낚아챈 후다.

    “도민재 씨.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세요?”

    “저, 저는 도재민이 아닙니다.”

    “하하하. 아이쿠, 이런. 나는 분명히 도민재 씨라고 불렀는데. 도재민은 또 누구래요?”

    남자, 도재민이 몸을 부르르 떤다.

    “겨, 경찰입니까?”

    “경찰은 아닌데 곧 경찰이 올 거예요.”

    인호에게 연락받은 정재훈과 유 형사가 어제 늦은 저녁에 주문진에 내려와 있었다. 지금은 모텔에서 자고 있을 것이다.

    “민정아. 검사님께 전화 드려라.”

    “네, 소장님.”

    잠시 후, 푸석한 얼굴의 정재훈과 유 형사가 달려온다.

    “인호 씨.”

    인호가 잡고 있는 도재민을 보고는 묻는다.

    “이 사람입니까?”

    “네.”

    “도재민 씨 되십니까? 전 서울중앙지검 특수 5부 부장검사 정재훈입니다.”

    “…….”

    “도재민 씨 맞으세요?”

    “…… 네.”

    정재훈이 뒤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한다. 유 형사가 앞으로 나와 도재민에게 수갑을 채운다.

    “도재민 씨는 사기죄로 긴급체포 되신 겁니다.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유 형사가 도재민을 데리고 간다.

    “돈은 찾았습니까?”

    “이제부터 찾아봐야죠.”

    정재훈과 이민정을 데리고 도재민의 집으로 올라간다. 집 앞에 도착한 인호가 유 형사에게 전화한다.

    “집 번호 뭔지 물어봐. 응, 그래.”

    띠- 띠- 띠-

    도재민이 알려준 번호를 누르니 문이 열린다. 신발장에 서서 거실을 살핀다. 상자는 보이지 않는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간다. 방이 두 개였는데 두 곳 모두 상자는 보이지 않는다.

    장롱도 없고 상자를 숨길 만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정말 다른 곳에 숨겼나?”

    인호가 중얼거릴 때 이민정이 자신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다. 엄지와 새끼를 좌우로 최대한 벌린 후 천정에 붙이려고 한다.

    “뭐하냐?”

    “조금 이상해서요.”

    “뭐가?”

    “무슨 집이 이렇게 천장이 낮아요? 검사님은 조금만 더 컸으면 그냥 머리가 닿았겠는데요.”

    인호와 정재훈의 눈이 마주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의 장판을 뜯어낸다.

    “하, 하하.”

    장판 아래 오만 원 묶음이 빼곡하게 깔려 있었다.

    “제법 머리를 썼네요.”

    인호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덮여 있는 이불을 걷어낸다.

    “와우-.”

    정재훈이 감탄을 토해낸다. 매트리스가 있어야 할 자리에 돈뭉치가 깔려 있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바깥 골목에 누가 매트리스를 버렸더라구요. 완전 새 건데 말이죠.”

    정재훈이 피식 웃는다.

    “여기 있는 돈이 천억이 넘는다죠?”

    “네.”

    “마귀하고 내기를 하셨다고요.”

    “그것도 맞습니다.”

    정재훈이 잠시 주위를 살핀 후 조용히 말한다.

    “인호 씨. 이렇게 하죠. 여기서 구백억 빼세요.”

    “무슨 말씀이세요?”

    “내기에서 이겼는데 보상은 받으셔야죠.”

    “사기 친 돈인데 그럴 수 있나요.”

    “그러셔도 돼요. 어차피 국고 환수되면 눈먼 돈이 될 겁니다. 어떤 놈이 꿀꺽할지 몰라요. 차라리 그럴 바에는 인호 씨가 갖고 좋은 곳에 쓰세요. 어차피 마귀도 다른 곳에 말하지 않을 거 아닙니까.”

    “도재민이 있지 않습니까.”

    정재훈이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그 사람은 오히려 금액이 줄어들면 좋아할걸요. 그만큼 형량이 줄어들 테니까요. 도재민과 그 일당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도…….”

    “괜찮다니까요. 인호 씨 참 이상한 거 알아요? 다른 사람들은 돈을 더 많이 가지려고 아웅다웅하는데 왜 가지라고 해도 그러세요.”

    인호가 매트리스 대신 잔뜩 쌓여 있는 돈다발을 보며 피식 웃는다.

    “제가 원래 간이 좀 작아서요. 하하하.”

    * * *

    “소장님.”

    “응?”

    “돈 많이 버셨잖아요. 그 돈으로 뭐 하실 거예요?”

    “글쎄. 아직 생각 안 해봤는데.”

    마귀는 약속을 지켰다.

    자신의 패배를 순순히 인정하고 아들 송종수의 친구들이 사기 맞은 금액을 대신 지불해 주었다.

    정재훈 역시 사기꾼 일당들에게 사기 친 금액이 2백억이 조금 넘는다고 입을 맞추게 했다.

    함부로 입을 놀리면 마귀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른다고 협박했다고 한다.

    마귀에게 끌려가 고초를 겪은 이들이었기에 그 말을 찰떡같이 믿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렇게 해서 인호에게 9백억 원이 생겼다.

    “소장님. 이 주변 건물들 모조리 다 사버리죠.”

    “모조리 사서 지하를 뚫어 다 연결시켜 놓는 거예요. 극락 흥신소를 완벽한 아지트화시키는 거죠. 어때요? 멋진 생각이죠?”

    “그래. 멋진 생각이네. 그런데 생각만 해.”

    “당장 어디 쓸 곳도 없잖아요.”

    “돈이 없지 설마 쓸 곳이 없겠냐?”

    “그건 그렇네요.”

    이민정이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본다.

    “오늘은 또 뭘 보고 있냐?”

    “주문진에서 봤던 마법사 있잖아요. 그 영상 다시 보고 있어요. 봐도, 봐도 신기해요.”

    “신기하긴 하더라.”

    “그런데 댓글 보는데 마법사가 우리나라 사람인 것 같다네요.”

    “우리나라에 마법사가 있다고?”

    인호가 알기로 몇 안 되는 소수의 마법사들 중 대부분은 유럽에 있었다.

    동양인, 한국인이라고 해서 마법사가 되지 말란 법은 없지만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은 지금까지 들은 적이 없었다.

    “정말 우리나라 사람이면 나중에 부탁 한번 해 봐야지.”

    “뭘 부탁하려고?”

    “저 한번 잘라보라고요. 상체와 하체가 나뉘는 기분은 어떤 건지 느껴보고 싶어요.”

    인호가 헛웃음을 지으며 이민정을 바라본다.

    “그게 대체 왜 궁금한데?”

    “그런 경험해 보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어요?”

    “그런 경험을 해 보고 싶은 사람은 몇 명이나 있겠니?”

    이민정이 씨익 웃는다.

    “일단 한 명은 확실하죠.”

    * * *

    돈이 없어도 걱정, 돈이 많아도 걱정이라는 말이 있다.

    인호는 많은 돈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 중이다.

    “돈도 써본 놈이 쓴다고 너는 평생 가도 그 돈 다 못 써.”

    사기꾼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찬다.

    “이거 왜 이래? 내가 얼마 전에 하루에 60억도 쓴 사람이야.”

    “그게 쓴 거냐? 준 거지.”

    박수 박갑수와 만신 이혜옥에게 30억 원씩 보내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보니 광혜원 아이들에게 쓰라고 박주완에게 30억을 준 적도 있다.

    “그러네. 준 거네.”

    인호가 피식 웃는다.

    “좋은 데 썼으면 됐지.”

    “그렇게 살다가 갈 때 뭐가 남겠냐?”

    “적어도 이 건물은 남지 않을까?”

    인호가 어깨를 으쓱하자 사기꾼이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본다.

    “5억 주고 산 건물 가지고 잘난 척은.”

    “이 건물 시가가 얼만 줄이나 알고 그런 소리 하냐? 이 건물 엄청 비싸.”

    “됐고. 오늘은 무조건 이철호 회장 만나.”

    “갑자기 회장님은 왜 만나?”

    “내가 말했지. 돈도 써본 놈이 쓰는 거야. 가서 돈 쓰는 법 좀 배우고 와.”

    “배울 게 없어서 돈 쓰는 법을 배우냐?”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법이다. 쉰소리 그만하고 얼른 이철호 회장한테 같이 밥이나 먹자고 그래.”

    옆에서 보고 있던 영감이 한마디 거든다.

    “사기꾼이 오랜만에 옳은 소리 하네. 인호야. 나도 같은 생각이다. 이제 너도 널 위해 쓰는 법을 배워야 해. 평생 그렇게 살면 누가 알아주니? 정 검사, 유 형사가 알아주겠지. 그래. 박 신부나 다른 사람들도 알아주긴 할 거야. 그런데 생각하면 너무 서글프지 않냐?”

    “별로…….”

    “그냥 가. 결국 너한테도 다 도움이 될 거야.”

    “그래요, 소장님. 혼자 가기 싫으면 제가 같이 가 드릴게요. 저도 돈 쓰는 법 좀 배우고 싶거든요.”

    이민정이 생글생글 웃으며 말한다.

    “미안한데 민정아. 넌 쓰는 법 보다 모으는 법을 먼저 배워라. 어떻게 월급 받고 일주일이 안 돼서 월급을 다 쓸 수가 있어? 니가 재벌 집 자식이야?”

    “다 필요한데 썼거든요.”

    “출퇴근하라고 차 사줘. 출근하면 식대 다 지급해. 운동하라고 체육관 끊어줘. 도대체 어디에 돈을 쓰는 거냐?”

    “흥! 소장님이 모르는 여자들만의 소비문화가 있는 거예요.”

    “아이고, 그러셨어요? 그런 와중에 또 돈 쓰는 법을 배우겠다고? 됐고. 일이나 열심히 해라.”

    * * *

    “돈 쓰는 법을 배우고 싶다고?”

    “네, 회장님.”

    이철호가 흥미롭다는 듯 인호를 바라본다.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지?”

    “어쩌다 보니 감당할 수 없는 큰 돈이 생겼거든요.”

    “신성 오 회장님 일해주고 돈을 많이 받았나 보네.”

    “그 돈은 이래저래 써서 얼마 안 남았습니다.”

    “호오-. 어디서 많은 돈이 생겼을까?”

    인호가 이번 사기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흥미롭다는 듯 인호의 이야기를 듣던 이철호가 9백억 원이 생겼다는 대목에서는 크게 웃기까지 한다.

    “나하고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군.”

    “회장님도 그런 고민 하세요?”

    “자네와는 조금 다른 고민이지. 나는 돈이 아주 많아. 그리고 돈 쓰는 법도 잘 알지. 그런데 이 많은 돈을 물려주고 갈 사람이 없네.”

    “아-!”

    이철호가 쓰게 웃는다.

    “내가 가진 돈을 죽기 전에 다 쓸 수 있을까?”

    이철호가 인호의 잔을 채워준다.

    “이 술 한 병에 2천만 원이 넘어. 이 술을 하루에 열 병 마시면 2억이지? 그렇게 1년 내내 흥청망청 해봐야 7백억이야. 누가 들을까 무섭지만 7백억은 내 재산에 작은 상처도 내지 못해.”

    “확실히 고민할 만하시네요.”

    자신과는 다른 고민이지만 이철호의 고민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확실히 돈이 많아도 고민, 적어도 고민이네요.”

    “하나 추천해 줄 만한 거라면.”

    “그게 뭔가요?”

    “아주 좋은 집을 한 채 사게.”

    “집이요? 집이라면 지금도 나쁘지 않은데요. 아실지 모르지만 제가 무려 건물줍니다. 건물주.”

    이철호가 껄껄 웃는다.

    “들어서 알고 있네. 그런데 내가 말하는 집은 조금 다른 의미야. 자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라는 뜻이야. 잘은 모르지만 자네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 평범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겠지?”

    “네. 그렇죠.”

    “그들이 잠시나마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줘. 공돈이 생겼다고 돈지랄하라는 뜻이 아니야.”

    “어떤 의미로 하시는 말씀인지 알 것 같습니다.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겠는데요. 회장님 사시는 집은 얼마나 하죠?”

    “팔 생각은 없는데 한 2백억 정도 한다고 하더군.”

    “와우-.”

    집 한 채에 2백억 원이나 한다는 말에 인호가 혀를 내두른다.

    “요즘 한 가지 고민이 더 있네.”

    “고민이 많으시네요. 어떤 고민이신데요.”

    이철호가 빙긋 웃으며 말한다.

    “아들 삼고 싶은 녀석이 생겼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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