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정재훈의 도움을 받아 사기꾼 일당 중 잡히지 않은 한 명인 ‘도재민’에게 전국 수배를 내렸다. 무슨 배짱인지 송양호는 경찰이 도재민을 잡아도 인호가 잡은 것으로 인정해 주겠다고 했다.
“야.”
소파에 앉아 귀를 후비고 있던 사기꾼이 인호를 바라본다.
“사기꾼들은 언제 잡혀갈지 모르잖아.”
사기꾼이 고개를 끄덕인다.
“사기꾼들이 잠수탈 때 어떻게 하냐?”
“어떻게 하기는 아무도 모르게 숨는 거지.”
사기꾼이 유들유들하게 웃는다. 뭔가 숨기고 있는 기색이 역력해 인호가 윽박지른다.
“그냥 좀 좋게 말해 주면 안 되냐?”
“응. 안 돼. 이것도 나름 노하우인데 공짜로 알려줄 수 있나.”
“어차피 죽어서 망령이 된 너한테 그런 노하우가 왜 필요한데? 빨리 좀 말해봐.”
사기꾼이 다시 귀를 후빈다.
“좋아. 원하는 게 뭐야?”
“뭘 원한다기보단 나를 조금 리스펙해주면 안 되냐? 매일 사기꾼, 사기꾼 그랬잖아. 그런데 사기꾼이 도움이 될 때가 다 있네? 이봐. 직업에 귀천은 없는 거라니까.”
“지금 어울리는 말은 아닌 것 같고. 그냥 좀 말해 줘라. 그 할머니 불쌍하지도 않냐? 지금도 영감님하고 아들 보겠다고 갔잖아. 너도 그 할머니 불쌍하다며. 아들도 안 됐다며.”
“그렇게 말하면 말을 안 해 줄 수가 없잖아. 잘 들어. 사기꾼들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자기만 아는 장소를 준비해 놓거든. 전혀 연관 없는 사람 명의로 원룸을 얻어 놓는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산속에 아지트를 만들어 놓기도 해. 나 같은 경우는 둘 다 준비했지. 다른 사람 명의로 원룸도 구해놨고 나만 아는 산속 동굴에 3개월 이상 버틸 물하고 음식들 가져다 놓지. 가끔씩 교체도 해 주고.”
“치밀하네.”
“교토삼굴이라고 들어봤냐? 영리한 토끼가 세 개의 굴을 준비해 놓는 거거든.”
인호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만약 니가 도재민이라면 어떻게 하겠냐?”
“당연히 납작 엎드리지. 함께 사기 치던 놈들 모조리 잡혀갔으니 어디로 숨기도 그럴 거야. 그중 한 놈이라도 은신처를 알면 끝장나는 거거든. 돈이 천억 넘게 있으면 뭐 하나? 쓰지를 못하는데.”
“나는 사실 그것도 궁금해. 천억이 넘는 돈을 어떻게 감출 수 있는 거야? 어디 은행에 넣어 둘 수도 없잖아.”
“가장 간단한 방법은 땅에 묻는 거지.”
“천억인데?”
인호의 물음에 사기꾼이 씨익 웃는다.
“인호야. 너 사기꾼들에게 있어 산업혁명 이후의 최대 혁명이 뭔지 아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신사임당.”
“응?”
“5만 원권 말이야. 5만 원권이야 말로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혁명이지.”
인호가 무슨 말을 하냐는 듯 자신을 바라보자 사기꾼이 입을 뗀다.
“너 사과 박스 하나에 현금이 얼마나 들어갈 것 같냐?”
“1억? 2억?”
“예전에는 그랬지. 정확히 5만 원권 나오기 전까지. 사과 박스에 2억 정도 들어간다. 그런데 5만 원짜리가 나온 다음에 한 박스에 10억이 들어가. 오케이?”
“그렇게나 많이 들어가?”
“5만 원권 백 장 한 뭉치가 스무 뭉치면 1억이야. 사과 박스에 잘 넣으면 10억이 들어가지. 예전에는 10억 담으려면 사과 박스 다섯 개가 필요했거든. 5분의 1로 확 줄어버린 거지. 천억을 놓고 생각해 보자고. 지금은 사과 박스 백 개잖아. 예전이라면?”
“5백 개네.”
“빙고. 사과 박스 백 개 정도는 1톤 트럭에 싣고 다닐 수 있잖아.”
“듣고 보니 그러네.”
사기꾼이 웃으며 말한다.
“5만 원권 처음 나왔을 다들 그랬거든. 이거 만든 놈 취지가 뻔하다고.”
“비자금?”
“그렇지. 비자금, 뇌물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려고 만든 거지. 5만 원권이 언제 처음 나왔는지 알아?”
“신경을 쓰지 않아서 잘 모르겠네.”
“21세기 이후 대통령 중 비자금, 뇌물에 가장 많이 엮인 대통령.”
“아-, 그 대통령?”
“그래. 그때 처음 나온 거야. 그러니까 더욱 합리적인 의심 아니겠냐?”
인호가 크게 웃는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 양반 잘살고 있나 몰라?”
“누가 걱정해 줄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뭐 그렇겠지.”
“그러면 이제부터 뭘 해야 할까?”
“그 일당이 마귀라는 양반한테 들킨 시점에 그놈이 어디에 있었는지 확인해야지. 다음은 정 검사한테 말해서 인근 CCTV 모두 확보하는 거야. 그 다음은 잘 알겠지만 노가다야, 노가다.”
인호가 고개를 위로 든다.
“그건 문제없지. 노가다에 특화된 고급 인력이 있으니까.”
* * *
마귀가 사기꾼 일당의 존재를 인지한 시점 도재민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의외로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날 도 상무가 갑자기 어딜 가야 한다고 했어요. 다급해 보이기도 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했어요.”
할머니가 도재민 일당이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 며칠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터미널에서 만났는데 강릉 가는 버스표를 끊었어요.”
“그날 날짜하고 시간 좀 알 수 있을까요?”
할머니가 기억을 더듬어 도재민이 터미널에서 버스를 탄 날짜와 시간을 기억해 냈다. 다른 일당들은 도재민이 도망칠 때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혼자 마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던 건 누구보다 먼저 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인호는 곧바로 그 사실을 정재훈에게 알리고, 강릉까지 가는 도중 정차하는 터미널의 CCTV 자료를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다음 날.
“탕탕탕. 일할 시간이다. 가자!”
인호는 탕탕탕을 데리고 서울중앙지검으로 향했다.
* * *
정재훈 부장검사실.
인호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정재훈과 유 형사가 뒤에 서서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다.
“이 파일들이 전부인가요?”
“네, 맞습니다. 중간에 멈추는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강릉 터미널의 CCTV와 그 인근 대로의 CCTV 자료만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인호가 품속에서 티비 리모컨을 꺼낸다.
“소장님. 그건 왜 들고 오신 거예요? 설마 그걸로 빨리 감기 같은 거 하시려는 건 아니시죠?”
“농담이라고 한 말이 아니길 바래.”
인호가 리모컨을 툭 친다.
“일해라. 탕탕탕.”
“탕탕탕이요?”
“네. 그런 녀석이 있어요.”
리모컨에서 푸른 기운이 흘러나온다. 탕탕탕이 불퉁한 눈빛으로 인호를 쏘아본다. 절대 집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걸 억지로 데려온 것이다.
지박령이기에 집을 벗어날 수 없었지만, 집안 물건들 중 탕탕탕이 평소 많이 접촉했던 물건을 통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리모컨이다.
드라마, 예능에 미쳐 있는 탕탕탕이다 보니 가장 많이 접촉하는 것이 리모컨이었다.
인호가 휴대폰을 조작해 도재민의 사진을 탕탕탕에게 보여준다.
“뭘 해야 할지 알지?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좀 마라. 세상에 공짜가 어딨냐? 니가 먹는 육전은 누가 공짜로 주는 줄 알아?”
인호가 허공에 대고 혼자 이야기를 했지만, 정재훈과 유 형사는 그렇겠거니 할 뿐이다.
도끼눈을 뜨고 인호를 쏘아보던 탕탕탕이 결국 컴퓨터 안으로 들어간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탕탕탕이 모니터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첫 번째 파일 23분 30초부터 봐.”
그 말을 하고는 다시 모니터 속으로 쏙 들어간다.
첫 번째 파일을 실행시킨 후 23분 30초에 맞춘다. 터미널에 버스 한 대가 들어오고 사람들이 내린다. 모자를 푹 눌러 쓴 남자가 내리는 모습을 보고 유 형사가 크게 외친다.
“저놈이네요.”
도재민이다.
정재훈과 유 형사가 놀란 눈으로 인호를 바라본다. 사전에 확인 없이 영상을 틀고 곧바로 도재민이 나오는 화면의 시간대를 맞추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세 번째 파일. 34분 20초. 주차장 CCTV야.”
탕탕탕이 말을 하고 다시 사라진다.
세 번째 파일을 열고 탕탕탕이 말한 시간대에 멈춘다. 주차장으로 걸어오는 도재민이 보인다. 영상 속에서 그는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고 있다.
“저 용달에 타네요.”
도재민이 뒤에 천막이 쳐진 1톤 트럭에 올라타고 곧 차를 출발시킨다.
“일곱 번째 파일 38분 50초.”
탕탕탕이 알려주는 대로 CCTV 영상을 재생한다.
“이게 마지막 영상이네요.”
“유 형사님. 지금까지 영상들 시간 체크한 후에 강릉에 협조 요청해 주세요. 차 넘버를 알았으니 추적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을 겁니다.”
탕탕탕이 컴퓨터에서 나와 ‘오늘은 산적이 땡기네’라고 말한 후 리모컨 속으로 들어간다.
“경험할 때마다 참 신기하네요. 전에 말씀하신 그 이연호 찾은 망령이죠?”
“네. 아주 쓸모가 많은 망령이에요. 가끔 필요하시면 연락 주세요.”
리모컨에서 탕탕탕이 고개를 쑥 내민다.
“다 듣고 있거든? 적당히 하자.”
“어, 미안.”
* * *
강원도 강릉 주문진항.
“이야, 이게 뭔 고생이야?”
“여기는 확실히 맞는 거지?”
사기꾼과 뚱보가 차에서 내리며 주위를 둘러본다.
“나도 맞았으면 좋겠다.”
도재민이 탄 트럭을 추적하던 중 난관에 부딪혔다. 잘 이동하던 트럭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트럭이 사라진 구간에 가 보니 CCTV가 없는 곳에 트럭이 버려져 있었다.
다시 한번 탕탕탕이 고생해야 했다.
도재민이 강릉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지기 전이었기 때문에 돈이 담긴 상자를 도수 운반했을 리는 없다.
트럭이 버려진 구간에 들어온 시간 이후로 양쪽 차선에서 트럭이 지나간 것을 확인해야 했다.
트럭에 실린 돈을 옮겨 실어야 할 테니 CCTV가 없는 구간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던 트럭을 찾으면 될 것이다.
트럭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인호가 찾는 구간에 오래 머문 트럭이 두 대였다는 것이다.
두 대 중 한 대는 대포항까지 이동했다. 그 트럭을 찾아 조사해 보았지만, 인호가 찾던 트럭이 아니었다.
남은 한 대의 트럭이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 주문진항이었다.
“소장님. 우리 먼저 밥 좀 먹으면 안 돼요? 서울에서 출발해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요.”
함께 온 이민정의 말에 인호가 머리를 긁적인다.
“그런가?”
도재민을 빨리 찾을 생각에 밥 먹는 것도 잊고 있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주문진 왔으면 당연히 오징어 먹어야죠!”
이민정과 함께 항구 근처 횟집으로 가 오징어와 활어회를 시켜 푸짐하게 식사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인호가 주위를 살핀 후 말한다.
“이제부터 정말 발로 뛰어야 하네.”
마지막으로 도재민이 탔을 것으로 추정되는 트럭이 찍힌 CCTV가 있는 곳부터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이동하다 건물에 달린 CCTV가 보이면 리모컨에 담아 온 탕탕탕을 시켜 확인해 보았다.
갈림길이 나오면 두 곳 모두 확인하며 점점 도재민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설마 밀항하려고 항구에 온 건 아니겠죠?”
이민정의 말을 들으니 갑자기 불안한 마음이 든다. 혹시나 싶어 정재훈에게 전화를 하니 단번에 안심시켜 준다.
- 밀항이요? 그거 영화에서나 나오는 겁니다. 밀항선 타면 오히려 감사하죠. 바다에서 어디로 도망치겠어요? 그리고 현금이 천억이라면서요? 불안해서 배에 타겠어요?
“여기 있는 게 확실하단 소리지? 어디에 있냐?”
인호가 환하게 웃는다.
“천억짜리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야.”